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4.04.27 정결한 마음과 깨끗한 생각
  2. 2014.04.24 타인에 의한 구원의 확신
  3. 2014.04.17 기도하는 것에 무관심한 교회
  4. 2014.04.03 영광의 문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있어 그분의 음성은 우리의 음성과 다를 뿐만 아니라 종종 하나님 자신도 우리가 거부할 수 있는 방법으로 혹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찾아오시는데 가령 우리가 확실한 성경본문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을 때 하나님은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실 때가 있고(민 12:6, 마 1:18-22, 2:13, 행 11:1-10, 욥 33:13-18), 우리가 완전한 이해를 원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부분적으로 예언하고 부분적으로만 알게 하십니다(고전 13:9).  그래서 사람들은 “왜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실까?”라고 말하면서 만일 그분이 분명하게 말씀하시면 우리가 순종할 덴데 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가 듣고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미 말씀하셨고 지금도 계속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셨는데(눅 6:27-35), 과연 이러한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 명령을 들으려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이렇게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더 자세하게 말씀하실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기도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단 9장, 딤후 3:16), 주로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 혹은 자신의 생각 속에서 나오는 음성이 아닌 내면세계에서 들리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데 이때 주님은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가 많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목적은 개개인을 지도하시거나 격려하기 위해서이고(고전 14:3), 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주관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자신의 마음 안에 숨겨진 욕구에 비추어 그 음성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데(고전 14:29, 요일 4:1),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대체로 객관적인 경우보다는 주관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우리 마음이나 생각에 들어 있는 이슈들을 통해 그분의 음성을 듣기 때문에 정결하고 깨끗한 마음과 생각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시 66:18).  왜냐하면 마음과 생각의 불결함, 또는 편견과(행 10:9-16), 잘못된 전통은(행 15:1-21), 우리가 듣는 하나님의 음성을 얼마든지 오염시키거나 거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발람의 이야기는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도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일에 속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민 22-24장).

 

이렇게 발람처럼 행동하지 않으려면 모든 개인적으로 듣는 음성을 성경에 비추어 분별해야 하며 주님께서는 성경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의 음식 법에 대한 베드로의 해석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았듯이(행 10장), 주님의 음성이 우리의 성경해석과 일치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분은 결코 성경에서 벗어나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예언, 꿈, 환상, 그리고 모든 종류의 초자연적인 경험은 반드시 성경에 비추어 시험해 보아야 하고(요일 4: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해야만 합니다(살전 5:21).  그러므로 성경말씀과 상충되거나 위배되는 것은 부정확한 것으로 판단해서 일을 행하지 말아야 하고 아무리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라 해도 뭔가 미심쩍은 사항이 들어 있다면 이를 신중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 영 안에 그분께로부터 왔다는 강한 확신과 더불어 마음과 생각 가운데 평강이 있게 마련인데(롬 8:6, 14), 만일 마음 한가운데 이러한 확신과 평강이 없다면 어떠한 음성을 들었던지 꿈을 꾸고 환상을 보며 초자연적인 놀라운 것을 경험했더라도 주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할 때까지(골 3:15),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시 105:4).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말씀을 범하도록 인도하시거나 유혹하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약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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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밖으로 표현한 감정이 참된 성도들의 마음에 들고

호응을 얻을 만큼 크게 감화력이 있고 기쁨을 준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신앙 감정의 본질이 어떠한지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개연적인 신앙의 모습을 발견할 때 그들을 예수 안에 있는 형제로서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사람들의 사랑을 얻고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주 아름답고 밝아 보일 때에는 제일 수준 높은 사람들도 속을 수 있다.  확실하게 신앙을 고백하여 탁월한 성도라고 인정받던 사람들이 신앙에서 떨어져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흔하게 일어난다.  이들은 많은 신앙 감정을 함께 경험할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사랑과 매우 비슷한 감정을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형제들에 대한 일종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고 죄에 대한 슬픔과 신앙과 영혼을 유익하는데 열정적으로 관심을 보일 수도 있으며 엄청나게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입으로 아주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하게 입증된 것은 이런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곳에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이 사단의 속임수와 사람의 사악하고 기만적인 심령과 섞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성령을 부으시는 때에 신앙을 고백하던 사람들을 봄에 핀 꽃들에 비유할 수 있다.  나무에는 수많은 꽃들이 피어 있고 그들은 모두 아름답고 탐스러운 과실을 맺을 것 같았다 잠시 있다가 시들어서 떨어져 나무 밑에서 썩을 꽃들도 대부분은 잠시 동안 다른 것들과 같이 아름답고 화려하게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향기로운 냄새를 낸다.  그래서 여름 태양으로 익은 열매가 될 꽃들과 말라서 비틀어질 꽃들을 눈으로는 구별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회심자들이 믿음을 이야기할 때 아름다워 보이고 매우 향기나 보일 수 있으며 성도들은 그들이 감동적으로 이야기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끝나버릴 수도 있다.

 

그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성이나 성경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닐뿐더러 반성경적이고 성경의 말씀들과 정반대가 된다.  성경은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그렇게 판단하라는 말은 단 한마디로 하지 않고 주로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열매들로 판단하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그 사람의 영적상태를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다른 사람들의 영적상태를 우리는 알 수 없다고 명백하게 가르치는 성경에 배치되는 것이다(계 2:17).  로마서 2장29절은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말씀한다.  마지막 구절에서 사람이 내면적 유대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때 사람의 무능력을 지적하고 결정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일임을 보여준다(고전 4:5).

 

참된 성도들에게는 누가 참되게 믿는 자들이고 누가 아닌지를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는 영이 없다.

성경은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불확실하며 속기 쉬운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한다(삼상 16:7, 사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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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기도실은 영적인 보일러와 같다.

사람들이 기도실을 찾지 않는다면

교회의 거룩한 열정은 식을 것이고

능력이 사라지면 영적 패배가 찾아온다.

하나님은 차가운 교회를 싫어하신다.

성령의 불로 뜨겁게 불타는 교회를 기뻐하신다.

미지근한 교회는 그 거룩한 입에서 토하여 내신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무엇을 결정할 때 기도하고 금식하며 결정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의견과 다수결 투표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 그 교회 교인들은 세상의 사업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열을 올리면서도 기도에는 무관심했을 것이다.

현재 우리의 교회들도 그들과 똑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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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남자들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아낌없이 자신을 바쳤다.

자신들이 아는 한 그들은 평범한 선교사였다.

로저는 앗슈아리족에게,

짐과 에드와 피트는 키추아족에게,

네이트는 비행기로 정글 전 지부를 섬기는 일에

보냄을 받은 보통 선교사였다.

 

그러나 작은 일들이 일어난다.

네이트가 와오라니 부족이 살고 있는 집 몇 채를 발견했다.

작은 결정이 내려지고 그것은 더 큰 결정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와오라니 부족에 들어가는 문제를 놓고

새로이 간절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결국 한 남자의 개인적 선택은 중대한 고비에 이른다.

사랑하는 처자식을 둔 평범한 보통 선교사들이

생사가 달린 결단에 직면했다.

그들은 명성은 고사하고 

무슨 큰일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와오라니 부족의 영적 필요가 

단순히 절대명령이 됐던 것이다.

 

하나님을 방패와 방벽으로 믿었던 그들이

왜 창에 찔려 죽도록 방치돼야 했을까?

우리 미망인들에게 그것은 매끄럽게

또는 최종적으로 답해질 수 없는 문제였다.

1956년도에도 그랬고 지금도 잠잠해 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도 답하지 않으셨다.

욥은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라는 신비 속에서 살고 있었고

그 깊은 신비에서 생겨난 질문들에 주어진 답은 더 깊은 신비,

곧 하나님 자신의 신비일 뿐이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영광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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