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성숙해지는 과정과 성령의 새로운 경험을 맛보는 여정에서 자신의 삶 가운데 숨겨져 있던 치유되어야 할 새로운 영역들이 마주치게 되는데 어떤 상처는 하나님의 빛이 조명되는 순간 치유되기도 하지만 어떤 상처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치유의 과정을 거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치유 같은 것은 필요 없어요. 필요한 모든 것은 회심하는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이지요. 나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잖아요. 옛것은 다 지났거든요!”(고후 5:17).  사실 이러한 확신은 두 가지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문제는 말 자체는 맞는 말 같지만 실제의 그들의 삶에서 아직 옛것이 다 지나갔음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골 3:1-6), 또한 성경 자체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히 12:4).  다시 말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해서 완전히 천사 같은 삶을 산다고 보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여러 문제들, 예를 들어 어려움과 역경, 그리고 고통과 질병으로부터 완전히 면제되는 것은 결단코 아니며 모든 신자들은 여전히 육의 몸을 입고(고후 5:1),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육체의 욕망과 죄에 굴복당할 가능성을 안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롬 6:12-13).

 

사실 사탄은 이미 용서받은 죄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죄의식을 느끼도록 사람들을 유혹하지만(계 12:10), 어떤 사람들은 비록 자신들의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발람이나(민 24장), 사울처럼(삼상 19:23), 성령의 능력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사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 길이 전혀 없습니다.  즉 죄악에 빠져 들게 된 사역자들의 삶 가운데서 그러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러한 상태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로 하여금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사역을 행하도록 허용하실 때가 많은데 왜 그렇게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걸음마를 배우다가 넘어졌다고 해서 어린아이를 내다 버리는 사람은 없듯이 부모는 그 자녀가 결국 걸을 수 있게 되리라고 기대하며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사역자가 넘어졌다고 해서 단번에 진멸해 버리지는 않으시지만(사 42:3, 마 12:20), 우리의 마음을 읽으시고 실수와 고의적인 반역 행위를 구분하시는 분이시기에(시 9:8, 렘 11:20), 고의적으로 죄에 빠져든 사역자에게는 마땅한 징벌을 내리고(히 10:26), 걸음마를 배우다가 자주 넘어지는 사람에게는 실수 많은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크나큰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요 21:15-19).

 

이렇듯 연약한 사역자에게 있어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그분과 온전히 친밀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데 이 점에 있어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받아야 합니다.  먼저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충만을 통해 능력을 받으셨지만(행 10:38), 그분의 권세는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로부터 나온 것으로 주님은 몇 시간이든 기도하시는 가운데 아버지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고(막 1:35, 눅 5:16), 또한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과 일치시키셨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신 권능이 아니면 어떠한 일도 행치 않으셨습니다(요 5:19, 7:16-18).  우리들 역시 성령충만을 통해 예수님처럼 능력 받을 수는 있지만(막 16:17-20, 눅 24:49, 요 14:12),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키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역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를 통해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을 치유하거나 귀신들을 내어 쫓으려고 할 때 우리는 성령충만을 통해 그러한 목표를 성취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추게 되는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신 것처럼(요 7:16-17), 우리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아야 합니다. “과연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역을 행하셨기 때문에(요 5:30, 8:28), 그 성공률은 백퍼센트였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은데 그 차이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고 그 뜻에 따를 수 있는 능력이 너무나도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행함에 있어 가장 어려운 관문은 능력을 부여 받는 일이라기보다는 예수님처럼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 즉 우리의 뜻과 그분의 뜻을 일치시키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기에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는 아버지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아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요 12:49).  사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은혜와 축복을 받으며(렘 29:11), 사단의 올무에서 벗어나고(눅 4:18), 사랑과 기쁨을 체험하며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게끔 사역을 행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에 일치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막 9:38-40).  따라서 우리는 최소한 이러한 핵심적인 영역들에 대하여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리라는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의 도구로서 성령충만하게 사역을 행할 수는 있겠지만(고전 12:11), 일정 시점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어떠한 역사를 일으킬지에 대해서 아는 일이 그다지 쉬운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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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출신 부흥강사인 Todd Bentley가 Florida Lakeland에서 “사도 임명식” 받는 장면을 2008년에 본적이 있었는데 그때 Peter Wager를 비롯해서 그들 세계에서 잘 알려진 사람들인 Rick Joyner, Che Ahn, Bill Johnson, John Arnott, Chuck Pierce 외 다수의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여기서 참으로 특이하게 본 것은 여성 선지자로 알려진 Stacy Campbell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언하는 장면과 Bentley의 안수를 통해 Che Ahn 부부가 쓰러져서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장면들이었는데 물론 이런 경우에 타락한 인간 조건에서 항상 찾아볼 수 있는 복합적인 심리적 현상을 수반하기 때문에 눈에 거슬리게 보일 수 있고 또한 쓰러져서 떤다고 해서 인도의 쿤달리니 명상과 같다고 단정지울 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Jonathan Edward, John Wesley, George Whitefield, Charles Finney와 같은 사람들이 집회할 때에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궁금한 것은 John Stott가 말한 것 같이 사도는 교회의 공식적인 인준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고 말했는데 이들에게 행해진 임명식이 과연 성령께서 직접 지시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불러 세우는 것처럼 했느냐는 것입니다(행 13:1-3).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역자의 열매로(마 7:15-20), Bentley는 본 부인과 이혼하고 함께 사역을 했던 아시아계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 이것 또한 하나님의 뜻일까요?

 

사실 지금도 논쟁이 심한 것이 ‘신사도 운동’이 아닌가 생각이 되는데 어떤 사람은 “이단이다” 또 다른 사람은 “이단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더 심하게 말하는 사람은 “마귀의 운동이다”라고 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신사도 운동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도’라는 단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그들이 말하길 지금 시대에는 사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사도라는 말을 쓴다는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로서 모든 것이 끝났기에 또 다른 사도는 없다는 것입니다(계 21:14).  그래서 사람들은 에베소서 2장20절 말씀을 인용하여 오늘날 교회 안에는 사도와 선지자의 직임은 없고 다른 직임, 즉 ‘복음을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직임만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사도와 선지자가 필요하지 않는다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만을 주셨으니”라고 기록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를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엡 4:11-12).  다시 말해 이 은사들이 결코 단절된 적이 없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그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히 13:8).

 

그렇다면 이러한 은사들을 교회에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4장12절에 보면 세 가지를 위해 다섯 가지 은사들을 주셨다고 말하는데, 하나는 “성도들을 준비시키고”  다른 하나는 “섬기는 일을 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은사가 교회 안에서 존재하게 될까요?  바로 뒷 절에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으로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 라고 말합니다(엡 4:13).  환언하면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그리고 교사의 직임으로 불리워지는 사역의 은사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고전 13:10).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자들로 구성된 주님의 몸으로(엡 4:16),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성장해 나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엡 2:21, 벧전 2:2).  결코 우리들 중에는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사람은 없고(엡 4:15), 주의 자녀는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항상 자라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벧후 3:18), 모든 사역의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거나 영적으로 지어져가기 위해 주어진 것들로 계속 자라나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께서 친히(엡 4:7-10), 특별한 사역자들을(고전 12:28), 허락해 주신 것은 교회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성도들이 영적 성장의 목표, 즉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교회에 다섯 가지 직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약 성경에서 ‘사도’로 불리우는 최초의 사람들은 본래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시고 임명하신(막 3:13), 열두 명의 제자들이지만(마 10:2),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마 26:15), 맛디아가 제비뽑기로 선택되는데(행 1:26), 이 열두 명은 유일한 사람들이고 더 이상 확대될 수 없는 새 예루살렘 성벽 열 두 개의 주춧돌 위에 새겨진 어린양의 사도들이며(계 21:14).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자들로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고(행 1:21-22), 교회의 기초를 놓는 사역을 했습니다(엡 2:20).  반면 또 다른 사도들이 있었는데 교회 역사 전체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부흥의 선두에 세우시고 주님 나라를 위해 많은 일들을 행하도록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보내셨는데 그 중에 바울(롬 1:1, 행 22:4), 바나바(행 14:14), 실라(살전 2:6), 야고보(갈 1:19, 2:9), 그리고 본문에 많은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지만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같은(롬 16:7), 사람들을 추가시킴으로 역사 속에서 언제든지 다른 사람들을 추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열두 명의 사도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사도들을 추가할 수 있었다면 주님께서는 1세기 이후에 또 다른 사람들을 얼마든지 추가하실 수 있고 성경의 어떤 구체적인 본문에도 열두 사도들 외에 다른 사도들이 없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고린도전서 15장5-7절에서는 열두 사도 외에 ‘모든 사도’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도’란 용어를 놓고 George Peters는 『A Theology of Church Growth』에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교회의 초기 사역에서 사도들이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위치는 신약 성경 전체에 걸쳐서 인정된다. 오직 그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로 불리며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사도들’이나 ‘교회의 사도들’로 불린다”  이 말의 의미는 신약 성경에 여러 사도들이 나오지만(마 10:1-4, 갈 1:1), 그 어떤 구분만큼은 분명하게 차이가 있고 다르다는 것입니다(롬 16:7, 고후 8:23, 빌 2:25).  John Stott도 일차적인 의미에서 열 두 제자(눅 6:12-13)와 바울과 같은 계승자(갈 1:1)는 오늘날 존재하지는 않지만 ‘선교사’라는 이차적인 의미의 사도들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오늘날 서로 ‘사도’라고 추겨 세우며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의 사도됨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으며 또한 이렇게 사도된 사람들을 누가 검증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Peter Wagner는 이 문제를 놓고『교회의 지각 변동』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종종 신사도개혁운동의 최고 지도자들과 만나면서 사도에 대한 점검 문제를 자주 제기하곤 했는데 일관성 있는 확실한 대답을 아직 얻지 못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이 문제는 쉽게 결정내릴 수 없는 매우 민감한 부분이라 만족할 만한 해답이 없다는 것으로 Wagner 자신도 사도의 증명과 점검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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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

연구자료 2014. 6. 18. 11:29

‘사사’라는 말은 히브리어로〈쇼페팀〉이다.  그런데 영어 성경에서는 이를 ‘재판관’으로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사사란 말은 재판관이란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 이상의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사사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령에서부터 왕국 설립 때까지 백성들을 다스리며 그들에게 공의를 베풀고 재판을 시행한 그리고 이방 군대의 침입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한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를 가리킨다.  가나안을 정복하기 까지 백성들의 지도자가 활약하였던 여호수아가 죽고 나자 다시금 백성의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때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세우셔서 그 직무를 감당케 하셨다(삿 2:6-23).  사사기에는 12명의 사사들이 나와 있는데 옷니엘이 제일 처음으로 등장한다(삿 3:9).  아무튼 여호수아의 사후(死後) 사사들의 임무는 백성들의 소송 사건을 해결해 주는 것 외에도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 숭배를 멀리하도록 교훈하며 그 죄악으로부터 보호하는 것과 이방인과의 싸움에 있어서 백성들을 인도하여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것 등이었다(삿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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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6:4, 딤전 1:17), 신성으로서의 성부와( 2:7, 벧전 1:2), 성자와( 9:6, 3:16-17), 성령으로( 1:1-2, 5:3-4), 구별된 위격으로 존재한다는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인 것만은 사실이기에 C. F. Keil & F. Delitzsch는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은 철학적 추리의 산물이 아니라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계시의 사건이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셋인 동시에 하나” 혹은 “하나 안의 셋”이라는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어떤 종교나 사상, 심지어 신화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생각하기 쉬운 쪽을 따라 어느 정도 자의적으로 이 삼위일체를 개념 짓기 쉬운데 그 결과 사람들은 성부, 성자, 성령을 각각 다른 신으로 인식하는 ‘삼신론’, 또는 한 하나님과 성부, 성자, 성령은 모두 다른 신으로 인식하는 ‘사신론’이라는 그릇된 관념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성부, 성자, 성령을 완전히 구분해 버리는 삼신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보다 여러 면에서 열등하신 분인 것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많고 특히 성령에 대해서는 그분이 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도 간과한 채 마술사 시몬처럼 단지 무슨 비인격적인 큰 능력으로만 생각하는 일이 많은데( 8:19), 이것을 엄격히 따진다면 신성모독적인 행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 하신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성부가 성자도 성령도 아니며 성자 역시 성령도 아니라는 의미로 이 삼위는 각각 독립된 인격체를 말하는데 성경 요한복음 11-2절과 1724절에 보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하신 분으로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관계를 볼 수 있고,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다는 증거와(요일 2:1),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성부 하나님 앞에서 중보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7:25), 예수님이 아버지와 독립된 다른 위격이심을 보여줍니다.  또 성부는 성령이 아니며 성자도 성령이 아닌데 로마서 827절에 보면 성령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성부와 성령이 독립된 위격임을 보여주며 성자가 성령이 아니라는 사실도 예수님의 지상명령과( 28:19), 그분이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14:16), 하신 말씀을 통해 성자 역시 성령과 독립된 인격체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16:7).  Calvin은 이 문제를 놓고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며 단일하신 본질로(one simple essence) 이해된다는 것이며 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three persons) 또는 세 실재가(hypostases)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간략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3:20), 동시에 세 신격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각위가 온전하신 하나님”이라고 증거 하는데, 먼저 성경은 성부가 하나님 되심을 확인시켜 주고 있으며( 1:1), 바울은 우상의 존재에 대해 분명한 이해가 없는 고린도 교회와(고전 8:4-6), 갈라디아 교회 인사말 속에서( 1:3), 인류 만물을 다스리시고 계신 성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말한 적이 있고( 103:19), 예수님도 고난을 앞두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신 사건을 통해( 22:42), 성부가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역시 하나님 되심을 성경은 증거 하는데(요일 5:20), 예수님은 인간의 죄와 허물을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완전한 인간이자( 1:21),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신데( 9:6), 사도 요한과( 1:1, 14), 바울( 9:5), 그리고 의심 많은 제자 도마까지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진실로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 20:28).  또한 성경은 성령도 온전하신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하는데 사도행전에 보면 물질에 눈이 어두운 아나니아에게 베드로의 책망과( 5:3-4),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경고 속에서(고전 3:16), 성령은 단순히 어떤 감화력이나 치유의 은사를 내뿜는 막연한 에너지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살피시며(고전 2;11), 인생과 교제하시며( 14:26), 발걸음을 지도하시는( 16:13), 살아계신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시고 각위는 온전하신 하나님이지만 성경은 결코 “나뉠 수 없는 유일하신 분”이라고 강조하는데( 37:16), 이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신명기 64절에 나오는 단어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으로 표현된 히브리어 ‘엘로힘’이라는 명칭과 동시에 ‘여호와’라는 칭호가 함께 사용된 것을 볼 때에 여기서 여호와라는( 6:2), 성호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하나님만이 거룩하시고 다른 존재와 비교할 수 없는(왕상 8:60), 절대적인 신성을 소유하신 유일무이한 분이심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15:11).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신 부분과( 10:30), 바울 역시 하나님이 한 분 되심을 고백했으며(고전 8:6, 딤전 2:5), 야고보는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고 두려워 떤다고 말합니다( 2:19).  이러한 성경 말씀을 비추어 볼 때 찬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은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며 모세는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4:35), 하나님 한 분만이 천하의 왕, 참 하나님이시고 그 이름 하나 밖에 없는( 14:9),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45:5-6).  , 하나님은 삼위인 동시에 결코 나뉠 수도 분리될 수도 없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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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영적이고 은혜로운 감정은

영적인, 초자연적인, 신적인 영향과 작용들이

그들 마음에 역사할 때 생겨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갖기 전에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신시키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시려고 위로되는 성경 본문들을 마음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다.  참된 신앙은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즉 참된 신앙은 어떤 특별한 본문 말씀이 어떤 때에 하나님이 직접적인 능력으로 마치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떠오르게 되었다는 판단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으로 떠오른 말씀은 완전히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판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16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신다고 말할 때 사도가 뜻하는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양자의 영과 아들의 영으로서 인도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아버지를 대함과 같이 행동하도록 이끄시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는 여기서 두 가지 영을 말씀하는데 하나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나 속박의 영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인 아들의 영이나 양자의 영으로 사랑의 영은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자연스럽게 다가가게 해주며 그분의 자녀로서 행동하도록 이끈다.

 

따라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성령의 증거는 어떤 속삭임이나 직접적으로 생각나게 하는 것이나 직접적인 계시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성령이 은혜롭고 거룩한 영향을 주시는 것이며 자녀가 지녀야 할 성향과 기질을 주는 것이고 어린이 같은 달콤한 사랑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는 그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의 연합을 명백하게 보고 느낀다.  그것은 너무나 강하고 생생해서 그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은 마음속에 자녀의 영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주입하고 심음으로써 증거를 주신다.

그리고 우리의 영 즉 우리의 양심은 즐겁게 이런 증거를 받아들이고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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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한지 4-5년이 지날 때쯤, 3년간 미국 남부지방 시골 동네에 살면서 처음으로 성령의 은사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가졌던 미국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교회를 다니면서 세 번 놀라운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일예배 시간에 어떤 나이가 지그시 드신 목사님께서 강대상에서 말씀을 전하시려고 할 때에 이백 명 이상의 성도들 가운데 한 여자 성도가 일어나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는데 그때 담임목사를 비롯한 모든 회중들은 고개를 숙이고 그 여성의 방언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 여성이 방언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 얼마 후에 남자 성도가 일어나 그 여성이 방언으로 말했던 것을 통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 성도가 한 문장씩 통역할 때마다 목사와 회중들은 ‘아멘’으로 화답하였고 방언통역이 끝나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든 성도들이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이러한 광경은 성령의 은사로 문제가 많은 한국교회나 한인교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꿈같은 일이고 나에게 있어서도 처음으로 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 신기하고 호기심에 눈을 뜬 상태에서 고개를 들고 모든 것을 보았는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예배가 무질서와 혼란 속에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 속에서 화평으로 질서 있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Gordon Fee는 공동체 안에서 방언이 지닌 역할에 대해 『Paul the Spirit and the People of God』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방언은 성령으로 감동된 말이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27절과 11절 그리고 142절에서 분명해진다. 현대 교회 안에서 방언을 제자리에 두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 즉 방언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사람들은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바울은 결코 방언을 칭송하는 척하면서 비난하지도 않고 방언에 대해 경의감도 갖지도 않는다. 성령에 의해 능력을 부여 받은 모든 행위에 대해서 그러하듯이 바울은 방언이 적절한 자리에 있을 때 그것을 존중한다. …방언은 본질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자나(고전 14:14), 방언을 듣는 자들(고전 14:16), 모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방언은 회중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는 통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통역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해 한 말이 아니라(고전 14:2, 14-5, 28), 하나님께 말한 ‘비밀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사도 바울이 공적인 모임에서의 방언사용과 관련해서 방언을 정죄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대단한 것으로 높이지 않은 것처럼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 방언을 해서는 안 되고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사용하는 은사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오늘날 통역이 되지 않는 방언은 공적인 모임 안에서 남용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라고 주장하는 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Fee가 이렇게 성령의 은사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을 보여주는 반면에 Richard Gaffin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방언에 대해 『Perspectives on Pentecost』에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방언도 역시 교회 창설을 위한 은사이지만 예언과 함께 교회 생활에서 철수되었다. 다시 말해 방언은 사도직과 연결되어 있던 모든 다른 창설기의 은사들과 함께 철수되었고 더욱이 예언의 경우도 그렇지만 방언의 경우도 그 기능을 사도시대에 중지된 기능과 그 이후에 계속되는 기능으로 나누어 생각할 만한 성경 해석적 근거가 없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부터 예루살렘의 멸망 때까지 계속된 언약시의 창설기 내지 전환기에 나타났던 다른 현상들과 아울러 방언은 천국이 완악하고 불신앙적인 이스라엘로부터 그 열매 맺는 백성에게로 옮겨진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시였다( 21:42-43)  그러면서 그는 고린도전서 138-13절 말씀을 가지고 성문화(성경기록)가 끝났기 때문에 방언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는 가르침은 지나친 견해이며 오류라고 강력히 말합니다.  이 말을 쉽게 요약하면 방언은 불신자들에 대한 표적으로( 28:11-12), 교회 창설기 때 있었지만 지금은 이미 중지된 은사이기에 그러한 가짜 영성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은혜의 방편인 말씀만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Gaffin의 이러한 주장에 비추어 오늘날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너무나 무질서하게 은사를 남용하거나(고전 13:1-3), 아니면 통역되지 않는 방언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특히 초청받은 사역자가 강단에서 마이크를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본인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을 할 때(고전 14:13), 그것이 무슨 대단한 영성인 것처럼 교인들도 같이 열광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Michael Green은 이런 문제를 놓고 “우리는 방언을 거절해서는 안 되고 또한 그것을 영성 전부로 보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 교회사를 찾아보면 성령의 은사를 강조했던 사역자들이 초기에는 사역을 잘하다가 끝에 가서 비난받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예를 들어 Tertullian이 가장 많이 지지했던 Montanus와 같은 사람은 말년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일을 통해 서방교회 신학자들은 성령의 사역을 금기시 했고 오직 기독론 중심의 신학을 중요시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천년 역사동안 따돌림을 받았던 성령신학이 20세기에 들어와서 회복되기 시작되었지만 아직도 성령의 은사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대교회 실정이기에 누군가 방언을 한다면 그 방언 말하기를 금할 필요는 없겠지만(고전 14:39),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통역되지 않는다면(고전 14:5), 무엇보다도 성경의 말씀처럼 그 방언은 개인의 경건을 위해(고전 14:4), 사적으로 지혜롭게 사용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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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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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멋 든 사람들은 이 시대를 가리켜

“과학의 시대”니 “최첨단의 시대”니 하고 부른다.

사실 이 시대를 가리켜 “참을성이 없는 시대”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 주변에 널린 인스턴트식품들,

인스턴트 풍조가 이를 말해주지 않는가?

심지어 신자들도 조급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 여호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시 40:1),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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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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