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주의자들이나 은사주의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 있다면 그들이 복음을 위한 싸움이 영적전쟁이라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직시하는 것이 다른 복음주의자들보다 일찍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병 고침과 귀신을 쫓는 일, 성령의 표적과 기사, 그리고 열정적인 예배와 영적싸움으로써의 기도 등을 지극히 정상적인 기독교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 전파에는 왕도가 없기 때문에 각 교회나 각 개인에게 필요한 효과적인 것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아르헨티나 침례교 목사인 알베르토가 말했듯이 “전도란 곧 치열한 영적전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특히 전통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전도가 무슨 치열한 영적전쟁이야! 옆집 아줌마 그냥 예수 초청 잔치에 데리고 오면 되지”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십 팔년 동안 귀신들려 고통을 당한 여자처럼(눅 13:10-16), 사단에게 일생 동안 잡혀 있는 영혼들을(히 2:15),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일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기도, 즉 원수들을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기도 없이는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사단은 피조물에 불과하며 궁극적으로 불 못에 던져 심판받을 존재이지만(계 20:10), 그렇다고 해서 과소평가 하지 말아야 하는데 성경은 사단을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엡 2:2), ‘이 세상 임금’으로(요 12:31), 표현하고 있고, 사도 요한도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요일 5:19), 사단은 실제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로 지금도 강력한 능력을 행사한다고 볼 때(살후 2:9),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세상과 우리의 영혼까지 장악하고 있었는데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 강력한 사단의 진을 파하셨고(요일 3:8), 십자가 위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골 2:15).  사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부터 시작된 그분의 공생애는 처음부터 전략적 수준의 영적싸움이었고(마 4:1), 최고 수준의 능력으로 사단을 대적하신 예수님은 사탄과 이 세상을 향하여 영적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요 16:11).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삼위일체 중 제2위의 하나님이시지만(마 3:16-17), 사단과의 능력대결은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이(요 1:1), 싸우신 것이 아니라 인간되신 그분이(빌 2:7-8), 마귀를 이기셨다는 것입니다(마 4:1-11).  Colin Brown 박사는 이것을 가리켜 『That You May Believe: Miracles and Faith Then and Now』에서 "성령 기독론"이라고 말하는데 쉽게 말하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 하셨다는 것입니다(마 12:28, 행 10:38).

 

그러나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과연 우리도 예수님처럼 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분명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다”라고 말씀하셨듯이(눅 10:19),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행할 수 있는 신학적, 영적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요 14:12).  물론 이것은 이론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주님처럼 행할 수 있는가 또 행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까지가 가능한가는 또 다른 별개의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사단아 내가 너를 묶노라”고 명령할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기도한 대로 사단이 묶임을 당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사단의 최후는 무저갱 속으로서의 심판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천사를 시켜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계 20:1-2).  그러므로 “사단아 내가 너를 묶노라”고 명령할 때에 그 적용에는 한계가 있는데 그것은 사단과 직접 대결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낮은 수준의 악한 영들, 곧 귀신들과 대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엡 6:12).  간략하게 말하면 일반적으로 더러운 귀신들을(막 3;11), 내어 쫓는 수준의 싸움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행 16:18),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으나(막 16:17), 공중권세를 잡은 사단과의(엡 2;2), 직접적인 대면에는 신중하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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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던 대형 교회 목회자들 중에 돈 문제로 혹은 이성 문제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켜 지탄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들이 처음에는 사역을 잘했는지는 모르지만 사역 중간이나 말기에 가서 온갖 부끄럽고 추잡한 일을 통해 그들이 여태까지 하나님 앞에 충성 봉사했던 것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비난 받는 것을 볼 때 쓸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강심장의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모두 그들과 똑같은 죄성을 가진 사람들이고, 만약 그들처럼 그러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동일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교회 신자들이 바라보는 목회자상은 인격적으로 완벽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지도자의 모습이지만 문제는 목회자들도 범죄 하기 쉬운 한 인간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만하고 영적으로 무지한 목회자가 아니라면 스스로가 성도들이 바라는 만큼의 성숙한 인격체가 되지 못하고 있음을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알고 있으며, 특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곁에 있는 목회자의 아내만큼은 이 사실을 너무나도 훤히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은 목회자의 겉모습, 즉 깨끗하고 말끔한 차림의 양복에 늘 온화하게 웃는 얼굴, 그리고 확신에 찬 모습과 고상하고 차분한 목소리,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사모에게 대하는 예의 바른 행동, 이것이 외식적인 행동인지 아닌지는 하나님이 아시겠지만 더 나아가 교회에서 매우 헌신되게 일하는 모습을 볼 때 교인들 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러한 것들은 표면적인 모습일 뿐 목회자들에게도 말 못할 고민과 문제가 산적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말에 반론을 제기할 신령하고 거룩한 목회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이야기 한다면 모든 목회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거룩하고 신령한 척 행동을 하는 것이지 단 한사람도 신령한 사람은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 어떤 목회자들 중에는 자신이 기도를 많이 한 성령충만한 목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천식 걸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 역시 내적인 갈등과 고민 없이 영육간에 강건하게 목회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목회자는 가정, 자녀, 질병, 물질, 사역, 교인, 등등 여러 가지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목회자 자기 자신만의 내면세계인데 이것을 볼 때 모든 목회자는 상처 입은 사역자들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과 문제를 가지고 있는 목회자가 만약 어떤 도움을 얻기 위해 교인들에게 찾아간다면 목회자의 허점이 새어나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고, 또한 같은 목회자끼리 교제는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속 시원히 대화할 수 없는 서로간의 어떤 라이벌 의식이 있는 것처럼 불신 상태가 심하고 그렇다고 해서 전문적인 상담소를 찾아가는 것도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목회자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고 이것을 놓칠 리가 없는 사단은 목회자가 얼마나 힘들어 하고 있으며 쉽게 공격 받을 수 있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위선과 죄책감, 그리고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 등으로 갈등을 겪게 만들어 자포자기의 심정을 갖도록 유혹하는데, 이러한 것들을 통해 지나치게 단순 논리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역자들은 마귀의 공격을 가장 받기 쉬운 존재가 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단은 모든 교파와 교단과 상관없이 물질과 성적 타락으로 목회자들을 공격하고 있는데, 최근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원하지 않는 일들이 세상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단에게 만약 선택이 가능하다면 그는 평신도들보다 목회자들을 먼저 무너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돈과 권력과 섹스는 사단에게 있어 목회자를 옭아매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누군가가 이러한 문제에 걸려 넘어졌다면 그들의 배후에 귀신의 역사가 있음을 알아야 하고, 사단이 목회자에게 초점을 맞추어 공격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목회자에게 더욱 구체적으로 집요하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공격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에서 전면에 나서고 있는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매우 큰 위험 부담을 지니고 있는데, 만약 목회자가 돈이나 이성 문제로 실족한다면 교회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만들어 그 파급 효과는 엄청나게 커서 그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상처와 실망을 가지고 방황하거나 심지어 교회를 영영 떠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목회자의 사명이 얼마나 크고 절박한지에 대해 목사 자신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알아야 하고 특별히 모든 신자들에게 중보 기도가 필요하겠지만 목회자만큼 중보기도가 더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목회자가 타락할 때 성도들은 비판적인 눈을 가지고 비난만 하지 말고 교회를 섬기는 같은 지체로서 그 상처 입은 목회자를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중보기도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철저하게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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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에 이르는 땅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신 사실로부터(창 15:18), 가나안은 이미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고쳐주면서 이 언약은 보다 확실하게 되었다(창 17:1-9).  그리고 모세와 맺어지면서 그 내용이 더욱 심화되고 구체화되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킬 경우에 받을 축복과 그 언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받게 되는 저주가 나란히 등장하게 된다(수 1:5-9, 신 28-30장).  이러한 언약의 측면에서 볼 때 가나안은 이미 주어진 것이었으며(수 1:3),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은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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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C. Sproul삼위일체는 신비다. 하나님이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요 격위에 있어서는 셋이라는 말을 기독교 교리의 많은 신비들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신비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항목을 들라고 하면 바로삼위일체론’이라고 말할 것이고, 이 교리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구분하는 독특한 교리이기도 합니다.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도신경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습관적으로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성령으로 잉태하사…”라고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기도 하고, 예배 끝에 축도문 속에서 삼위의 공식을 듣기도 하지만(고후 13:13), 막상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하거나 이를 반박하는 사람들 앞에서 변증하라고 하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신자들이 대부분 일 것입니다.  물론 이 말 자체는 성서용어가 아닐뿐더러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셋이 하나가 되거나 하나가 셋이 되는 방식을 설명하는 구절들은 없지만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단어는 Wayne Grudem이 말한 것처럼 “셋의 연합” 혹은 “하나 안의 셋”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은 세 분이면서도 동시에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교리를 가리키는데 사용하는데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에 관해 사색에 빠지지 않고서도 삼위일체적으로 말하는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1:26), 그리고 아담이 범죄하고 난 후와( 3:22), 바벨탑을 쌓을 때( 11:7), 사용된 ‘우리’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홀로 계시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데, 여기서 ‘우리’라는( 3:22), 복수를 사용한 일에 대해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하지만 교부들과 초기 신학자들은 거의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킨다는데 동의합니다.  다시 말해 본체상 한 분이시나( 6:4, 딤전 1:17), 존재 양식상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28:19), “인간 창조”라는 대주제를 놓고 삼위 상호간에 공동 상의 하신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이 구절들에 대해 몇 분이었는가는 언급되어 있지 않아 이 교리에 접근하기에는 불충분하지만 한 분 이상이 관여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고, ‘우리’라고 하는 복수형은 구약시대에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신 것 외에( 6:8), 하나님 안에 하나 이상의 인격이 있음을 나타낸 표현들, 즉 한 위를 ‘하나님’ 혹은 ‘주’라고 부르면서 역시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다른 위와 구분한 구절들이( 110:1, 45:6-7, 48:16, 61:1, 63:7-11, 1:7, 3:1-2), 신약에 비해서는 희미하지만 구약에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것 외에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과 동격으로 사용된 ‘여호와의 천사’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성자 하나님이 인성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시기 전에 ‘여호와의 사자’로 나타나신 것을 말해주는데, 예를 들면 창세기 16장에 보면 하갈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원문에는 ‘사자’라고 기록되었고 13절에서는 그 사자를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여호와의 사자는 곧 하나님이신데 그 사자는 성자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2:11-15, 18:1-19, 3:2-6, 22:35-38, 5:13-15, 2:1-2, 6:11-14, 3:24-25, 3:1).  물론 구약 다른 곳에서는 ‘여호와의 천사’가 단순히 창조된 천사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19:1, 20:16, 왕상 13:18, 12:4, 2:3), 적어도 위에 열거된 구절에서 주의 특별한 천사(사자)는 완전히 신이신 독립된 인격체를 가리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처럼 인격화된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에 대한 묘사와( 3:19, 8:1-31, 33:4-6, 107:20, 119:89), 성령의 인격성에 대한 묘사들이 나오는데( 6:3, 9:20, 51:11, 139:7, 40:13), 이렇게 구약 성경에는 추리적인 해석을 하지 않아도 삼위일체론을 뒷받침 해주는 성경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약하면 구약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동시에 복수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신약성경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계시의 점진성(漸進性)으로 인해 신약은 구약성경에 비해 훨씬 충분하게 삼위일체 교리를 증거하고 있는데, 먼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으시고( 2:6-8), 많은 사람들이 모인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부는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1:11), 성자는 물세례를 받으시고( 3:21), 성령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예수님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해( 10:38),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사건을 통해( 3:16-17), 우리는 삼위 하나님을 동시에 볼 수 있고, 전승에 의하면 아리우스가 삼위일체론을 부인할 때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여! 요단강에 가라 그리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잘 알려진 마태복음 2819절에 나타난 세례 분부의 표현 방식으로 여기서 우리에게 친숙한 제도인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명칭은 성부와 성자가 독립적인 인격체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성령도 다른 두 위와 똑같은 차원에서 똑같이 표현되었기에 성령 또한 한 위로서 성부와 성자와 동등된 위치에 있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마지막 축복에서도 하나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고후 13:13).

 

만약 신약의 저자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주’는 성자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했음을 인식한다면 고린도전서 124-6절에도 삼위일체를 분명하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고, 에베소서 44-6절과 베드로전서 12, 그리고 유다서 20-21절에서는 세 인격체가 따로 언급되어 있으며, 특히 에베소서 l장에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구원 역사를 성취하시기 위해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시고(3-5), 성자 하나님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7), 성령 하나님이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에게 인 치시는 것을(13-14),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Benjamin B. Warfield는 『Biblical Doctrines』에서 “우리가 삼위일체 교리를 신약성경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그것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환상이 아니고 전체의 증거이며 또한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의 인격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말했는데, 사실 “셋인 동시에 하나” 즉 하나님은 한분이시며 동시에 세 신격이 존재한다는 교리는 불신자들과 이단들에게는 하나의 모순으로 매도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삼위로 함께 존재하시며 함께 활동하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비록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지만 절대적인 진리로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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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감정이 생긴 사람들 스스로 자신들의 체험이 신령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영적으로 건전한 상태에 있다고 크게 확신한다는 사실은

그 감정이 바른 것인지 또는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표지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성도들 또는 성경에서 특별하게 취급되는 성도들에게 확신이 있었다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가장 명백하고 확실한 방식으로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니엘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특별한 은혜를 계시하신다고 증거 하셨다.  욥은 자신의 신실함과 정직함을 최고로 확신하고 그것을 자신 있게 말했으며(욥 19:25-27), 다윗은 시편 전체에 걸쳐 주저 없이 가장 확실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그분을 자신의 분깃, 유업, 반석, 방패, 구원이며 높은 망대와 같으신 분으로 묘사한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진실과 진심으로 행하였음을 하나님께서 아시지 않느냐고 호소한다(왕하 20:3).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서신에서 주님이시자 왕이시며 구속주이신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라는 것을 언제나 확실하게 말하고 자신이 장차 받을 보상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자신 있게 말한다(갈 2:20, 빌 1:21, 딤후 1:12, 딤후 4:7-8).

 

그리고 그리스도가 신자 안에 계신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신자에게 너무 어울리지 않는 일이며 그들이 비난 받을 이유가 된다고 성경을 말씀한다(고후 13:5).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준비하신 상급을 확신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크게 책망 받아야 할 만큼 나태하다는 증거라고 성경은 암시한다.  왜냐하면 사도는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라고(고전 9:26),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신앙의 구원이 주는 은혜가 유익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분명히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어떤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알게 되는지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2:12, 요일 2:3, 5, 3:14, 19, 24, 4:13, 5:2, 19).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지 않고 그들이 가진 감정이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것 같다는 이유로 그 사람들이 위선자이며 그들의 감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에게 있는 감정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영적으로 좋은 상태에 있으며 자신들의 감정은 신령한 것이라고 넘치게 확신한다는 사실은 그 사람들이 성도이며 그들의 감정은 은혜로운 것이라고 판단내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들이 보여준 태도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성도라는 사실 그것도 가장 탁월한 성도라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갔으며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서 그들의 눈을 높이 올려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다른 사람들을 구별해 주신 것을 감사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소경이며 은총을 입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암시했을 때 그런 암시를 경멸했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요 9:40).  만일 그들이 세리의 심령과 비슷하게 확신했다면 그들은 자신에 대한 확신을 버리고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소망하는 사람이 확신하는 것과 더 닮았을 것이다.

 

자기의 업적과 대단한 체험,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체험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며

신앙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엄청난 부도덕함보다 하나님의 눈에 더 혐오스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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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렘 31:33), 행복과 미래를 보장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특권과 권리만을 자랑하고 주장하며(마 3:9, 요 8:33), 하나님의 자녀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언약적 의무 조항들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았습니다(렘 22:9).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언약 백성으로서 자격 기준이 있는지를 알려 주고자 건물의 견실성을 측정하는 도구인 다림줄을 아모스에게 보여주시는데 이 환상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말씀의 잣대인 다림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 있으면 전부 부수어 버린다는 무서운 심판을 보여줍니다(암 7:7-9).  여기서 나오는 다림줄이 오늘날에 석공들이 담을 곧게 수직으로 쌓아 올리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인 것처럼 기독교와 다른 신앙, 즉 이단/사이비의 차이점을 정확하게 재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는데 그 많은 성경 구절 가운데 바른 기독교 핵심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을 찾으라면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것과(고전 15:3-4),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요일 4:2).

 

사실 성령의 가장 위대한 사역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 하는 것이고(요 15:26), 그분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요 16:13-14), 예수님의 인격이 곧 진리와 거짓을 구분 짓는 시금석이 되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진리와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고전 12:3), 사도 요한 역시 동일한 주장을 강조하면서 특별히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추었던 이유는 그 당시 그것이 영지주의 이단의 대표적인 교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요일 4:1-6).  그러나 이단/사이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속하셨다는 사실, 즉 그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벧후 1:17), 육체를 입고 오신 인간이시고(요일 4:3), 자기 백성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여(요 2:22), 하늘에 올라가셨다가(행 1:11), 다시 오실 것을 철저히 부정하는데(마 26:64), 이들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즉 그분이 완전한 하나님이자(요 1:1),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눅 2:21), 부인하는 것을 보면 멸망의 길을 서슴없이 선택하는 자들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갈 1:8, 벧후 2:3. 3:16).  따라서 이단들이 기독교를 표방하면서도 정작 성경 말씀에 있는 하나님 계시의 진실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사도 요한의 말처럼 그들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요일 4:6).

 

예를 들어 “여호와 증인”들은 골로새서 1장15절의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말씀을 가지고 자신들의 책 『You Can Live Forever in Paradise on Earth』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첫 번째 피조물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적 자녀보다 먼저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이 직접 지으신 유일한 자다”라고 주장하면서 이들은 『아다나시우스 신조』에서 말한 것처럼 “아버지도 하나님이시고 아들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분의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한 분 하나님이 계신다”라는(신 6:4), 성부와(시 90:2), 성자의(요 1:2), 동일한 본질에 대해 철저히 부정합니다.  또한 일부다처주의를 옹호하는 “몰몬교” 역시 한 선지자(조셉 스미스 2세)가 새로운 성서 『몰몬경』을 썼다고 주장하는데 이들은 이것 외에 『교리와 성약』, 『값비싼 진주』와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을 포함해서 이 네 권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권위가 있고 영감을 일으키는 “교회의 표준적인 경전”이라고 주장하지만(몰몬교 신조 8장), 정통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성경 외에 그 어떤 것도 포함시킬 수가 없고(계 22:18-19), 오직 신구약 성경 66권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들의 이단적 주장을 단호히 배격합니다(요일 1:10-11).  그 외 '통일교', '뉴에이지', '유일신교', '크리스천 사이언스' 등등 수없이 많은 외국산 이단들이 오늘날 기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단들 못지않게 한국에도 수많은 이단/사이비들이 기생충같이 퍼져 나가는데 대표적인 것들만 찾아본다면 먼저 애천교회의 창시자이며 통일교 신도였던 정명석(JMS)은 통일교 원리강론을 표절하여 『30개론』이란 유사교리를 만들어 그것이 진리라고 말하지만 바른 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그가 말하는 것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지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가족 관계를 대입시켜 아버지가 성부, 어머니가 성신, 아들이 성자로서 성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적 수수관계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그 자신도 색욕을 일삼아 여성문제가 복잡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더 황당한 집단은 '한농북구회'의 박명호로 그는 월간지 『새벽이슬』에서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이천년 전 예수를 낳았다고 주장할 정도로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인데 해괴망측한 것은 '창기십자가' 라는 교리를 만들어서 자신이 색욕의 함정에 대신 들어가 창녀를 취하고 죄인이 됨으로 인류를 구원한다는 이단적 사상을 가르치며 『십계천국』4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술집 창녀를 끼고 술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믿으라… 그러면 하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의롭다고 하실 것이다”라고 주장하는데 불행한 것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진짜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신천지', '영생교', '구원파', '베뢰아 귀신론', '하나님의 교회'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한국산 이단들이 기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많은 이단들에게 있어 그 핵심적인 문제는 '인간을 신격화' 하는 것인데, 이들은 교주를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적인 존재로 믿으면서 교주가 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믿고 또한 그것을 통해 구원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특히 이들은 지구 종말을 강조하면서 얼마 남지 않는 날을 준비하기 위해 다미선교회의 이장림처럼 광신적인 종교적 의식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단/사이비들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현실에 비추어 이런 이단들이 날뛰고 있는 상황에서 바른 신앙과 신학이 절실히 필요하고 위에 열거한 이단들처럼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확실히 부정하거나 반윤리적인 행위를 일삼는다면 분명 그들을 이단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이 아닌 정통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 즉 눈에 거슬리게 보이는 어떤 사역을 통해 이것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선언하기 전에 “그것이 정말로 성경의 가르침을 어기는 것인가?”라는 것에 대해 독단적인 주장이 아닌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결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D.A 카슨의 말을 인용한다면 어떠한 현상을 분별하거나 본문의 뜻을 해석할 때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집어넣어서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신학과 신앙만이 가장 성경적인 것처럼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신실한 다른 형제의 신앙을 이단시하거나 비성경적인 인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롬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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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시간을 내어

당신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당신이 사도들의 모범을 따르고 있는지

아닌지를 살펴보라는 말이다.

당신이 그들의 모범을 따르지 않는다면

“죽은 시체가 아기를 낳을 수 없듯이

때때로 우리는 새 그리스도인을 낳지 못하는

사역에 매달리는 죄를 범한다”라는

Hamish Mackenzie의 말이

당신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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