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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4.02.22 거룩한 백성의 공동체
  3. 2014.02.19 순전한 기독교
  4. 2014.02.12 문제는 관계입니다
  5. 2014.02.08 주님의 음성을 잘 듣는 방법
  6. 2014.02.05 결혼 지참금
  7. 2014.02.01 마귀를 대적하려면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자세히 살펴보면 세 가지 유형의 교회로 나타나는데 칭찬만 받은 교회가 있는 반면에 책망만 받은 교회가 있고 또한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받은 교회가 있습니다.  먼저 전통적인 틀에 매여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가고 있는 에베소 교회와 발람의 거짓 교훈을 받아들여 세속주의로 물들어 버린 버가모 교회 그리고 많은 일들을 했지만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들어와서 교회 전체가 음행에 빠져 버린 두아디라 교회, 이미 죽어서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데 교회는 예수님께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받은 교회들입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은 없고 칭찬만 받은 교회로 핍박을 받아가면서 적은 능력을 가지고 승리한 교회들입니다.  오늘 보게 될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은 없고 책망만 무섭게 받은 여러 가지 중병에 걸린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아무런 형식이 없이 그냥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분명하고 일정한 패턴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계시록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합니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공통점 중에 하나는 항상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님에 대한 모습은 각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와 상황들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셨는데 그것은 주님이 나타나신 모습을 통해 그 교회의 신앙상태를 한눈에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은 교회에서 무슨 일과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를 훤히 알고 계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시는데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본문에 보면 두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계 3:14).

 

하나는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오직 예수님만이 진실하시고 참된 증거자라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거짓된 진리와 거짓된 증인들이 많이 있지만 참된 진리를 증거 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요 14:6).  주님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는 한 번도 참된 진리인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하지 않은 교회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른 하나는 그분을 ‘창조의 근본’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창조의 근본’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창조자 하나님이 되시며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골 1:15-18).  이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님의 진정한 다스림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이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기는 하는데 왜 존재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참된 진리와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가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라오디게아 지역에 분명히 교회가 존재하고 있기는 한데 이 교회는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의 다스림을 받아 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사실 많은 예배를 드리고 여러 행사와 활동들이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 많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교회 안에 함께 하시도록 초청되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성경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기록한 이유는 오늘날도 그러한 교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로 라오디게아 교회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세상 것들이 주님의 눈에는 가증스럽고 추한 것들 밖에 없어 입에서 토하여 내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답답한 사람이 있다면 자기 자신이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인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문제가 무엇이며 어떤 점을 고쳤으면 좋겠다는 것을 다 알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경우인데 본문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그러한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어려운 환난이나 심한 핍박을 받은 적이 없고 그렇다고 거짓 선생을 통해 잘못된 이단적인 가르침이나 이세벨 같은 음란한 여자와 놀아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이십니까?  비위가 상하신다고 심한 거부감을 표현하고 계십니다.  이런 표현이 본문에 적절한 것인지 모르지만 주님이 음식을 잘못 드신 것도 아닌데 이 교회를 바라볼 때 토하고 싶을 정도로 구역질이 났습니다(계 3:16).

 

◈ 본문에 중요한 단어들이 나오는데 ‘차다’는 말과 ‘덥다’라는 말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을 대할 때 아무렇게나 해석하고 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영혼을 천국으로 이끌 수도 있고 아니면 지옥으로 보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벧후 3:16).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을 정도의 당시 최고의 선생들이지만(마 23:2), 교인 하나만 생기면 배나 지옥자식으로 만들어 수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낸 사람들입니다(마 23:13-15).  본문을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믿으려면 확실히 믿고 믿지 않으려면 아예 그만두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믿지 않으려면 그만두라는 말이 없습니다.  주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기 여기시는 분이기에 지금도 기회를 주시고 타락한 영혼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벧후 3:9).

 

여기서 라오디게아 교회가 위치한 지리적인 조건을 이해하면 쉽게 ‘차다’와 ‘덥다’가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있는데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북쪽으로 6마일 떨어진 곳에 ‘히에라볼리스’라는 뜨거운 온천이 있어 많은 피부병 환자들이 그곳에 와서 온천욕을 즐겼습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동쪽으로 15마일 떨어진 곳에 8000피트가 넘는 높은 산이 있는데 그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오염되지 않은 물로서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물을 마심으로 기갈을 해소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히에라볼리스에서 내려오는 뜨거운 물은 온천하기에 좋은 물이었고 또 반대로 동편에서 내려오는 물은 아주 차가워서 골로새 사람들의 더위와 갈증을 시원하게 해주는 그런 물이었는데 라오디게아는 두 극단 중간에 위치하여 미지근한 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문에 ‘차다’라는 말은 높은 산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물처럼 전혀 감각이 없는 냉냉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전적으로 거부하고 공개적으로 배척하는 불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덥다’라는 말은 온천물이 펄펄 끊듯이 뜨겁게 불이 붙은 상태로 복음에 대해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상태는 어떠합니까?  이들은 뜨겁게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복음을 거부하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서 ‘미지근하다’라는 말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로(왕상 18:21),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즉 진리의 말씀을 듣더라도 복음에 대해서 관심을 두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열정도 적대감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 ‘차다’와 ‘덥다’라는 말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보이는 반응을 두고 말씀하신 것인데 사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분명히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눈에는 은혜의 눈물이 흐르고 얼굴에 기쁨이 넘쳐나고 입으로는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반면 복음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예수라는 말만 들어도 벌써 얼굴이 굳어지고 입에 거품을 물고 눈에는 쌍심지를 켜고 온갖 더러운 욕설을 하고 그분에 대해 듣기를 싫어합니다(행 13:45).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둘 중에 하나는 분명하게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러한 반응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말씀에 대해서 전혀 관심과 반응이 없었고 말씀을 듣기 전이나 듣고 난 후에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미지근하게 반응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미지근하게 반응하게 만드는 무엇인가 있었는데 그것은 라오디게아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 주는 맛으로 이 세상에서 잘사는 생활들과 화려한 것과 세상풍속들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에 한번 맛을 들거나 마음을 빼앗겨 놓으면 복음에 대해서 미지근한 반응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실은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서는 너무나 민감한 반응을 보였는데 이들은 유행과 변화에 민감하고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부다 알고 있지만 정작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 생활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입술로는 신자인데 행동으로는 불신자라는 것입니다(딛 1:16).

 

주님은 이렇게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무슨 말을 하십니까?  본문에 보면 점잖게 말씀하시는 것 같지는 않으시고 너무나 비위가 상하고 역겨워서 입에 토하여 내치겠다고 말씀하십니다(계 3:16).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토하여 내치다’라는 말인데 이 말은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번 사용하셨던 말씀으로(레 18:25, 28, 20:22),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의 풍속을 쫓아가고 문란하게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면 강력하게 거부하고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레 20:17-23, 엡 6:9-10, 계 22:15).  그러므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토하여 내치다’라는 말은 무섭게 심판을 하시겠다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할 것을 말해줍니다.  쉽게 말하면 구원에서 제외시켜 버리시겠다는 경고성의 말씀입니다(출 32:33).

 

◈ 본문에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계 3:17).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물질적으로 부자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교회는 부자들이 많아 교회에 헌금을 많이 했는데 그 지역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다 모인 교회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의 직업과 학력, 그리고 경력은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에 걸맞게 은행업과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개인 사업으로 직물업을 하는 사람들과 안과 대학교로 유명한 곳이기 때문에 학력이 높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았습니다.  이 교회는 돈 없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자들만 모인 교회라 주후 60년에 큰 지진이 그 지역에 발생했을 때 그들은 로마 정부에서 도와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돈이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적으로 교만한 것인데 이 교회는 자기만족에 도취되어서 자신들은 영적으로 부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어떠한 사람들보다도 은혜를 가장 많은 것처럼 행동을 하고 성경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성경에서 배울 것은 다 배웠다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은 이미 신앙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로 얼마나 많이 배우고 성경적인 지식이 많은지 성경책을 손에서 놓고 더 이상 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가 멋도 모르고 복음에 대해 아느냐고 물어보면 예전에 이미 그런 과정을 다 마쳐서 자신들은 복음에 대해서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고 입술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을 기억해야 하는데 진리의 말씀을 꾸준히 배우지 않는 사람들 모두는 교만하다는 것입니다(딤후 3:14-17, 딤전 6:3-5).

 

더 중요한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를 직접 들어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본인들은 부자이고 영적으로 부요하다고 스스로 자랑하지만 주님의 생각은 그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계 3:17).  “시장철학”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건물을 자랑하고 예산, 숫자, 실적과 같은 외부적인 업적을 자랑하고 내세우는 것을 말하는데 이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번듯한 자체 교회 건물이 있고 재정도 든든하고 교인들도 많아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서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도 교회인가 할 정도로 골병이 제대로 든 교회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불행한 교회를 하나 뽑으라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로 이처럼 영적으로 빈곤하고 비참한 교회가 있을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 그렇다면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본문에는 그 처방약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가지는 것입니다(계 3:18).  이것은 세상적인 부나 금을 모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불로 연단한 금’이라는 말은 어려운 고난을 통과한 연단된 믿음을 말하는데(벧전 1:7), 고난을 통과하지 않는 믿음은 모두 가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의 믿음이든지 그 사람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 되려면 반드시 고난을 통해서 그 순수성을 증명해야 합니다.  만약에 믿음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이 없다면 마지막 심판 날에 불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고전 3:13).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고난을 통과한 진짜 믿음이 아닌 “짝뚱” 믿음을 가지고 종교생활을 여태까지 해왔기 때문에 주님은 진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흰 옷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처음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으로 의의 세마포 옷을 입혀주시는 것입니다(계 19:8).  다른 하나는 흰 옷을 한 번만 입는 옷이 아니라 계속 입고 사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원래 흰 옷은 하나입니다.  주님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며(벧전 2:15), 양심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매순간 그분의 도우심을 바랍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흰 옷을 사서 입어본 적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 많은 돈 어디다 쓰는지 모르겠지만 흰 옷을 사서 입을 돈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흰 옷을 사서 입고 제발 “알몸”으로 다니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서 보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약국에서 안약을 사서 보이지 않는 눈을 보게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서 눈은 육신의 눈이 아닌 영적인 분별력을 말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주변에는 유명한 안과대학교가 있어 육신의 눈을 고쳤을지 모르지만 영적인 눈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사실 육신의 소경보다 더 불행한 것은 바로 영적인 소경인데(요 9:39-41),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은 눈은 떴지만 앞을 못 보는 소경들만 잔뜩 모인 교회였습니다.  본문에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하라’는 말은 영적인 눈을 뜨려면 진리의 성령에 대해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엡 1:17).  왜냐하면 이 교회는 성령에 대해서 전혀 무지했고 에베소 교회처럼 성령이 있음을 듣지 못한 교인들로 가득 찬 교회였습니다(행 19:2-3).  그래서 돈을 아끼지 말고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고전 2:10).

 

이렇게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으로 보면 중병에 걸려도 단단히 걸린 교회로 겉은 화려하지만 속을 썩을 때로 썩은 교회였습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교회가 저절로 썩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가 중병에 걸렸을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병들게 만든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교회는 사람들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교회로 이들이 교회에 오는 이유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살면서 지친 심신을 쉬기 위해 왔습니다.  사실 일주일 내내 먹고 산다고 심신이 지쳤는데 설교까지 골치 아프고 신경을 쓰게 만든다면 누가 교회에 오겠습니까?  그래서 설교는 가능한 부담이 없어야 했습니다.  마치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아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들어야 할 것이 하나도 없고 죄에 대한 책망이나 지적을 듣는 것은 꿈같은 얘기였습니다.

 

◈ 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이한 것은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거듭난 사람들은 별로 없고 자기 죄에 대해서 애통하며(마 5:4), 회개한 사람들이 거의 전무후무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들끼리 모여서 세운 교회라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은 그 곳에 없었습니다(엡 1:22-23, 골 1:18).  본문에 그것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데 이들은 주님을 한 번도 마음에 모셔 들인 적이 없기 때문에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닌 사람들이었습니다(계 3:20).  아마 목사 아니면 장로나 집사들이 이 교회에서 목에 힘을 주고 목소리 높여 가면서 주인 노릇을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 현대교회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말합니다(계 3:20).  우리는 이 말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많이 사용하는 말이지만 그러나 본문은 불신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계 3:14).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스스로 영적으로 부요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분문에 보면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말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이미 오래 전부터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을 두드리는 동안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인간적인 교제를 재미있게 나누었을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교회 밖으로 쫓아내고 문을 닫아 버린 상태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밖에 서서 계속 문을 두드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바울 성당에 홀만 헌트라는 화가가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에는 오두막 같은 집에 예수님이 등불을 켜고 찾아오셔서 그 집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주님이 서 계신 집의 문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집 주인이 안에서 열어주기 전까지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문을 열어 줄때까지 주님이 문 앞에 서서 계속 두드리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마음의 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고리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데 내가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주님은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철저히 인정하고 회개하여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셔드릴 줄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교회는 누구를 위해 예배를 드리러 모였는지 몰랐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서 한결 같이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기는 자에게만 상급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계 2:7, 11, 17, 26, 3:5, 12, 21).  이 말의 의미는 이기는 자가 있는 반면에 지는 자들도 있다는 것인데 만약에 이기지 못하고 지면 어떻게 됩니까?  영적전쟁의 패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보좌에 앉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영적전투에서 피 흘리기까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히 12:4).  신앙생활에서 은혜로 구원받는 것 외에 나머지 모든 것들은 그냥 되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힘써 싸워야 합니다(엡 6:10-13).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그냥 앉으신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하늘보좌에 앉으셨습니다(요 16:33, 막 16:19).  그분은 우리의 모델이시기에(벧전 2:20-21), 우리들도 주님처럼 믿음으로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본문에 ‘이기는 자’라는 말이 나오는데(계 3:21), 이 말은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굳게 지킨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고난의 불을 통과한 사람들로서 주님을 위해 고난당한 흔적을 몸에 가지고 살았습니다(계 7:14, 14:12).  또한 이들은 다니엘처럼(단 1:8), 자기 양심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세상의 좋은 것들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로(계 14:4-5), 정말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난 속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스데반이 순교 직전에 바라봤던 하늘의 보좌에 앉는 것입니다(행 7:55-56).  여기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은 최고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말하는데 마치 예수님이 악한 세상에서 승리하여 아버지의 보좌에 앉으신 것처럼 누구든지 싸워서 이기는 자들도 주님의 보좌에 앉게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됩니다(계 3:21).

 

◈ 하나님은 참으로 공평하신 하나님이신데 절대로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동시에 다 가지도록 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마 6:24).  두 가지 다 동시에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세상에 있는 좋은 것들을 다 가진다면 하늘에서는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가운데 오직 주님만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면서 끝까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마 16:24). 이러한 사람들은 하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며 다시는 눈에 눈물을 흘리거나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계 21:4).  여러분들은 지금 어떠한 신앙의 온도를 소유하고 계십니까?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 그리고 미지근한 것 중에 어느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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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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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성인이면서 초대 교회의 교부이자 카르타고의 주교인 Cyprianus하나님께서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 잡다한 개개인의 신자들 무리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위한 한 백성을 구원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교회가 구원받은 개개인으로 구성되어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목적은 전체로서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개개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는 하지만( 10:9-10), 구원을 단순히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를 넘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고전 12:13), 교회 공동체인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15-16).  예를 들면 고린도교회에 몇몇 개개인들이 저지른 심각한 음행 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범죄한 개인뿐 아니라 그 죄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교회를 향해 책망을 하고(고전 5:1-13),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일이 일어나도록 만들고 그것을 제대로 처리 하지 못한 책임에 대해서도 교회를 꾸짖기도 하였는데(고전 6:7-11), 여기서 바울이 문제를 삼은 것은 구원받은 개개인을 넘어 하나님의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와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역할에 대해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역 교회 지체들과 아무런 교제 없이 혼자 집에서 인터넷이나 TV를 통해 영상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5:6).  가령 어떤 한 사람이 자신의 집 텔레비전 앞에 앉아 기독교 방송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설교자가 구원의 초청을 할 때 TV 앞에서 그 설교자를 따라 앵무새처럼 신앙고백을 할지라도 사실 그가 출석하는 교회가 텔레비전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뿐 구속받은 신자들의 지역 모임과 아무런 교제가 없다면( 4:11-15), 과연 이러한 사람을 두고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 사람에 대한 구원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아시겠지만( 2:9), 문제는 그런 식의 구원이 신약 성경이 정해놓은 틀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요일 2:19).  그런데도 사람들은 로마서 109절 말씀을 인용하여 교회에 가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이 본문은 적어도 물세례를 받을 때 그러한 고백을 하는 장소가 기독교 공동체라는 전제를 두고 있고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을 하나 되게 하는 세례를 통하지 않으면( 2:37-42, 16:31-33), 신자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도 쉽게 무시하거나 놓치는 것이 있다면 바울 서신서에서 나오는 ‘서로’(알렐론)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을 잘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지체들이며( 12:5, 4:25), 서로를 세워주어야 하고(고전 12:25), 서로 사랑해야 하며(살전 3:12, 4:9, 살후 1:3), 서로 유익을 위해 추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살전 5:15),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해야 하며( 4:2), 서로의 짐을 져야 합니다( 6:2).  나아가서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 인자하게 불쌍히 여겨야 하며( 4:32), 서로 복종하고( 5:21), 자신보다는 서로를 더 낫게 여겨야 하며( 2:3), 사랑으로 서로에게 헌신해야 하고( 12:10), 서로 마음을 같이해야 합니다( 12:16).  이러한 것들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단지 개인을 구원하여(물론 구원하시지만) 세운 것이 아니라 전체의 백성들을 세우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9:6-7), 이것은 바울 서신 전체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으로( 6:16),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언약을 맺은 대상은 이스라엘 개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한 공동체인 것처럼( 19:5-6), 하나님은 그 백성 가운데 거하시며( 5:3), 백성들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속성을 드러냅니다.

 

Hans Küng은 이러한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교회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교회 온 하나님 백성이요 온 ‘에클레시아’이며 온 신앙인의 공동체이다. 모두가 선택된 민족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백성이다. 이 하나님 백성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화(하나님의 은혜로 죄인이 의롭게) 되었으며 성령에 의하여 성화된 사람들이다”  이 말을 쉽게 요약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고전 1:1-2).  따라서 교회는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새로운 백성의 무리들( 1:13), 즉 택하신 족속이요 거룩한 나라이기 때문에(벧전 2:9), 세상의 어떤 모임과도 구별된 “택함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교회가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종교 개혁자들로부터 물려받은 교회론의 값진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공동체이며 선택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 20:28), 안에는오직 구원받은 참된 주의 백성만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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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스승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가장 핵심적인 악, 가장 궁극적인 악은 교만입니다.

성적 부정, 분노, 탐욕, 술 취함 같은 것들도 

이 악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합니다.

사탄은 바로 이 교만 때문에 악마가 되었습니다.

교만은 온갖 다른 악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맞서는 마음 상태입니다.

 

제 말이 과장처럼 들립니까?

실제로 여러분이 얼마나 교만한지 알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스스로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거나 알아주지 않거나,

쓸데없이 내 일에 참견하거나 

은인 행세를 할 때,

얼마만큼 싫은 마음이 드는가?”

요점은 각 사람의 교만은 

다른 이들의 교만과 경쟁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연회장에서 거물급 인사처럼 행세하는 사람을 볼 때,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내가 바로 그런 거물급 인사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은 남과의 비교입니다.

즉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경쟁이라는 요소가 없으면 교만도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항상 눈을 내리깔고 

사물과 사람을 봅니다.

그렇게 내리깔고 보는 한 자기보다 높이 있는 존재는 

결코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선한 사람으로 느껴질 때는

특히나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게 느껴질 때는

확실히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를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 볼 수 있는 진짜 시금석은

‘나 자신을 하찮고 더러운 존재로 여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겸손해지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제가 그 첫걸음을 알려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그 첫 걸음이란 

바로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간 보폭이 큰 걸음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이 한 걸음을 내딛기 전에는 

아무 진전도 있을 수 없습니다.

 

C. S. 루이스『순전한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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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정할 때까지 기다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기로 정하시면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 인생을 조정하고

하나님이 쓰시도록 자신을 내어 놓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자기의 뜻을 혼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환경이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정확히 일러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기회가 열리거나 열리지 않거나 하는 것도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일러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명확히 하려면

당신이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방향에 대해

기도, 말씀, 환경 모두가 일치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아직도 속으로 이렇게 얘기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다 좋은 얘기지. 그러나 나에게는 좀 더 실제적으로

이 개념들을 내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도움이 필요해”

어떤 경우에든 하나님은 당신의 어떤 방법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요구하십니다.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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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을 하는데 있어 상대방에게 먼저 말을 걸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교제를 하기 위해 쌍방 간의 대화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대화란 최소한 둘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주된 이유 중 하나는(창 1:27), 우리가 그분과 교제할 수 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인데(사 43:7, 21), 만약 정상적인 주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아실 때마다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요 10:3-4).  그러나 문제는 소위 그리스도인들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 이외에 개인적으로 듣는 것에 대해 아주 신비주의적이고 괴상한 일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귀신에게 속임수를 당하는 것이고 오늘날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이지(갈 5:22-23), 은사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인간이 만들어낸 신학이나 잡다한 이론들은 성령이 주신 영적은사들을(고전 12:4-11), 활용하지 못하도록 걸림돌 역할을 할 때가 많지만(빌 3: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주님의 양은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알며 또한 그를 따른다고 말합니다(요 10:27).

 

예수님께서 처음에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마 4:18-22), 그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전도를 하거나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목적으로 제자들을 선택하셨는데, 첫째는 자신과 함께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전도하기 위해서, 셋째는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갖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막 3:13-15).  그러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예수의 이름으로 전도하고 능력 있는 사역을 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하고 또한 그분과 친밀해지는 것이 모든 사역의 실질적인 기초로서 이 친밀감이 우리에게 넘쳐흘러야만 전도와 증거의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보다 아버지의 음성을 잘 들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이 제자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이 원리에 철저하게 순종했기 때문인데(요 5:30), 예수님은 날마다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를 근거로 사역하셨고(막 1:35), 늘 행하시던 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시려고 한적한 곳으로 가서 그분과 고요한 시간을 가지셨던 것입니다(눅 5:16).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원한다면 우리의 모든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보는 마음의 상태, 즉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에게 사용될 수 있도록 그분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친밀해지기 위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분을 찾아야 할까요?  물론 하나님이 오실 때까지 찾아야 하겠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채 매일 30분이나 1시간 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런 사람들은 경험상 쌍방의 소통 없이 일방적인 대화, 즉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이 없이 바리새인처럼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데(눅 18:12), 만족하는 것으로 끝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의무와 책임을 충족시킴으로써 하나님을 만족시키려는 반면에 친밀한 우정 관계에 있는 사람은 이러한 의무감을 초월하는데 이런 사람은 주님과의 개인적인 조용한 시간을 갖기도 하지만 나머지 시간을 종일 하나님을 잊고 지내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분과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실 것을 기대하며(합 2:1), 사무엘처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삼상 3:10),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그분만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아는데서 만족합니다.  요약하면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생활과 우리의 미성숙함인 경우도 종종 있지만 주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만이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신 4:29), 주님을 전심으로 찾지 않고 있기에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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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지참금

연구자료 2014. 2. 5. 08:31

결혼식을 거행할 때 신부에게 주는 선물과는 달리 청혼한 남자가 결혼을 하기 위해 처녀의 아버지에게 지불해야 하는 돈을 히브리어로〈모하르〉로 말해지는데 이 말은 성경에서 세 번 밖에 언급되지 않았다(창 34:12, 출 22:16, 삼상, 18:15). 〈모하르〉의 액수는 처녀의 아버지가 요구하는 데에 따르는 경우도 있으며(창 34:12), 또한 처녀 가정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었다(삼상 18:23).  처녀를 강간하여 강제적인 결혼을 할 경우에는 은 50세겔을 지불하도록 율법에 규정되어 있다(신 22:29).  이에 따라 우리는 일반적인 결혼 지참금이 은 50세겔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결혼 지참금이 없을 경우에는 노동의 봉사로 대치될 수 있었으며(창 29:15-30), 다윗과 미갈의 결혼에서와 마찬가지로(삼상 18:25), 일정한 과제의 수행을 통하여 결혼이 허락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신부의 가족에게 일정한 액수의 돈을 지불하거나 이에 상응하는 대치 행위를 해야 된다는 의무는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에 대하여 일종의 매매 계약의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결혼 지참금은 아내에 대하여 지불하는 구입 가격보다는 처녀의 가족에 대한 보상금의 의미를 더 많이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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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고전이 된 『Quiet Talks on Prayer』에서 S.D. Gordon은 “실제적인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향력을 끼치거나 그분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과 그의 졸개인 악의 세력들에 대항하여 주님과 함께 그분의 능력에 참여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사실 귀신들과의 영적싸움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하나님께 참여함으로써 사단과 귀신들을 무찌르는 것이지만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는 사악한 영들을 무찌를 아무런 힘과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4:6).  솔직히 오늘날 목회자와 신자들이 세상과 거룩하게 구별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며 산다고는 하지만(고후 2:15), 천국에 갈 때까지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용서받은 죄인들이고(요일 1:8-10), 누군가가 마음을 상하게 하면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심리학자인 칼 융이 말한 것 같이 우리 안에 있는 “짐승 한 마리”의 정체가 들어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이길 만한 힘도 없고( 4:23), 특히 귀신들과의 영적전쟁에서는 제자들처럼 묵사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9:14-29).  쉽게 말하면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성경구절을 줄줄이 인용하여 귀신들의 세력을 대적하지만 그것을 이길만한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때가 거의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 중에는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영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많은데( 4:18-19), 문제는 성경 말씀만을 강조하는 사역자들이 언제쯤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는지 그것도 의문이고 만약 그들이 선포하는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말씀이라면 초대교회 제자들이나( 3:1-10), 평신도 빌립 집사처럼( 8:4-13), 아니면 사도바울과 같이 성령의 능력과(고전 2:4),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5:39), 복음을 통해 타락한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면( 1:16), 그 말씀을 통해 영혼뿐 아니라 백부장의 하인을 고친 것과( 8:8), 귀신들의 세력에서 놓여남을 받는 것과 같이( 8:16), 육체도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요삼 2).  그래서 예수님의 지상사역에서 영혼만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2:5), 혈루증 걸린 여인처럼( 9:21), 육체의 질병과( 1:32-34), 마귀에게 눌려( 10:38), 고통당하는 자들을 구원시켜 주신 것입니다( 8:36).  이렇듯 우리 사역의 모델은 예수님이기에 그분의 삶에서 말씀과 성령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11:4-5, 1:21-27),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가 서로 조화를 이룬 것처럼( 28:18, 11:29), 제자들의 삶과 사역에서 마찬가지로( 4:29-30), 현재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을(고전 12:4-11), 등한시 하고 말씀만을 강조하는 것은 균형 잡히지 않는 목회 사역이라고 볼 수 있고 사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일하신 직접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고 실제로 바울 서신에 맨 처음 등장하는 성령에 대한 언급도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주를 따르는 자들이 된 것은 단지 바울이 복음을 증거 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 복음 증거에는 성령이 능력으로 함께 하셨고 이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그 복음을 듣는 모든 이에게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살전 1:5).  또한 고린도전서 24절에서도 바울은 자신이 증거한 설교 내용에(고전 1:18-25), 설득력 있는 지혜와 수사는 없으나 그럼에도 그 증거가 지혜나 수사보다 훨씬 더 효력이 있었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로마서1518절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복음 증거가 ‘말’로만이 아닌 ‘행위’로 이루어 진 것이며 이 두 가지는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기적적인 것들이 복음 증거에 뒤따르지 않거나( 16:20), 둘 중 어느 하나만 있어도 된다는 식의 ‘양자택일’로 생각하는 것은 바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이 두 가지 능력이 그에게는 당연히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1:29).

 

영적전투에서 선구자 중 한 사람이었던 Dick Bernal은 “하늘의 악의 영들을 다루는데 있어 그 정체를 밝히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우리가 아무리 입으로는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한다고 하지만 솔직히 우리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고( 4:13), 성공적으로 마귀를 대적하려면( 6:11), 반드시 행해야 할 요소들이 있습니다.  먼저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과 그분을 가까이 하는 것, 그리고 손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성결케 하는 것입니다( 4:7-8).  물론 이 효과적인 영적싸움을 수행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진리의 말씀과 개인적인 기도도 중요하지만( 6:14-17), 앞에서 말한 것처럼 더 필수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인데(벧전 1:15-16), 여기서 말하는 거룩함이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원하는 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요일 2:3).  사실 사역을 행하기에 앞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거룩함을 얻기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만 만약 거룩함이 없이 귀신들과 영적싸움을 치르게 된다면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처럼 벌거벗고 뛰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고( 19:13-16), 기도하지 않은 제자들처럼 소리만 지르다가 끝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9:17-19, 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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