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4.05.31 이단과 정통의 차이
  2. 2014.05.21 양과 목자
  3. 2014.05.17 교회란?
  4. 2014.05.14 아직도 말씀하십니다
  5. 2014.05.07 증거
  6. 2014.05.03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정통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단 문제에 대해 신약 성경에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라는 구절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케 할 거짓 선생들을 언급한 베드로후서 2장1절에 나타나지만, 사도 바울과 요한의 편지들 속에서는 외부로부터 박해 뿐 아니라 내부의 잘못된 교리를 물리치라는 권고가 나오는데(골 2:8-23, 요일 2:22, 4:1-3, 요일 7절), 성경에서 말하는 ‘이단’이란 웹스터 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원리에 대항하고 분리와 이견(異見)을 조성시키고자 하는 어떠한 의견”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기독교는 항상 거기에 대응하는 반대 세력들이 같이 하고 있었는데(마 13:24-30), 기독교의 진리에 대항하는 다른 의견을 갖게 되는 외부의 적보다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적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행 20:29-30).  수세기 지나는 동안 많은 이단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자 인간이라는 것을 부인해 왔는데,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실제로는 영이시며 육체를 가진 듯이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가현설’, 그리고 모든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며 지적으로 교화된 자들만이 신앙의 유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2세기의 ‘영지주의’를 비롯해서 현대의 ‘사신론’(死神論)에 이르기까지 정통 기독교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 대해 항상 도전을 받아 왔기 때문에 이단은 엄격한 교리 차원에서의 교회의 해악을 끼치는 “비정통적인 신앙”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감리교 신학자 John Miley는 『Systematic Theology』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의 중요성에 대해 “예수님은 인간의 본질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교리 안에 기독교 구원론의 모든 위대한 사실들: 대속, 믿음으로 의롭게 됨, 성령에 의한 거듭남, 새롭고 은혜가 넘치는 영적인 삶에 대한 확실하고 충분한 근거가 존재 한다”라고 말하며, 침례교 조직신학자 Millard J. Erickson은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 『Christian Theology』에서 “사람은 자신의 도덕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죄를 대응하거나 하나님 수준까지 자신을 끌어 올릴 수는 없다. 만약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제가 이루어지려면 어떤 다른 방식으로 연합해야만 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이해되었던 것으로서 신성과 인성이 한 사람 안에서 연합되었던 성육신에 의하여 성취되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인성과 신성이 결합되지 아니하여 참으로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말을 쉽게 요약하면 예수님의 신인(神人) 양성은 기독교의 중추적인 문제로서(요 1:1, 눅 2:21), 만일 그분의 신성이나 인성 중 어느 것이든지 부인한 것은(요일 4:1-6), 예수님의 참 인격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분을 구주이신 그리스도가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단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그 어느 이단/사이비와 종교들 중에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과(빌 2:5-8),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벧전 2:24),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것(엡 1:7), 그리고 그분이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음을 정복하시고 몸으로 부활하신 것과(행 4:10),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쓰여진(벧후 1:21), 권위 있는 말씀으로 믿는 집단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경에 벗어난 주장을 끝까지 고집하고 바른 교훈에서 벗어나(딤전 6:3-5), 망령되고 헛된 말을 하며(딤후 2:16-18), 논쟁하기를 좋아하고(딛 3:9), 예수님의 신성(요 1:18)과 인성(롬 9:5)을 부인하거나(요일 4:1-6), 돈(유 11절)과 호색에 놀아난다면(벧후 2:2), 분명 그들은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들의 가르침을 좇는(딤전 4:1-3), 이단/사이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확실한 것이 아닌 것들을 가지고 서로 간에 쓸데없이 개인적인 주장과 이념들 속에서 신자들의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부차적인 신학적 이슈들, 예를 들어 ‘은사들’, ‘예정’, ‘성령세례’, ‘견인’ 등에 관한 다른 의견에 대해 시간을 낭비한다면, 이것은 은혜의 참 복음과는 상반되기 때문에 유익을 끼치기보다는 무익하고 헛된 것입니다(딛 3:8-9).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지 않는 이상 확실히 드러난 이단들 외에 우리는 누가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께 맡겨야 할 것입니다(고전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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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양 다리를 걸칠 수는 없다.

우리는 그분께 속하든지 속하지 않든지 

두 길 중에 어느 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 친히 경고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이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이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 동기들을 

주님에 대한 개인적 관계로 살펴보게 하는

가장 심각하고 진지한 말씀이다.

 

나는 실제로 그분께 속해 있는가?

나는 내게 대한 그분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는가?

나는 그분의 권세에 순복하고 그분의 소유권을 인정하는가?

나는 이 관계에서 자유와 온전한 성취를 발견하고 있는가?

나는 그분의 감독 하에 있는 일로 인해 어떤 목적과 깊은 만족을 깨닫고 있는가?

나는 그분께 속함에 있어서 흥미진진한 모험을 분명히 깨닫는 것 이외에도

안식과 평안을 얻고 있는가?

 

그렇다면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찬미로 

자랑스럽게 다윗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고 선언할 수 있다.

 

필립 켈러『양과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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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논쟁거리/교회 2014. 5. 17. 11:57

이 땅에 있는 수많은 교회는 다양한 교파와 교단으로 나뉘어져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지만 이 많고 많은 교파와 교단으로 나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교회가 하나일 수밖에 없는 궁극적인 이유는 교회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주님의 몸 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엡 4:16).  따라서 교회란 단순한 사교 모임이나 어떤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히 소집된 모임이 아니고 또한 한 개인의 영예나 물질적 만족을 위해 구성된 모임도 아니기에 사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우선 교회의 바른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력을 상실한 소아시아의 사데 교회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계 3:1). Calvin은 교회를 모든 믿는 자의 어머니라고 표현하면서『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했습니다.  “이 어머니가 그의 태속에서 우리를 잉태하고 우리를 낳으시며 젖을 먹여 양육하고 우리가 이 육신을 벗고 천사처럼 될 때까지(마 22:30), 돌보시고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생명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일평생 교회에서 배우는 자로 지내는 동안 이 품에서 떠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죄의 용서와 구원이 불가능할 것이다. …교회를 떠나는 것은 언제든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

 

사실 개혁교회의 신조들을 통해 거듭 천명된 바가 있듯이 교회는 단순한 성도들의 공동체, 곧 예수님을 믿고 주안에서 성화 되어 가는 자들로 구성된 모임일 뿐 아니라 『스위스 일치신조』에서 고백한 것처럼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모인 신실한 자들의 모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하여 성령충만함을 받은 성도들이 지속적인 모임을 가짐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보지만(행 2:43-47), 실상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기 이전 구약시대에서 부터 이미 있어 왔습니다.  그 예를 찾아보면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에서 그가 독자들을 부르는 가장 일반적인 명칭은 ‘성도들’인데(고전 1:2, 엡 1:1, 빌 1:1, 골 1:1), 이 용어는 바울 자신의 유대적 배경에서 가져온 특정 도시나 지역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거룩한 백성’(출 19:6, 신 7:6), 즉,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택함을 받고 구속된 자들로 시내산에서 하나님 앞에 모인 백성을 가리킬 때 사용될 뿐 아니라(출 19:5-6), 종말에 대한 이상을 기록한 다니엘서 7장18절에서 사용되기도 했기에 바울이 새로 구성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데(갈 6:16), 사용된 모든 용어는 구약 성경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일반적인 명칭은 구약성경 70인역에서 교회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카할’(모으다, 소집하다/신 4:10, 왕상 8:1)의 파생어인 “이스라엘 회중”(출 16:3), 혹은 “백성들의 모임/집회”를 (시 26:5), 뜻하는 ‘에클레시아’ 헬라어 단어인데 이 용어는 신약성경에서 지교회와(행 5:11, 11:25-26, 고전 11:18, 14:19, 28, 35), 개인의 집에서 모인 가정교회(롬 16:23, 고전 16:19, 골 4:15, 몬 1:2), 또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보편적인 유형교회와(고전 10:32, 11:22, 12:28, 엡 4:11-16), 주님과 영적으로 연합된 무형교회를(엡 1:22, 3:10, 21, 5:23-25, 27, 30, 골 1:18, 24), 지칭하는 대표적인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구약성경의 용어인 ‘백성’을(출 19:6), 자주 사용한 것은 교회를 하나님의 옛 언약 백성과(출 15:5-6), 연속성을 가질 뿐 아니라 그 백성의 참된 계승자로 보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데(렘 31:31-34), 이런 연속성의 본질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공동체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히 8:5-8).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나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섬기게 하기 위해 백성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볼 때(출 12:31), 교회는 신약시대와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로 구성된 그분의 소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시 24:1, 135:4, 겔 18:4).

 

이렇게 신구약 시대를 비롯하여 오늘날까지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아 소집된 주님의 백성인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머리로(엡 1:22), 한 몸으로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은 성령을 공통적으로 풍성하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겔 36:26-28).  따라서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이 교회에서 연합되어(고전 12:13), 모두 하나님의 가족에 포함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하나 됨은(롬 12:5),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어뜨리고(엡 2:14), 그 둘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었으며(갈 3:28), 예수의 피로 ‘한 새사람’이 되었고(엡 2:15), 외국인이 아닌 ‘동일한 시민’이요(엡 2:19), 이스라엘 나라 밖에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는 것입니다(엡 2:19).  Richard Gaffin의 말을 인용하면 신약 성경은 성령이 개개인에게 역사하는 것을 다룰 때 더 광범위하게 교회론적 차원을 강조하고 나서 그 결과로 개인에 대한 성령의 역사를 다룬다고 주장한 것처럼 바울의 시각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개개인이 아니라 그분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백성으로 택하신 한 사람이 교회 공동체의 지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엡 4:16), 이렇게 모인 각 지체들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골 1:18), 성령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고전 1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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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여러 번,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동안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그의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이 당신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시고,

당신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정말 그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쓰고자 하실 때

당신에게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것을 계시할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그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당신과 나는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없이는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이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실 때 앉아서 그분에게 응답해야 합니다.

당신이 기도할 때 성령님이 어떻게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시켜 주시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분이 당신의 주위 환경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기도할 때 말씀하시고 성경을 읽을 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주위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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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연구자료 2014. 5. 7. 11:12

성경에서 ‘증거’(히/에드)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였다.  ① 증거는 ‘표’를 뜻하였다.  여호수아에서 나오는 것처럼 단을 쌓아 자신들이 하나님의 유업을 받았다는 표시를 나타낸 일이 있고(수 22:21-28), 돌무더기나(창 31:44), 모세의 노래(신 31:26), 욥의 병(욥 16:8), 여호수아가 세겜에 세운 돌(수 24:27), 등이 증거물이 된 일도 있다.  ② 증거는 ‘증인’을 뜻하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라반 사이의 증인이셨으며(창 31:50), 욥도 자신의 증인은 하늘에 계시다고 하였다(욥 16:19).  또한 사도 바울도 자신의 참되고 깨끗함을 하나님께서 증거 하신다고 주장하였다(롬 1:9, 고후 1:23).  ③ 증거는 ‘법적인 증인’을 뜻하기도 했다.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심과 고난,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인이었으며(눅 24:48, 행 1:8, 2:32, 3:15), 그리스도 자신께서도 진리에 대한 참된 증인이 되신다(계 1:5, 3:14).  이러한 경우 외에 다른 뜻으로 쓰인 증거(히/에두트, 에다, 트우다)라는 말은 십계명(출 25:16, 21), 언약궤(출 16:34), 하나님의 말씀(사 8:16, 20), 복음(계 9:12, 12:17), 등의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할 때에 사용되었다(시 1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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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형교회 목회자이며 영향력이 있다는 한 사람이 부활주일 설교 도중에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인지 혹은 성령의 인도하심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부활절 본문설교와는 조금 벗어난 누가복음13장에 나오는 ‘실로암 망대 사건’에 대해 짧은 메시지를 전할 때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적지 않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전 국민을 슬픔과 분노의 도가니로 빠뜨리는 대형사건이 진도 앞바다에서 터진 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인터넷 신문을 통해 그의 짧은 메시지를 접할 때 비록 적절한 시기는 아니지만 한국교회가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남아 있다고 희미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가 바른 말을 하거나 성경말씀을 희석하지 않고 그대로 전하면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탄과 비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목회자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설교가 SNS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기독교 언론에서 관심을 갖고 문제를 삼자 5일이 지난 후 교회 홈페이지를 통해 직접 부연설명을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문득 사무엘상 15장24절의 말씀이 생각이 났는데, 같은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으로서 쓸쓸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얼마나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에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라는 확신이 없었으면 목사가 설교를 전하고 나서 그것에 대한 부연설명과 해명설교를 일일이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비위를 맞추면서 전하는 설교를 좋아하는 이 타락한 시대에(딤후 4:3-4),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오늘날 현대 교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이 말을 우리가 듣기 쉽게 해석하면 “나는 여러분들에게 잘 보이거나 환심을 사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분께만 인정받기를 원하는 주의 종이지 사람들의 눈치와 여론을 두려워하며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더 확실하게 원색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 세상 사람들의 지탄과 비판의 목소리, 그리고 기독교 언론들에 어떠한 보도에 상관하지 않고 설사 교회에서 쫓겨나는 일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전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강심자의 목회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인데 만약 이런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 즉 과감 없이 성경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바울처럼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도 할 것이고(행 26:24), 본인 자신도 예수님께 미친 사람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고후 5:13).

 

아무튼 오늘날은 목회자가 교회에서 주는 어떤 혜택 때문인지는 몰라도 교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믿음이 없는 패역한 시대인 것만은 사실이지만(눅 18:8),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께서 목회자의 입을 당나귀처럼 사용하여 말씀을 전할 때(민 22:28), 그 메시지를 전하는 목회자가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그 설교에 대해 일일이 해명 설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민 22:38).  왜냐하면 신구약 성경 전체를 찾아보아도 선지자나 사도, 그리고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 중에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말씀을 증거하고 나서 사람들과 여론 때문에 부연설명을 하거나 해명설교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상 가치관과 전통에 매여 살 수 밖에 없는 죄악된 본성을 지닌 연약한 피조물이지만(롬 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한 것처럼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뜻을 하나도 빠짐없이 증거 해야 합니다(행 20:26-27).  비록 사람과 언론을 통해 무수한 비판의 돌을 맞거나(행 7:58, 14:19), 아니면 세례요한처럼 생명을 잃는다 할지라도(마 14:8-12), 성령이 그 시간에 주시는 말씀이라면(막 13:11), 그것이 사람들의 죄악을 지적하거나 회개를 외치는 메시지라도 반드시 선포되어야 합니다(마 3: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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