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1'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4.01.28 찬송을 열심히 부름
  2. 2014.01.22 소신대로 밀고 나가는 사람
  3. 2014.01.17 별 볼일 없는 초라한 교회
  4. 2014.01.11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
  5. 2014.01.08 구속사

사람들이 가진 신앙 감정이

그들로 하여금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사실로는

그 감정의 본질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고 싶어 하며 자신들의 입을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 차게 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라고 권면하고 싶어 하면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감정이 은혜롭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여기는 것 같아서 이 부분에 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그리스도인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성향이 있는 듯 하다는 사실 때문에 그 사람을 반대하는 논거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은혜를 받지 않고서도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고조된 감정을 가질 수 있으며 그들이 체험하는 김정이 강해지면 스스로 감화 받는 일들을 매우 진지하게 많이 말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은혜로운 감정에 모조품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어떤 사람에게 그런 성향이 있는 듯 하다는 역시 그 사람을 지지하는 논거로 합당하게 여길 수 없을 것이다.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그런 실례들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그 사실은 더 분명하고도 직접적으로 밝혀질 것이다.  예수께서 설교하시고 기적을 행하실 때에 함께 했던 군중 가운데서 종종 이런 사례를 접하게 된다.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하더라’(막 2:12, 마 9:8, 눅 5:26).  그리스도께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일으키셨을 때에도(눅 7:16), 그들이 그분께 영광을 돌리거나 그를 극도로 칭찬하는 것을 읽게 된다(눅 4:15).  또한 사도들이 앉은뱅이를 고쳐주었을 때(행 4:7), 안디옥과 비시디아의 이방인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거부하시고 이방인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크게 감동되어 주의 말씀에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그렇게 한 모든 사람이 참되게 믿은 것 아니었고 오직 일부 선택된 사람들만 믿었다(행 13:48).

 

여전히 교만하고 하나님께 적개심이 있는 사람들도

그들이 하나님에게 특별한 친절을 받았다고 생각할 때에는

자신들의 무가치함을 외치고

그들에게 값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높이게 된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사울처럼 자신의 무가치함을 확신해서도 아니고

어떤 높은 원칙에 근거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삼상 24:16-19, 26:2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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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선포!

이것은 지옥이 두려워하는 것이요

땅에게 필요한 것이요 하늘이 정한 것이다“

이것은 Hamish Mackenzie가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그의 책『영원한 것들을 전하라』에서 한 말이다.

인류 역사상 지극히 어둡고 심각한 이 시대에

세상은 타락의 극치를 이루고 있고

교회는 멍하니 바라만 보고

설교자들은 자신도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고 있다.

우리가 교회를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우리의 방법을 따라 이끌어 왔기 때문에

우리 목회자들은 무엇이든 조금씩

다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강요당했다.

그러나 이런 경향에 휩쓸리지 않고

소신대로 줏대 있게 밀고 나가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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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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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주님의 뜻에 가깝고 성경이 제시하는 모델에 가까운 교회를 찾으라 하면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모든 교회들은 주님 앞에서 책망을 받았지만 두 교회만큼은 책망을 받지 않았는데 우리가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을 보고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은 모든 교회들을 다 좋아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일곱 교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히 주님 마음에 맞지 않는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다 똑같은 교회로 평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한 사람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을 받고 다른 한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런 평가로 본다면 본문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전혀 듣지 않은 승리한 교회입니다.

 

◈ 예수님이 교회에 나타나시는 모습은 각 교회의 사정과 깊은 관계가 있는데 교회의 형편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지금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참되고 진실하신 청지기의 모습으로 찾아오셨는데 본문에 보면 ‘다윗의 열쇠’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3:7).  여기서 다윗의 열쇠란 청지기인 엘리야 김에게 주었던 열쇠를 말하는데 이사야 22장에 보면 당시 히스기야 왕의 국고를 맡았던 궁내대신 셉나가 자리에서 쫓겨나고 힐기야의 아들 엘리야 김에게 다윗의 열쇠를 맡기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열쇠는 집과 성전과 창고를 맡아서 주관하는 그런 열쇠로 다윗의 열쇠가 주어졌다는 말은 모든 것을 관리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권한을 왕의 이름으로 엘리야 김이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고 말하며 이 열쇠를 가지신 주님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하기를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라고 말합니다(계 3:7).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실세 중에 실세이며 모든 결정권을 한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마 28:18), 천국에 들어갈 사람과 들어가지 못할 사람을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결정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며(삼상 2:6-7), 메시야 왕국에서 지옥의 권세와(계 1:18), 하늘과 땅의 권세(마 28:18), 또한 자기 집(다윗의 집)의 권세를(히 3:6), 소유하고 계신 분으로서 오직 그분만이 자기 백성들을 거룩한 도성인 천국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권한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요 14:6).

 

그렇다면 주님이 다윗의 열쇠를 갖고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빌라델비아 도시에 사는 유대인들의 가지고 있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다윗의 왕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고 주장을 했는데(계 3:9), 우리는 이것을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주님과 심한 논쟁을 벌이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유일한 민족이라 자신들만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것은 조상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유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열쇠를 쥐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어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요 14:6).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들어갑니까?  성경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혈통으로 되지 않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소용이 없고 몇 대째 믿었다고 해도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육적으로도 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인 열심히 있는 자라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께 열정을 가졌던 자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들 중에는 끝에 가서 주님을 배척하기도 했습니다(요 6:66).  그러기에 사람의 의지로도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야 합니다(요 1:13).  ‘하나님께로부터 난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으로 변화가 되어 새롭게 다시 한번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요 3:3, 5).  쉽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로(엡 2:8),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을 믿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행 4:12, 계 1:18).

 

그러므로 예수님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나타나신 것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선민의식에 대한 반론이라고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의지할 분이라고는 주님 한분 밖에 없는, 다시 말해서 다른 교회들 보기에 참으로 딱하고 융통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빌라델비아 교회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주님은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세상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해(계 3:10), 반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불신자들처럼 행동하며 더 악하게 사는 유대인들에게는 심판의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 천국의 열쇠를 가지시고 나타나신 것입니다(계 3:9).

 

◈ 오늘날 사람들은 현대교회의 능력을 어디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두 가지로 측정될 수 있는데 하나는 교회 사이즈인 교인들의 수입니다.  일단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재정적인 면으로도 그렇고 능력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교회의 규모가 작으면 능력 없는 교회로 인식해 버립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입니다.  그 교회에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나 좋은 직업이나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면 우선 그 교회는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 안에 고급 직종인 의사나 변호사, 아니면 개인사업체를 운영하는 사람들, 혹은 정치에 몸을 담고 있는 분들이 많으면 그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무슨 덕을 볼까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오늘날 이러한 교회를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은 사실입니다(약 2:1-4).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정말 별 볼일이 없는 초라한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라는 말이 나오는데(계 3:8), 이 말은 영적인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서 빌라델비아 교회가 실제적으로 작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대부분 노예이거나 가난한 자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사회적으로도 힘이 없고 스스로 보호하거나 지킬 수 있는 능력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전혀 없는 전무후무한 교회였습니다.  이름난 교회 같으면 사회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이 섞여 있어서 어려움이 생길 때 찾아가서 호소하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지만 이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없어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교회였습니다.

 

정말 빌라델비아 교회는 성도들의 수가 너무 작아서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들 같으면 이런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교회에 너무 사람이 없으면 가기 싫어 할 것입니다.  분명이 자녀들 교육을 위해서라도 큰 교회를 찾아갈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교인들의 생각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사람 수가 적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람이 많으면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한 번 보시길 바랍니다.  소아시아의 이름난 교회들에 비해 숫자적으로 본다면 가장 별 볼일 없는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였지만 주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예수님이 보시는 눈과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사 55:8-9).

 

왜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 앞에서 칭찬을 받았습니까?  이들은 교회 사이즈와 상관이 없이 진리의 말씀에 생명을 걸고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만 믿은 것이 아니라 삶의 풍성한 열매를 맺히면서 믿음생활을 충실히 했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주님을 부인하거나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그들에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3:8).  다시 말해서 빌라델비아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본문을 한번 자세히 보세요.  면류관은 언제 받는 것입니까?  천국에 올라가서 받습니다(고전 9:25, 살전2:19, 딤후 4:8, 벧전 5:4, 계 2:10).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의 신자들은 천국에 올라가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미 면류관을 받았습니다(계 3:11).  다시 말해서 그들의 신앙생활이 주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상급을 벌써 받은 것입니다.

 

◈ 주님은 이런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세 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첫 번째 약속은 그들 앞에 열린 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계 3:8).  사실 우리는 누가 구원을 받을 사람인지 아닌지를 겉으로 봐서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워낙 “짝퉁” 교인들이 많아 쉽게 분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열심히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의 복음만이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키기 때문입니다(롬 1:16).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단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지옥의 형벌의 대상이고 마치 감옥에서 살다가 마지막에 교수형을 당해야 하는 죄수의 처지와 같습니다(롬 5:12, 히 2:14-15).  이것이 인간의 숙명입니다(히 9:27).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바꾸어 버립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말입니다(요 5:24-25).

 

본문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라는 말이 나오는데(계 3:8), 이 말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복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빌라델비아 교회로서는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 얻을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에게 다 복음의 문이 열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골 4:3).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서 오직 빌라델비아 교회만이 복음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데 교회에는 복음의 문이 열려 있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아직 영적인 잠에서 깨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계 3:1-3).  설사 복음의 문이 열려도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데 교회는 주님 보시기에 이미 죽은 교회로 판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회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복음의 문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복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빌라델비아 교회 신자들의 신앙관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십자가의 복음만큼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곳에 있거나 불신자들 앞에서도 확실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리스도의 군사들로서 준비된 사람들입니다(딤후 2:3-4).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하기에 합당한 사람들로 부름을 받은 교회가 바로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높일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에 주님의 영광을 가릴 사람들은 없었습니다(마 5:13-16).  그래서 주님은 그들 앞에 복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 두 번째 약속은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계 3;9).  교회가 가장 기쁠 때가 한 영혼이 주님 앞으로 돌아올 때인데(눅 15:7), 그것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마 16:26).  특히 교회를 열심히 핍박하거나 예수님에 대해서 말만 하면 입에 거품을 흘리는 사람들이 돌아올 때는 그것처럼 더욱 기쁜 일이 없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이 주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 나라에서는 잔치가 열립니다(눅 15:10).  이 사람은 얼마나 악질 인간인지 하나님을 잘못 믿어서 얼굴에 살기가 돌 정도로 문제가 많았던 사람이지만(행 9:1), 다메섹에서 주님과의 일대일 면담을 통해 완전히 박살이 난 사람입니다(행 9장).  이렇게 하나님 만나기 전 바울과 같은 유대인들이 하는 짓들이 무엇입니까?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행동들을 보면 마귀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마 12:22-37).

 

지금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선민의식이 강한 민족이라 자신들만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천국에 들어갈 자라고 확실히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지옥의 자식들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에 보면 그들을 ‘사탄의 회’라고 부르는데(계 3:9),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강력하게 부인하고 핍박하는 집단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사탄의 자식들이라는 것입니다(요 8:44). 왜냐하면 믿기는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늘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고 예수님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막 3:22-30).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구제불능의 인간들이며 루터가 말한 것처럼 지옥의 땔감으로 준비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에 무슨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너무나 기쁜 일이 하나 생겼는데 그것은 그렇게 마귀 같은 짓들만 골라서 행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주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계 3:9).  결국 복음을 듣고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신자들이 끝까지 믿음과 행함으로 삶의 열매를 맺히며 살았기 때문입니다(계 3:8).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는데 주위의 친척이나 형제들이 나를 무시하고 나의 신앙을 조롱할 때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이 신앙이 옳다는 것을 무릎을 꿇고 인정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증거이며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신앙이 옳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시 23:5).

 

◈ 세 번째 약속은 시험의 때를 이기게 해주신다고 합니다(계 3:10).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시험이 없는 신앙생활은 없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시험과 고난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고난을 주셔서 연단을 시키십니다(히 12:6).  그래서 연단이 올 때 그것을 잘 견디고 인내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정작 큰 위기 때 보호받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어려움이 왔을 때 불평하고 원망한다면 결국 무서운 환난이 왔을 때 이기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고전 10:10).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연단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빼내가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어려움이 오면 그때에는 겸손해 지고 자기 잘못도 시인하고 잘해보겠다고 다짐도 하지만 그 사람 속에 있는 죄성까지 다 빠져나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충분히 연단시켜서 죄의 본성까지 빠져나가게 하십니다.

 

본문에 ‘시험의 때를 면하리니’라는 말이 나오는데(계 3:10), 여기서 “시험의 때”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하나는 “시험의 때”는 7년 환난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것을 면하게 해주신다는 말씀으로 그 환난 직전에 땅에서 취하여 가심을 말한다는 해석입니다(단 12:1, 욜 2:31, 막 13:14, 살후 2:1-12, 계 14:7).  다른 하나는 “시험이 때”는 재림 직전의 대 환난을 말하는 것으로 요한복음 17장15절에서 주님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빌라델비아 신자들이 환난을 당하지만 그 환난 속에서 궁극적으로 보호해주신다는 해석입니다(계 7:14).  아무튼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어려운 환난 가운데서 철저하게 보호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 시험을 당할 때 도와주신 것처럼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도록 눈동자처럼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단 3:27).

 

본문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미 승리한 교회이고 면류관을 받은 교회로 여러 가지 시험들이 많이 있었지만 넘어지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는 상태에서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승리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교회에 대해서 한 가지 주의사항을 주시는데 그것은 지금 가지고 있는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계 3:11).  이 말씀의 의미는 가지고 있는 면류관을 자칫하면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빌라델비아 신자들이 처음 가지고 있던 신앙을 끝까지 굳게 잡는 것입니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고’ 라는 말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그분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믿음을 말합니다(계 3:8).  다시 말해서 처음 신앙을 잃어버리면 주어진 면류관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한눈팔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빌라델비아 교회의 신자들이 교만하거나 인간적인 의를 자랑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께로부터 받는 면류관을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사실 어려운 시험에서 잘 견디어 내고 고난도 잘 극복하다가 나중에 교만해져서 상급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높은데 마음을 품으면 면류관을 빼앗기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에서는 장자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귀중한 것인 줄 모르고 동생 야곱에게 빼앗기고(창 25:34),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도 장자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도덕성의 문제로 유다에게 빼앗기고(창 49:4, 8), 사울 왕은 교만으로 인해 다윗에게 그 왕위를 빼앗깁니다(삼상 16:1).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누구든지 교만하거나 주님 앞에서 불충성하면 언제든지 빼앗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고전 10:12).  그러므로 인간이 교만해지지 않으려면 방법은 하나인데 그것은 매순간마다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마 6:13).

 

신앙생활이란 영적 전투를 계속하는 생활로 성경은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군사들로 묘사합니다(딤후 2:4). 이 말은 지상에서 영적 싸움이 치열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엡 6:10-10-18).  하지만 주님은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을 하십니다.  하나는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계 3:12).  우리들 생각에는 천국에 무슨 기둥이 필요하겠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천국에는 기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비유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리라’라는 말은 기둥처럼 안전하고 견고하게 붙들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에 기둥이 무너질 염려가 없는 것처럼 완전한 천국 삶을 보장해주시겠다는 말씀으로 하나님 가까이에서 그분을 섬기는 축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계 15:7).

 

다른 하나는 이기는 자에게 삼중 서명을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신자들은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았던 무명의 사람들로 누구도 인정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면류관을 주시며 이길 경우 성전 기둥에다 삼중 서명을 해주실 것을 보증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과(민 6:27, 고후 3:3),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계 21:2), 나의 새 이름을(계 2:17, 골 3:4, 요일 3:2),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성전 기둥에 세 가지 이름을 새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과 천국시민으로 확인시켜주시는 것이며(빌 3:20), 주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건축물을 세울 때 믿을 수 있는 업체가 건물을 다 짓고 나서 그 건물에 몇 년 몇 월에 완공된 날짜와 이름을 새기는 것처럼 삼중적으로 보증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오늘날도 어떠한 사람들에게 면류관을 주십니까?  그것은 신앙이 견고한 빌라델비아 교회의 신자들 같은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이들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불평하지 않고 인내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주님도 심지가 견고한 사람에게 축복과 평강을 부어주신다고 말합니다(사 26:3).  만약 우리가 처음 믿은 예수님을 끝까지 붙잡고 놓치지만 않는다면(히 3:14), 주님 나라 성전에 기둥이 될 것이고 또한 그 기둥에 구속받은 성도들의 이름이 삼중 서명인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새겨질 것입니다(사 62:2, 65:15).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때 이름만 대면 무조건 통과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 될 것을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그분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믿음으로 끝까지 사는 것입니다.  어떠한 핍박과 시련이 오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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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성경은 영적인 선물들이나 사역에 대한 가르침이 주어질 때마다 다양성과 사랑과 겸손을 포함하는 통합이라는 주제를 강조하면서(롬 12:5-10, 고전 12-14장, 엡 4:1-16, 벧전 4:7-11),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고 말하고 있는데(고전 12:13), 여기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는(롬 12:5), 구절에 대해 Gordon D. Fee는 말하기를 “바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재적 관심은 한 개인이 어떻게 신자가 되느냐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될 수 있는가?”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다양한 은사와 사역들은(엡 4:7, 11-12),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성령의 선물을(약 1:17), 아낌없이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기뻐하지 않을 때 고린도 교회처럼 한 몸을 이루기보다는 시기와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10-13, 3:3).  사실 원칙적으로 보면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이고(딤후 3:16-17),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기준은(벧후 1:20-21), 마땅히 받아들여할 확실한 것이지만(계 22:18-19), 그렇다고 해서 ‘성령세례’와 같은 기술적인 용어를 동일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대화중에서 거듭나는 것에 대해 설명하실 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3:8), 여기서 쓰인 ‘프뉴마’라는 단어는 문맥상 ‘바람’ 또는 ‘영’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즉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성령의 일하시는 방식은 인간의 머리로는 알 길이 없고 신비로우며 예측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남’이나(요 1:12-13), ‘성령충만’(행 2:4, 4:8),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사건들에(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행 11:16, 고전 12:13),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리거나 주장할 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깊게 새겨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묘한 일들은 하나님에게 속하였을 뿐 아니라(신 29:29), 하나님 나라의 일들은 신앙 형식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인 행위를 통해(고전 12:11), 임하기 때문에 매우 신비스럽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Craig S. Keener는 『Gift and Giver: The Holy Spirit for Today』에서 “성령 사역의 모든 차원은 회심할 때 경험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회심 이후에 성령의 여러 가지 또 다른 면모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성령에 대한 확실한 안내를 이렇게 제공합니다.  “그 능력을 덧입는 경험을 회심할 때 경험하는 것으로 생각하든 아니면 물세례를 받을 때 경험이라고 생각하든 아니면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특별한 역사를 통해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든 간에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좀 더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가지고 서로 자신들의 말이 옳다고 주장하지 말고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실제로 체험하고 누리며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 되겠지만 주님은 분명 ‘성령세례’라는 문제를 놓고 그리스도인들끼리 분열되기를 원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요 17:22).  J. I. Packer는 이러한 논쟁을 두고 “성령세례와 계속되는 은사들, 성령의 현재적 현현들의 범주를 더 넓혀야 한다.”라고 강조했는데, 사실 신학적 사고 안에서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 안에 계속해서 도전되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성경’과 ‘성령’의 관계를 적절하게 세우는 것이고, 이 문제를 풀기가 쉽지는 않지만 우리의 신학을 예외적인 몇몇 경우들을 기반으로 세울 것인지 아니면 좀 더 폭넓게 신학적으로 잘 설명된 문맥에서 실마리를 찾아낼 것인지는 각자가 스스로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결론적으로 Sam Storms가 말한 것처럼 개혁/복음주의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회심 때 성령세례를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옳지만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종종 극적인 성령체험의 실재를 부정하는 점에서는 그르다고 볼 수 있고, 오순절/은사주의자들은 회심 이후에 우리를 놀랍게 변화시키는 성령과의 만남의 실재와 중요성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옳지만 이런 경험을 ‘성령세례’라고 단정 지어 말하는 점에 있어서는 옳다고 볼 수 없고 더 적당한 용어를 찾아내라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눅 1:41, 67, 행 4:31, 7:55, 13:9).  따라서 우리에게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모든 신자의 회심에 적용할 것을 제안하지만 이는 결코 성령의 활동을 회심으로만 제한해서는 안 되고, 신약성경은 성령의 능력과 임재에 대한 다양한 이후의 경험을 인정하며 권장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신학적 문제를 놓고 서로 간의 견해를 나누는 우리 모두는 서로가 좋든 싫든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영적 형제들입니다(고전 12:13). Richard B. Gaffin은 신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주 안에서의 공통된 연합에 대한 관점을 놓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 점에 대해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한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신자들은 결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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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세상에서 혹독한 반대에 항상 직면해 온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세속 역사에 의해서도 증명이 되고

그 이전의 성경 역사도 

동일한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교회와 그 신앙 그리고 그 예배는

가인과 아벨 시대에 반대를 받기 시작했고,

노아 시대에는 땅이 온통 그 죄악으로 관영했습니다.

이후로 교회는 애굽에서 반대를 받았고

예레미야 12장9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이스라엘 교회는 항상 주변 민족에게 미움을 샀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신은 

고난 받는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섭리 속에서 

그의 교회가 오랫동안, 아니 거의 모든 세월을 고난 속에

때로는 극단적인 고난 속에 있도록 역사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참된 교회의 정신은 

고난 받는 정신이라고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교회에 

그토록 큰 고난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것이

필수적이라고 심각하게 말씀하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신은

교회가 그 고난 속에서 보여주고 실천한 정신으로서

고난 받는 정신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이에 대한 무수한 사례들을 제공하고 

구름 같은 증인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런 정신을 갖고 있는지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시험적으로 어떻게 증명이 될까요?

슬프게도 우리가 해보는 시험은 얼마나 적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참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순교자의 정신을 갖고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구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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