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신비인 삼위일체 교리는 너무도 난해하여 일반 신자들과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조차 접근하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교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 교리는 신자들로 하여금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거나 신앙적으로 큰 혼란에 빠뜨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에 대하여 더 풍부한 이해와 은혜로운 경험을 갖도록 만들어 줍니다.  사실 이 주제는 이미 초대교회 당시부터 큰 문제로 부각되어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주후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서 젊은 신학자 Athanasius를 통해 어느 정도 정리는 되었지만 그 후에도 여전히 끊이지 않고 도전 받고 있는 문제로 남아 있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역시 이단들이 삼위일체의 문제를 가지고 심각한 도전을 해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정통 기독교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단지 침묵만으로 대처해 나가며 만약 이단을 만나면 무조건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을 알고 피하는 것과 모르고 피하는 것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삼위일체에 대해 아는 것인데, 그것은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에 대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준으로 삼아야할 매우 중요한 교리이며 기본적인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 주변에 삼위일체에 대한 대표적인 이단적 가르침들을 살펴본다면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은 셋”이라고 하는 ‘삼신론’(三神論)인데, 교회 역사에는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이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실정이고, 정통 기독교 신앙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밝혀 이에 반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단으로 규정하여 교회의 입장을 내세운 상태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입장에서 나온 ‘일신론’(一神論)으로 여기에 대해 두 가지 대표적인 주장이 기독교 신앙을 오염시키고 있는데, 하나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리우스(Arius)가 주장하다 이단으로 규정된 ‘종속론’(從屬論)으로 이 이론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성자는 피조물로서 본질적으로 성부와 하나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양태론’(樣態論)으로 이 이론 역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기 위해 그분을 다르게 설명하는 것인데,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나타나시고 신약에서는 같은 분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아들로 나타나시고 오순절 이후에는 같은 분이 교회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으로 나타나셨다는 식의 가르침이지만, 이런 이론은 하나의 본체를 놓고 그 모양만을 달리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가르침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일체)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풀 수 없는 어려운 과제이지만,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Augustine이 말한 것처럼 하나의 열쇠가 필요한데 그 용어가 바로 ‘교제’와 ‘사랑’(아가페)이라는 단어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숫자를 말할 때 개체보다는 오히려 의미상으로 이해해야 더 정확한 해석을 얻을 때가 있는데, 예를 든다면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오직 '하나'라고( 6:4), 말씀하시는 것은 주변에 널리 퍼져 있는 이방 다신종교와 비교하면서 삼위일체의 유일 신앙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는 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삼위일체 가운데 하나(일체)라는 숫자를 강조하다 보니까 삼위(三位)에 대한 의미는 약화되면서 결과적으로 삼위일체의 본래 의미를 잃어버리는 부작용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은 숫자상으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이 세 분 하나님이 일체되어 그들의 사역을 하고 계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성경의 많은 의문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사랑으로 완전히 결합되어 하나가 되는 신비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서로 섬기며 각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면서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사역을 잘 이룰 수 있도록 교제하며 돕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은 완전히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2:19).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말할 때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비록 아들이라는 단어가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을 받았거나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17:5), 여기서 아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관계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Calvin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낳으신바 되었다고 말하며(1:14, 18), 주후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도 그분은 창조되지 않으시고 성부와 같은 본질을 소유하신 분으로 확인했고, 같은 내용이 주후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버지께 나오시는’ 구절 앞에 ‘만세 전에’라는 문구를 사용해서 ‘낳으심’이 어느 한 시점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영원한 일임을 거듭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낳으심’의 본질이 무엇인지 대해 분명하게 정의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자가 성부로부터 영원히 나신다는 말은 인간의 존재 양식과 같은 생산(生産)의 개념이 아니라 이전에 아버지 품속에 계셨으며( 1:18), 자신의 영광을 성부와 더불어 영원히 누리셨던 관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7:5).  그러므로 이 호칭에 매여서 현대판 아리우스 자들처럼 예수님의 위상을 낮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0:30).

 

예를 들면 히브리서 15절에 나오는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2:7), 라는 구절에 대해 영원 전에 출생하신 아들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성육신, 혹은 그분의 부활과 승귀를 염두해 둔 아들직, 또는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를 가리킨다는 이런저런 많은 해석들을 제시하지만, 이 구절에 대해 확실하게 “이것이 가장 정확한 해석이다”라고 말하는 신학자들은 없습니다.  Calvin은 이 문제를 놓고『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신성과 영원한 본질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골로새서 115절에 나오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구절을 가지고 “이런 종류의 속성들은 그의 신성에만 해당 한다”라고 해석합니다.  사실 고린도전서 1313절에 보면 아버지 다음에 아들의 순서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앞세우는 것은 이 세 분 하나님이 동등하시기 때문에 표현 가능한 방식인데,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광과 권능과 인격이 같고 가지신 목표가 같기 때문에 하나가 되시고 서로 동등합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 중에 하나이기에 누군가하나님은 몇 분이신가?”라고 묻는다면하나님은 삼위로 존재 하신다”라는 것을 먼저 구분할 줄 알고 나서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대답이 될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교회사적으로 ‘이단’이라고 말할 때 어떤 쟁점에 대해 사소한 견해차이나 역사적 상황 속에서의 어떤 특수한 입장의 차이로 인해 기독교 내에서 분파를 달리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기독교 전통을 거부하거나 왜곡시키든지 아니면 성경의 명백 자명한 가르침을 교리적으로나 행위로 부정하든지 혹은 성경의 내용을 감하거나 더하는 경우에 이단으로 규정했지 단지 무지 때문에 실수를 저지른 자들에게 무조건 이단으로 몰아붙이지 않았고 오직 그릇된 주장에 대하여 재삼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돌아서지 않고 고집하는 자들만을(딛 3:10), 가리켜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관련된 이단들, 즉 예수님이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신 것을(요 10:30-31), 부인하거나 예수님이 육신의 몸으로(빌 2:7-8),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이단들이 많았는데(요일 4:2-3), 전자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함으로써 그분의 지위를 하락시켰고(요 17:5), 후자는 인간으로 오사(마 2:1),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롬 5:8),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골 1:21-22), 육체의 부활을 부인함으로서 그분의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롬 1:4).  또한 어떤 이단에 속한 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그대로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을 재림주로, 혹은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이단적인 가르침이 퍼져 나가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고 이들에 특성에 알아야만 이들을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낼 수 있는데, 먼저 이단들의 공통된 특성 몇 가지를 살펴본다면 이들은 처음의 주장과 나중의 주장을 서로 달리하고 처음에는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가 나중에 상황이 바뀌면 다른 말을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한문으로 이단(異端)은 “끝이 다르다”는 뜻으로 이들은 상황에 따라 수시로 자신들의 입장을 바꾸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딤전 4:1-3).  또한 성령의 내주하심과 조명하심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교주의 주장이나 인간의 사상을 기준으로 해석하고 교주의 말은 성경보다 더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헤롯처럼 인간 교주를 절대적 권위를 갖는 카리스마적 존재로 신격화하기도 하고(행 12:22), 절대 성경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후메네오와 빌레도 같이 일부를 왜곡 해석하거나 다른 무엇을 성경에 첨가하여 해석하는데(딤후 2:17-18),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 그리고 “삼위일체론”과 “이신득의 교리” 등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신들이 만든 교리들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도덕적으로 부패한 더러운 행위들을 일삼으면서(벧후 2:2), 그것을 교리적으로 합리화시키고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워 신자들로 하여금 일상생활에서 떠나게 만들거나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구원론, 즉 기존 교회를 떠나 자신들의 교리를 따르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에서 서머나 교회는 발람의 가르침을 통해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의 가르침으로 인해 큰 혼란을 겪은 적이 있었던 것처럼(계 2:14, 20), 이단에 대해 올바로 분별하여 잘 대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딛 3:10-11, 요이 1:10-11),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신앙의 노선을 가진 사람들처럼 신앙과 신학에 있어 교조주의적이거나 배타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단을 분별하는 기준이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학이 아니라(고전 1:10-13),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들의 열매이고(마 7:15-20),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믿는바가 무엇이냐는 통해 결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예수님의 신성(요 10:30-31)과 인성(마 2:1), 중 어느 것이든지 부인한다면 이단일 것이고(요일 4:1-6), 가령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신자들을 이익의 대상으로 삼거나(벧후 2:3), 형제간의 분쟁과 분열을 일으키고(딤전 6:3-5),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든다면(유 4절), 그는 발람의 길을 가는(벧후 2:15), 거짓 선생으로(벧후 2:1), 분명 육에 속한 자이며 성령이 없는(유 19절), 흉악한 이리일 것입니다(행 20:29).  다시 말해 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함부로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논쟁거리 > 이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단과 정통의 차이  (0) 2014.05.31
성경에서 벗어난 이단들  (0) 2014.03.08
이단이란?  (1) 2013.11.0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약혼의 의의

연구자료 2013. 12. 18. 10:13

약혼은 혼인을 하기 전에 선행되는 당사자 간의 약속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약혼은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풍습이었으나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도 약혼 풍습은 존재했었다(창 24:67, 29:15-21).  인생의 동반자를 결정하는 결혼이라는 큰일에 바로 들어가기보다는 가치 있는 결혼 생활을 위하여 마음을 가다듬으며 구체적인 결혼 준비 기간을 갖추기 위한 약혼이란 인류가 공유하는 제도인 것이다.  이러한 약혼의 성경적인 전형은 이삭의 약혼(창 24:50-67)과 요셉과 마리아의 정혼(마 1:18), 및 신명기 율법(신 20:7, 22:23-27)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경은 약혼을 ㉠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며(창 24: 50-51), ㉡ 부모의 뜻에 존중되고(창 24:58, 67), ㉢ 본인의 의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창 24:58, 67).  뿐만 아니라 약혼을 통해 새로운 책임과 의무가 성립되는데 ㉣ 서로 간에 순결을 유지해야 된다는 것이다(신 22:23-27).  이러한 관계가 잘 유지되도록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 친지는 물론 사회까지 그들의 성스러운 결혼의 준비를 도와주어야 한다(신 20:7).  하나님 앞에 혼인을 서약하는 약혼은 파기되어서는 안 되며 경우에 따라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마 1:18-19).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나안 정복과 언약과의 관계  (0) 2014.03.19
결혼 지참금  (0) 2014.02.05
절기  (0) 2013.11.06
우림과 둠밈  (0) 2013.09.25
십일조  (0) 2013.08.15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우리는 소아시아의 교회들을 살펴보면서 갈수록 교회의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먼저 에베소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려 전투하지 않는 교회로 전략하고 반면에 서머나 교회는 핍박을 받아가면서 계속 영적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잘못된 이단의 가르침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세상과 타협하는 교회로 변했고 두아디라 교회는 여러 가지 교회 일들은 많이 했지만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통해서 교회가 온통 성적인 방종에 빠진 음란한 교회로 변했습니다.  오늘 보게 되는 사데 교회는 다른 교회들처럼 외부로부터 핍박을 받거나 이단이나 음행에 물든 교회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심한 중병에 걸린 것도 아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미 죽어버린 교회가 되어서 대수술을 몇 번해서도 살아날지 의문인 교회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은 모두가 형편이 다르고 가지고 있는 문제들도 달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각 교회의 형편에 맞게끔 나타나셨습니다.  본문에 보면 ‘일곱 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계 3:1), 이 말은 완전하시고 전지하신 성령을 상징하는 표현으로(계 1:4, 16, 20), 계시록 5장6절의 ‘하나님의 일곱 영’은 ‘하나님의 눈’으로 스가랴 4장10절의 ‘일곱 눈’처럼 성령 하나님을 나타내십니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일곱 영’이란 성령의 완전함으로 그분이 어디에나 계시다는 성령의 편재성을 의미합니다(시 139:7-10).  본문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일곱 영을 갖고 계신 분으로 묘사하는데 이것은 사데 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성령 하나님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의 생명은 누구에게 달려 있습니까?  일곱 교회에서 증언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엡 4:7-8). 왜냐하면 교회는 성령의 능력이 많이 부어지면 부어질수록 생명력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이 차단되거나 소멸되면 그때로부터 교회는 서서히 죽어갑니다(살전 5:19).  그렇다면 죽어 있는 사데 교회를 다시 살릴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생명의 성령을 소유하신 예수님이십니다(행 2:33).  본문에 ‘일곱 영’을 가진 분으로 묘사한 것도 주님만이 죽어 있는 교회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고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진 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성령을 소유하시고(요 15:26, 롬 8:9), 또한 교회의 사역자들을 붙잡고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도록 통치하시는 분으로 죽은 사데 교회를 얼마든지 살릴 수 있는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계 1:16, 2:1).

 

◈ 오늘날 교회들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지요?  여전히 예배만큼은 드리고 있기 때문에 교인들은 자기 교회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거나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 예배가 죽은 예배인지 모르면서 말입니다.  만약 그 사실을 안다면 분명히 정신을 차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영적으로 계속 죽어가고 있기 때문인데 우리는 주님이 에베소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엡 5:14).  사데 교회 역시 처음부터 죽어 있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교회들처럼 예전에는 살아서 활동하고 움직였던 교회였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교회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안에 성령의 역사와 능력을 차단하는 어떤 것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그것이 사데 교회의 생명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본문에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계 3:1).  이것은 사데 교회 안에서 드려지는 모든 행위들인 예배, 기도, 찬양, 봉사, 선교, 구제, 섬김 등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주님은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계 3:2).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유명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 주변에도 유명하고 이름난 교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의 눈으로 그러한 교회를 어떻게 보시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어렵게 생각하거나 해석할 필요가 없이 겉으로 볼 때는 이름난 교회이지만 주님의 눈으로 보실 때는 실상은 죽은 시체들이 많이 모여 있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시체들이 모여 있는 교회, 조금 끔찍하지 않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사데 교회에서 예배를 드립니까?  열심히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와 찬양은 합니까?  당연히 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교인들이 모이고 있나요?  모이니까 예배를 드리고 찬양과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것들을 보고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계 3:1).  이들은 여전히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할 것은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죽은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기도와 찬양을 하는 사데 교회를 놓고 “사망 진단서”를 띨 수가 있습니까?  사망 진단서는 완전히 죽었을 때 발부되는 증명서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사데 교회는 이미 사망 진단서를 띤 상태에서 공동묘지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행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는 죽은 시체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사람들로 가득찬 사데 교회는 많은 일들을 한 업적들이 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기도를 드리고 교회출석도 하고 성경공부도 하고 찬송도 부르고 구제도 하며 봉사와 선교를 하는 이름난 교회였습니다.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교회가 아니라 이 교회는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해서 유명해진 교회입니다.  여기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입으로 떠드는 것보다 일을 행한 것이 백번 낫기 때문입니다(약 2:17).  그러나 문제는 주님 보시기에는 그들이 행한 일들 중에 옳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네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계 3:2).  쉽게 말하면 이들은 성령을 힘입어 일을 하지 않고 인간적인 노력과 힘으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롬 10:2-3).  더 간단하게 말한다면 사사기 시대처럼 자기들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삿 21:25).

 

◈ 본문에 ‘온전하다’라는 말은 ‘채워지다’, 혹은 ‘달성되다’, ‘성취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빈 컵에 물이 가득 차게 된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표준이 있는데 그것이 다 채워지거나 달성될 때 그분이 그것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 기도, 찬양, 구제, 선교, 봉사 헌금은 어떻게 드려야 합니까?  하나님의 표준에 맞추어서 드려야 하는데 이러한 모든 대답들은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출 20:1-17, 마 5-7장).  그러나 사데 교회는 많은 행위들은 있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표준에 이르는 행위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 보기에는 살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죽은 교회로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6장1절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시면서 4절에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이것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고 자기 이름을 내세우기 위해 행동할 때 주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가 아니기 때문에 받지 않으신 것처럼(창 4:5), 교회는 무엇을 하든지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분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해야지(벧전 4:11), 인간적인 생각이나 계획, 힘과 노력으로 하는 모든 것들은 오히려 성령을 소멸하게 만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살전 5:19).

 

사람과 교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나지만 교회는 죽더라도 다시 살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죽은 교회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본문에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말씀하시는데(계 3:2), 이 말의 의미는 사데 교회가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완전히 생명력을 잃지는 않았기에 주님과 사데 교회 사이에 가로막는 걸림돌을 제거하기만 하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의 역사를 차단하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찾아내서 제거하면 죽었던 교회가 살아날 수는 있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죽은 교회를 다시 살린다는 것은 복음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데 교회가 살아나려면 고통스러운 대수술을 여러 번 해야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 그러면 성령의 역사를 차단시켜 사데 교회로 하여금 죽게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를 얘기할 수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교회의 잘못된 제도와 관행들입니다.  물론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교회에는 제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제도는 교회의 참된 기능을 돕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목사의 직분이 존재하는 것은 교회를 말씀으로 풍성하게 하기 위해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지 그 목사를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에 복종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교회에 있어서 목사의 직분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목사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존재해야 하고 목사가 오히려 주님의 일을 가로막는다면 이 목사직은 성령의 역사를 풍성하게 하기 보다는 오히려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게 됩니다.

 

장로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를 세우는 것은 약하고 어려운 교인들을 돌아보고 또 교인들의 행실을 감독하여 잘못된 행실을 고치도록 하기 위해 세우는 것입니다(딤전 5:17, 딛 1:5-9, 약 5:14-16).  그러나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것처럼 돈이 있고 세상의 유망한 사람들에게 명예를 주기 위하여 장로를 세운다면 이 장로직은 분명히 그 교회에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거부하게 만듭니다.  아니, 거부하는 것은 둘째 치고 교회를 치열한 전쟁터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을 만큼 교회를 분열시키는 유명한 장로들이 많이 배출될 것입니다.  이것을 안 사도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런 설교를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에서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장로직에 임하라는 것입니다.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사직을 두는 것은 교회에서 봉사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인데(딤전 3:8-13), 그런 목적이 아니라 믿음도 없는 사람을 교회에 붙잡아 두기 위해서 직분을 주거나 아니면 잘 믿는다는 표시로 모든 사람들에게 다 집사의 직분을 준다면 바로 그런 제도가 교회에서 성령을 떠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슨 제도든지 보안적인 것이어야 하고 교회 안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실제적인 일들입니다.  즉 실제로 설교하고 실제로 돌아보고 실제로 몸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직분은 세상 감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 안되고 사람의 체면을 위하여 제도를 세울 때 그 제도는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트리는 역할을 감당할 것이고 결국 성령은 떠나고 인간들의 목소리가 교회를 지배하게 되고 나중에는 사데 교회와 같은 죽은 시체들이 모인 교회로 전략하게 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래된 관습들도 성령의 역사를 막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자신들의 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롬 10:2-3).  물론 처음에 어떤 습관이 생기게 될 때 모두가 나쁜 의도로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원래 생각과 다르게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을 떠나게 만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많은 제도들과 관행들이 성령의 역사를 막았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 안에서 빛나는 것들은 오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 자랑거리들만 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분자를 세울 때는 잘 세워야합니다.  교인들을 돌보지 않고 행실의 본이 되지 않는 장로와 일하지도 않는 집사들은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직분이란 참으로 주님의 일을 위한 직분이 되어야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명예를 위한 직분이 될 때 그때로부터 교회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참된 생명을 잃어버린 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으로 본문에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계 3:3).  이것은 사데 교회가 처음 들었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죽게 된 것은 본래 들었던 복음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복음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에게 다 필요한 것인데 그것을 모르는 교인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고(롬 1:16-17), 구원을 받았으니까 다 된 것처럼 생각한 사람은 이미 마귀에게 속아 넘어간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려면 구원받은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첫 과정에 불과하지 아직도 가야할 길이 험난하고 멀다는 것을 알고 시작해야 합니다(마 7:13-14, 요 10:7-9). 그러니까 믿으려면 처음부터 확실하게 알고 믿으라는 것입니다(눅 14:25-35).

 

여기서 ‘생각하라’는 말은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죽게 된 자리에서 벗어나는 길은 처음 들었던 십자가의 복음을 기억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구원의 첫 체험을 기억하는 것이 회복의 효과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골 2:6, 히 3:14, 10:32),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죄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그분 앞에서 지옥 갈 짓들만 골라서 행한 무서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긍정하시는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백한 말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딤전 1:15).  다른 하나는 이러한 죄인인 우리를 예수님이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고 구원을 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요 3:16, 엡 2:1-10).  만약 이 두 가지 사실을 잊고 산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배은망덕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이 가장 필요한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이지만 교회 안에서도 복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 현대교회는 물질적으로 풍부해서 선교사도 파송하고 여러 가지 사회사업들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제도나 묵은 관습에 묶여 교회 안에서 복음을 몰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복음을 들을 수 없는 곳이 교회가 되어버렸고 전도할 대상들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참으로 살아 있는 성령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에 민감해야 하고(계 2:7, 11, 17, 29, 3:6, 13, 22), 성령에 민감하려면 지금까지 잘못된 방법으로 믿고 있던 습관들이나 의식들을 다 버려야 합니다.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지만 그 잘못된 신앙의 틀을 깨지 않는다면 교회는 계속 죽어갈 것입니다.

 

만일 사데 교회가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도적같이 임할 것을 말씀하시는데 ‘내가 도적 같이 임하라니’라는 말은 주님의 재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데 교회를 심판하러 오시겠다는 것입니다(계 3:3).  다시 말해서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돌이키지 않으면 완전히 멸망당할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계 2:5, 16, 22-23, 3:20).  즉 회개와 경성을 촉구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무시하면 예고 없이 ‘도적 같이’ 임하여서 무서운 징계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죄가 생각이 나면 회개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주님이 속히 임해서 심판하실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경고를 롯의 사위처럼 농담으로 들지 말아야 합니다(창 19:14).

 

사실 모두가 세상적으로 살 때 혼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 주변 사람들에게 완전히 “왕따”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사데 교회 안에는 신앙의 절개를 지킨 자들이 있었는데 본문에 ‘흰 옷’이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3:4).  이것은 “칭의”를 말하는 것으로 칭의는 한번 의롭다함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이 흰 옷을 더럽히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키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계 14:4).  그래서 주님도 그들을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한다면 처음 들었던 십자가의 복음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고 바른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주변의 세속적인 문화에 물들지 않고 그들과 같이 동화되지 않고 구별된 생활을 했습니다(계 14:4).  만약에 이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세속적인 삶을 살았다면 분명히 흰옷은 더렵혀졌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흰 옷을 더럽히지 않고 산 사람들이 사데 교회 안에 얼마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극소수라고 말합니다(계 3;4).  그러시면서 흰 옷을 입은 몇 명에게 ‘합당한 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합당한 자라는 것은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들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그 이유는 흰 옷 입은 그들은 처음 들었던 복음을 기억하고 그 신앙을 끝까지 지켰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이들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은혜와 감사 그리고 회개의 눈물을 수도 없이 흘렸을 것입니다(계 21:4).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그분만을 높이고 주님을 위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에게 합당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 안에서 이기는 자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는 흰 옷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계 3:5), 이것은 칭의와 성화의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흰 옷’이란 세상 풍속에 물들지 않고 믿음대로 살았던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영광스러운 ‘세마포’으로(단 10:5, 계19:14), 환난에서 승리한 자들이 입는 옷을 말합니다(계 7:9-14).  이들은 이 세상에서 받은 치욕과 비난을 보상받고도 남을 영광을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또한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흰 옷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입고 들어갈 수 있는 예복으로(마 22:11), 신앙의 절개를 굳게 지킨 사람들과 옳은 행실 속에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엄청난 선물입니다(계 19:8).  이렇게 주님이 주시는 흰 옷은 누구나 받는 옷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옷입니다.

 

다른 하나는 생명책에 이름을 흐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계 3:5).  여기서 ‘생명책에 이름을 흐리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기는 자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만약에 이기지 못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가 있을까요? 여기에 대한 대답은 그 사람의 입술의 고백과 삶을 통해 그것을 결정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신구약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범죄 했을 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합니다(출 32:32).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누구든지 내게 범죄 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출 32:33).  이 말은 범죄 한 사람이 진실로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겔 18:31).

 

그리고 본문에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말합니다(계 3:5).  이 말을 어디서 들어보거나 읽으신 적이 있지 않나요?  신약성경에 이와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0장 32절부터 33절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이 말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인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책에 이름을 흐리지 않는다”라는 것은 주님께서 이기는 자에게 절대로 중간에 변질되거나 타락하지 않도록 끝까지 붙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튜빙겐 대학의 마이어 박사는 본문을 가지고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된 자라도 구원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께로 보내주신 자는 결코 내어 쫓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고(요 6:37),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롬 8:39).  여기에 대한 마이어 박사의 대답은 그런 말씀도 있지만 예수님을 시인하면 그분도 시인하고 예수님을 부인하면 그분도 부인한다는 말씀도 있다고 말합니다(마 10:32-33).  뒤이어 구원받은 사람이 다시 구원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으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불안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마이어 박사는 “불안한 것이 아니라 경성해야 한다.”라고 말하는데 지금 마이어 박사가 말하는 요점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독일교회 분위기 속에서 예수를 믿어도 배교하면 구원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론은 주장할만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장로교 칼빈주의 신앙은 전혀 다른 주장을 합니다.  칼빈의 5대 교리 중에 하나인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끝까지 붙들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한번 구원을 받은 사람은 끝까지 구원을 잃지 않고 지옥에 떨어질 수 없다는 교리로서 하나님의 계속적인 오래 참으심에 근거를 둡니다.  이것에 대한 성경구절은 로마서 8장38-39절, 요한복음 6장39절, 10장28-29절, 에베소서 1장13-14절, 베드로전서 1장4-5절을 인용합니다.  이렇게 상반된 주장 속에서 계시록 2-3장에서 이기는 자에 무엇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이 구원적인 용어라는 점에서 해석상의 어려움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으로 받지만(신 32:39, 삼상 2:6, 약 4:12), 동시에 그분의 주권적 은혜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신실한 반응과 순종도 마지막까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빌 2:12, 히 3:14, 18-19, 4:1-2, 6, 11).

 

◈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의 차례가 되어서 앞으로 나아갔는데 주님이 갑자기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말씀하시든지 아니면 “너 말고 다음 사람” 이라고 말씀하시면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만 칭찬을 받아야 진짜입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들부터 칭찬을 받거나 인정을 받는 것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올라온 사람들은 한결 같이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고(계 7:9), 복음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데 교회가 죽은 교회로 판명을 받은 것은 처음 들었던 복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처음 들었던 십자가의 복음을 지금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는지요?

'주일설교 > 계시록 일곱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역질 나는 교회  (2) 2014.02.24
별 볼일 없는 초라한 교회  (0) 2014.01.17
성적 방종에 빠진 교회  (0) 2013.11.27
세속주의로 물든 교회  (0) 2013.10.14
환난과 핍박을 받는 교회  (0) 2013.09.1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 감정이

그들로 하여금 신앙적인 일에 시간을 많이 사용하게 하고

예배의 외부적인 의무들에 열심히 헌신하게 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감정에 참된 신앙의 본질이 있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는 확실한 표지가 아니다.

 

최근에 사람들이 성경 읽기, 기도, 찬양, 설교듣기 등에 시간을 많이 사용한다는 사실이 그 사람들에게 있는 신앙 감정을 부정하는 주장으로 간주되어 온 것은 매우 부당하다.  참된 은혜 때문에 사람들이 그런 신앙적인 일들에서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은 성경에서도 분명히 말씀한다.  참된 은혜는 여선지자 안나에게도(눅 2:37),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런 영향을 미쳤다(행 2:46-47).  또한 은혜는 다니엘로 하여금 하루에 세 번식 엄숙하게 행하는 기도의 의무를 기쁨으로 감당하게 했다(단 6:10).  그것은 다윗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시 55:17).  은혜는 성도들로 하여금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다(시 135:3).  그리고 시편 147편1절은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라고 말씀한다.  이것이 참된 은혜의 본질이다(시 84:1-7, 10).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신앙적인 일을 외적으로 많이 행하고 그 일들에 열심히 헌신하며 그 일들에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는 것이 확실하게 은혜가 임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성향을 은혜를 입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되지 때문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는데 그들이 예배는 하나님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었다(사 1:2-15).  그것은 바리새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길게 기도하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다(눅 18:12).  거짓된 신앙은 사람들이 큰 소리를 내게 하고 진지하게 만든다(사 58:4).  영적이지 않으며 구원받지 못할 신앙도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적인 의무와 규례를 기뻐하게 만든다(사 58:2).  그것은 에스겔의 청중들(겔 33:31-32), 헤롯 왕(막 6:20), 세례 요한의 다른 청중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요 5:35).  돌밭 같은 마음을 가진 청중들도 기쁨으로 하나님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거짓된 신앙의 사람들도 신앙적인 일들을

외적으로 많은 열심을 내며 행할 수 있음을 분명히 안다.

진정 그들은 그 일에 온전히 몰두하며 자신들의 거의 모든 시간을 그 일에 바친다.

과거에 로마 교회에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다.

'신앙감정론 >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는 표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신의 구원 확신  (0) 2014.03.12
찬송을 열심히 부름  (0) 2014.01.28
감정의 체험 순서  (0) 2013.10.30
감정의 강도  (0) 2013.09.18
사랑의 피상적 표현  (0) 2013.08.08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 그분께서 우리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들은 우리들의 생각을 초월하는 방법들을 사용하십니다.  예를 들어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혹은 기도할 때나, 아니면 누군가의 간증을 통해서, 때로는 성경공부나 읽는 책을 통해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간접적인 방법도 사용하기도 하시지만 이와는 달리 구원받은 사람들을 섬기도록 보내진(히 1:14), 천사의 방문과(창 19:12-24, 행 27:23), 주님께서 중단시키기 전까지 멈출 수 없거나 인간의 노력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닌 베드로가 경험한 무아지경/황홀경/환상(행 10:10), 그리고 욥기에서 말한 것처럼(욥 33:14-18), 꿈을 통해서 자신을 증거 하시기도 합니다(마 1:20, 2:13, 20-22).  이보다 더 특이한 것이 있다면 사도 바울이 경험한 것으로 영이 끌어올려지는 것인데(겔 3;12-15, 고후 12:1-3), 이것은 오늘날 사교나 뉴에이지에서 말하는 유체이탈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주님이 사용하시는 또 다른 방법이기도 하며 더 특별한 경우가 있다면 바울이 경험한 예수님께서 실제적으로 방문하는 것입니다(행 9:1-19).  물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에 관한 명확한 지침서 같은 것은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성경은 이렇듯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예시해줍니다.

 

먼저 “꿈과 환상”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의 정상적인 방법이며(민 12:6), 이러한 일들이 신약에 와서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일상적인 것이 될 것을 말씀하셨지만(행 2:17), 오늘날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꿈과 환상에 대해 말하면 신비주의자로 혹은 귀신들린 사람으로 낙인을 찍고 신자들에게는 그런 일에 추구하거나 관여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 사람에게 꿈이나 환상을 주시지 않고 그냥 그의 마음에 성경본문을 상기시켜 주시는 데 그쳤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리아가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졌다고 생각한 요셉이 그녀와 이혼하기로 결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신 적이 있었는데(마 1:18-22), 하나님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 꿈을 사용하실 필요가 없이 그저 요셉의 마음에 이사야 7장14절만 상기시켜 주시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고 꿈을 통해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만약 꿈과 환상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내세우는 주장들이 맞다면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과 환상이 아닌 오직 성경만을 사용하셨어야 했습니다.

 

또 다른 예는 예수님이 탄생하신 후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헤롯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요셉에게 현몽하여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는데(마 2:13), 이때 하나님은 그 일을 요셉에게 전달하기 위한 완벽한 성경본문인 호세아 11장1절 말씀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꿈으로 그의 갈 길을 정확히 지시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행 11:1-10), 이 환상은 앞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구원받고 돌아올 것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왜 구약성경을 사용하시지 않고 환상을 통해서 그에게 말씀을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성경말씀 아모스 9장11-12절을 상기시켜 주기만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꿈과 환상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며 그분이 즐겨 사용하시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욥 33:13-18).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말씀 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그분의 음성에 주파수를 맞추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이고(요 10:27), 우리는 신구약 성경이 완성이 되었다고 해서 꿈과 환상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행 2:17-18).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익숙해지면 더 이상 꿈이나 환상 같은 방법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는 매우 혼탁한 세상에 살고 있기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마치 라디오 전파가 잡히지 않는 깊은 산골짜기에서 라디오를 듣는 것과 같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차리는 데는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고 가령 우리가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음성에 친숙해 질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을 논한다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일일 수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리새인처럼 말로 성령을 대적하거나 거스리지 않는 이상(마 12:32),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인식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마치 가족끼리 서로의 음성을 알 수 있듯이 주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은 그분의 음성을 알아차리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고 그분의 음성은 보편적으로 '내적 속삭임', 혹은 '느낌'을 통해 전달되기도 하지만 만약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인내한다면 그분은 매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것이고 요한복음 10장27절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점차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쾌락을 좇는 사역자들,

돈을 사랑하는 사역자들,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사역자들,

고위직을 탐하는 사역자들,

이런 사람들은 사역자 전체가

멸시를 당하도록 만드는 사람들이다.

세속적 사역자들은 기독교 세계의 악성 전염병이요,

하나님께 악취를 풍기는 사람들이다.

이런 자들 때문에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크리스톰은

“지옥 길이 기독교 사역자들의 영혼들로 포장되어 있다”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광야의 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0) 2014.03.05
소신대로 밀고 나가는 사람  (0) 2014.01.22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0) 2013.10.23
자신을 속이는 자  (0) 2013.09.11
불행한 부부  (0) 2013.07.3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