나실인

연구자료 2014. 7. 30. 09:44

나실인은 히브리어로〈나지르〉인데 종교 계급의 일원으로 특별히 하나님께 헌신한 자를 가리킨다.  나실인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민수기 6장1-21절에 나와 있는데 이것은 B.C. 1445년경 이스라엘백성이 시내 산을 출발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계시하신 것이다.  나실인에 대한 개념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서원과 연관시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남자든 여자든 간에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면 그 사람은 나실인의 규례를 지키고 자기 몸을 구별하는 날을 채움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나실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세시대 이후에는 예외적인 양상(樣相)이 나타났으니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자식을 나실인으로 받치라고 지시하기도 하였으며(삿 13:7), 부모 자신이 그 같은 서원을 하기도 하였다(삼상 1:11).  이들 나실인들은 자기 몸을 구별하는 날 동안 몇 가지 규례를 반드시 지키도록 되어 있는데 그 규례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않아야 했다( 민 6:6).  둘째, 그들은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여야 했다(민 6:3). 마지막으로 그들은 삭도를 머리에 대어서는 아니 되었다((민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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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는 중립이 존재할 수 없고(막 9:40),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믿든지 아니면 마귀에게 속해 살던지 둘 중의 하나이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지대란 없습니다(요8:44-47).  물론 어중간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 앞에서 토하여 내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으며(계 3:15-16), 주님은 신앙에는 중간지대가 없다는 것을 마태복음 12장30절에서 단호하게 말씀하셨는데 이 말의 의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끝까지 중립적으로 남아 있기란 불가능하며 적극적으로 주님을 좇지 않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사탄을 좇아가는 추종자들이라는 것입니다(눅 9:50).  한편 예수님은 신앙의 중간지대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곧 바로 인간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마 12:31).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을 근심케 할 수도 있고(엡 4:30), 그분의 역사를 제한하거나(살전 5:19), 심지어 저항할 수도 있지만(행 7:51), 이러한 죄들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얼마든지 예수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을 수가 있는 죄들입니다(요일 1:7).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도 모르게 연약하여 성령께서 싫어하시는 행동이나 말, 그리고 악한 생각들을 함으로 근심시킬 수는 있어도(사 63:10), 그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 때 성령을 근심시킨 것과 같은 맥락으로(마 26:69-75), 주님은 이러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고(눅 22:31-32), 그는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았으며(요 21:15-18), 사도 바울 역시 과거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자신이 알지 못했기에 범한 죄라고 고백한 적이 있었는데(딤전 1:13), 하나님은 그러한 바울을 용서해 주셨고 택한 그릇으로 사용하셨습니다(행 9:15).  이것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한다면(사 1:18), 그 죄가 무슨 죄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엡 1:7, 요일 1:1:9).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어떠한 것입니까?  이 죄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한데 먼저 Augustine은 이 죄를 정의하기를 그리스도의 용서를 믿지 않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며(롬 2:5), Chrysostom은 이 죄에 대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만 있을 수 있는 죄로서 그분이 성령의 권능으로 이적과 기사를 행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시기하여 마귀의 역사로 매도한 사람들이 짓는 죄라고 하며(눅 12:10), 또한 후기 루터파 신학자들은 성령훼방 죄는 중생은 했지만 바울의 동역자 데마(몬 24절, 딤후 4:10), 또는 가룟유다(눅 6:12-16, 요 18:1-3)처럼 신앙을 도중에 버린 믿다가 타락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합니다(히 6:4-6).

 

그러나 칼빈주의에서는 이 견해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그 이유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고린도전서 12장3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즉,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훼방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만일 거듭난 사람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한다면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궁극적 구원교리와 반대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롬 8:38-39, 요 6:39, 엡 1:13-14, 벧전 1:4-5).  다시 말해 거듭난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상태라(요 5:24), 그 구원을 결코 취소될 수 없으며(요 10:29),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히 6:4-6, 10:26-27)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 그리고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절대로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롬 8:1-2).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다른 모든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유독 성령을 훼방하는 죄만이 사함을 받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Louis Berkhof은 이 문제에 대해 그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나 성령의 역사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신 32:39),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인 일과 대조하며(레 24:11),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신성 모독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인 레위기 24장16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사실 이러한 학자들의 견해도 참조할 필요는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이 생긴 배경을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셨을 때 곁에서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곧 바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을 때 주님은 자신이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단언하시면서(마 12:22-28), 자신이 행하는 성령의 사역을 바알세불의 능력으로 돌리는 것은 인자를 거역하는 말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령을 훼방하는 것으로 이 세대에서나 오는 세대에서도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무서운 죄라고 경고합니다(마 12:32).  여기서 ‘훼방’이란 말은 신적 위엄을 손상시킨다는 말로 극단적인 비방이나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모독을 말하는데(마 9:3-4), 열왕기하에 보면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었을 때 살 수 있는지를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묻기 위해 사람을 보내자 엘리야가 그 사신을 만나 이스라엘에 신이 없어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내느냐고 말하면서 그가 죽을 것을 예언합니다(왕하 1:1-18).  여기에 나오는 바알세붑은 불레셋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으로 에그론 사람들은 이 ‘파리의 주인’이 모든 질병을 치료한다고 믿은 것처럼 예수님이 성령을 힘입어 병자를 고칠 때 바리새인들은 그 성령의 사역을 더러운 ‘죽은 파리’(전 10:1)의 신에게 부탁하여 병을 고친다고 비난을 했던 것입니다(막 3:22).  이것은 참으로 대단히 무서운 반역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을 사단의 일로 매도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회개시키는 성령 자체를 훼방하기 때문에 절대로 회개가 되질 않아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히 10:26-27).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이적에 대하여 단순히 의심하거나 무의식중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이러한 주님의 이적이 나타나고 내적으로 확신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심사숙고하여 고의적으로 성령의 역사에 대해 반항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어떤 역사가 나타날 때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사람의 역사인지를 알지 못하여 대적하는 것이 아니고 확실하게 알면서도 귀신의 역사로 중상 모독하는 행위가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사람들은 나름대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과 천사의 활동을 믿으며(행 23:6-8),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말씀을 가르쳤던(마 23:2-3), 이스라엘의 선생(신학자와 목사)들입니다(요 3:10).  사실 이들은 니고데모처럼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며 그분께서 어떻게 역사한다는 것을 분별할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지만 실제로 구원받은 주님의 백성은 아닙니다(요 3:1-8).  다시 말해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행 9장),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던 것처럼(갈 1:13-14), 스스로 성도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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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감정이 생기는 가장 객관적인 근거가

신적인 일들이 가장 탁월하고 그 자체로 사랑스럽다는데 있어야지

그 일들이 자기 이익과 관련되었다는데 있어서는 안 된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탁월성과 영광 때문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길 등을 사랑해야지 자신들이 얻게 될 가상적인 이득이나 또는 받을 혜택이나 자신의 이익이 관련되었기 때문에 사랑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부모들은 자기 자녀에게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강하고도 습관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  이런 감사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악인 가운데도 작용하는 원리이다(마 5:46, 눅 6:32).

 

그래서 사울은 종종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다윗에게 크게 감동했고 다윗에게 감사하면서 마음이 풀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상습적인 적개심이 여전히 있었다.  자연적인 본성으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듯이 사람들은 하나님께도 그와 같은 감정이 있을 수 있다.  자아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작용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작용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실제로 나아만 장군과 느부갓네살 왕과 홍해에서의 이스라엘 자손의 경우가 그러했다.

 

반면에 참된 성도가 갖는 사랑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는 하나님이시며 그분 본성의 탁월함에 대한 사랑이 모든 감정의 원천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감사는 그분의 선하심에 감동되어 나오는 것이지 우리에게 어떤 이득이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 기초는 이미 마음속에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은 혜택이 이런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하는 유일하고 주된 객관적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 있는 아름다움의 일부인 그분의 선하심이 그 주된 근거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참되게 발견하고 즐거워하는 참된 성도는

자신이 보는 바 그리스도의 영광에 완전히 사로 잡혀서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업적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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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교회는 도덕적 다수가 아닌

거룩한 소수에게 의존했다.

그러나 현대교회를 지배하는 것은

거룩한 열정이 아니라 유행에 민감한 감각이다.

선지자처럼 외치지 못하는 교회는 나약하고 애처롭다.

초자연적 능력으로 무장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얄팍한 세상 방법들에 의지한다.

사도들이 사역했던 교회는 고난 당하는 교회였으나

지금의 교회는 “내게 부족함이 없다”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성령님이 지배하셨던 신약의 교회는 놀라운 일들을 이루었지만

오늘날 교회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신약의 교회를 들으면 ‘박해’ ‘투옥’ 그리고 ‘가난’이 머리에 떠오르지만

지금 교회라는 말을 들으면 ‘번영’, ‘인기’, 그리고 ‘싸움’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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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과의 영적전쟁에 있어 그리스도인들은 가능한 많은 기도의 뒷받침이 필요한데(막 9:29), 우리는 무모하게 혼자 싸우려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 특히 중보기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의 기도의 후원으로 그리스도 앞에서의 사역을 계속해 나아가야 할뿐만 아니라 사역을 행하는 사람에게 있어 영적인 스승을 갖는 일은(마 10:24), 또 하나의 중요한 후원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개인주의적 성향과 교회 전통과 제도의 영향으로 인해 사역을 행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영적으로 독립할 만큼 굳센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인데 아마 이것은 지나친 자만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성령의 사역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흔히 부지불식간에 모든 사역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망상이나 착각에 빠져들곤 하지만 실제로 사역을 행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사탄의 공격목표가 되는 일이 많으므로 영적으로 같이 기도할 수 있거나 협력 사역할 수 있는 사람이 더 필요한 법입니다.  또한 적극적으로 이러한 사역에 종사하고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치유 받아야 할 상처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일뿐 아니라 또한 우리 자신이 더욱 더 건강해질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하는 일이 중요하고 나아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격려와 축복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오늘날 우리는 영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갖도록 배워 왔으므로 자신이 그러한 태도에 주목하는 일에 대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스스로 어떤 유익을 기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령의 사역을 행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지나칠 정도로 무비판적이고 쉽게 믿어 버리는 경향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이런 사람에게는 ‘치유’(행 19:11-12)와 ‘초자연적인 역사’(막 16:20), 그리고 ‘지식의 말씀’(고전 12:8)과 ‘방언’(고전 14:39), 그리고 ‘예언’(고전 14:1)이 찬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기에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탄은 모방의 천재라는 것을 알고 대처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강신술을 심취했던 Raphael Gasson“사단은 극히 교묘한 방법으로 성령의 은사를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 거짓으로 모방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성경에서도 이것에 대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케 하기 위해서 표적과 기사를 행한다고 말합니다(마 24:24).  따라서 우리가 어느 정도 비판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쉽사리 미혹에 빠지기 때문에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해야 하는 것은(요일 4:1), 바로 이런 분야에서의 분별력을 갖추기 위한 것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표방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마 7:21-23).

 

따라서 우리가 사탄과의 영적전쟁에서 이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영들을 분별할 수 있는 은사가 필요하고(고전 12:10), 또한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방식을 연구하는 데에도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어느 정도의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비판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고 한편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하게 입증되는 표적과 기사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막 16:20, 행 4:14-16).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기만 하신다면 어떤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부정확한 이야기들, 예를 들면 간증이나 초자연적인 역사를 있는 그대로 어떤 확인이나 검증 없이 믿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더라도 진실 되고 주의 깊은 태도를 가지고 분별하는 것이 낫고 그것에 관련된 모든 측면들을 자세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살전 5:19-22).  다시 말해 우리의 신앙은 회의주의자 도마와 같이 비록 의심을 품고 비판하는 태도를 갖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하고 반면 진실을 확인하고 나서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요 20:24-29).  즉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게 행하신 일을 보면서도 믿기를 완강하게 거부했던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행 7:51), 바리새인들처럼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요 9장).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일들을 경험한다는 것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흥미롭고 신비로운 일이며(요 3:8), 그 사역에 수반되는 거의 모든 사건들마다 새롭게 무엇인가 배울 어떤 것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강한 호기심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현재 어떤 역사를 일으키실 것인가에 관한 호기심이고 그분의 역사에 대한 믿음과 통찰력이 성장해 감에 따라 어떠한 상황에서나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매일 기대하고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Jonathan Edwards는 『신앙감정론』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성령은 사람들의 생각하듯이 틀에 짜여진 방법으로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은 너무나도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대부분 성령을 추적하거나 그의 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들이 알 수 없는 실로 너무나도 다양한 방식과 매우 신비롭게 역사하시기 때문에 스스로의 방식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성령 하나님께서는 현재에도 여러 가지 역사를 이루고 계시며(히 13:8), 특히 이러저러한 삶의 어려움으로 고통당하거나 육체의 질병과 영적으로 주님과의 관계의 단절로 인한 문제로 갈등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자비와 사랑을 베풀고 계십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성령이 하시는 일에 대해 더더욱 열린 마음을 가지고 받아들이길 원하시고 계실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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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당신이 예배를 지겨워한다면

당신은 아직 천국에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잠깐이라도 천국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거기에서는 누구나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일꾼을 갖기보다 예배자를 갖기 원하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이 일손이 달리는 공사장의 현장 주임처럼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분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타락했다.

 

우리는 그분이 길가에 서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내 일을 위해 수고할까?”라고

고민하시리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전혀 없다고 해도

얼마든지 자신의 일을 이루실 분이시다.

 

하나님이 먼저 원하시는 것은 예배자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에 순종하지 않고 

성령충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예배는 

전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아니다.

 

A. W. 토저『예배인가, 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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