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3.11.30 신비로 남아 있는 문제
  2. 2013.11.27 성적 방종에 빠진 교회
  3. 2013.11.06 절기
  4. 2013.11.02 이단이란? 1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고(시 119:68), 그분이 창조한 만물도 보시기에 좋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창 1장), 도대체 이 세상에는 “왜 수많은 악들이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사실 악이란 넓은 의미에서 모든 사악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인간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물리적인 악”과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는 “도덕적인 악”을 들 수 있는데 이런 악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창 3:1-15, 마 15:18-20).  이 세상 안에 있는 악과 고난의 근원에 관한 질문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곤혹스럽고 어려운 질문이지만 선하고 의로운(스 9:15), 하나님을 변호해야 하고(이를 ‘신정론’(神正論)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이 세계에 있는 수많은 악에 대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정당화하려는 것으로), 고난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필수적인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유사 이래로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숫한 무고한 자들의 고통이 하늘에 사무치도록 부르짖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결코 이 질문을 외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는 선한 하나님과(합 1:13), 창조 세계를 부인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악을 가볍게 취급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악이 부정되는 곳에는 더 이상 구원도, 가치규범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고(롬 5:21), 결국엔 인간성이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먼저 구약성경에 보면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를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는(사 45:7), 말씀이 나오는데 이 구절의 주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악의 출처가 하나님이시라는 뜻으로 혹은 하나님을 악의 조성자인 것처럼 자주 언급하지만 사실 이렇게 된 이유는 원문의 ‘라’(ra)가 악과 악의 결과, 즉 악행과 그 결과를 망라하여 뜻하는데 있기 때문인데 여기서 사용된 ‘짓는다’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bara’로 이 말의 의미는 창세기 1장1절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로서 절대적 창조, 무에서 유를 만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화’와 ‘복’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다고 말하는(애 3:38), 반면에 그분은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시고(신 32:4),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보지 못하시며’(합 1:13), 시편 5편4절에서는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의 여러 본문들은 아이러니하게 악한 일에도 하나님의 협력의 역사가 있음을 증거 하지만(삼하 16:11, 왕상 22:20-23), 또 다른 한편 그분은 악을 미워하시고(호 9:15), 악의 조성자가 아니시며(욥 34:10-12), 악의 조성자가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잠 8:7).

 

초기 교회 시대의 이단 마르시온은 이 구절을(사 45:7), 근거로 해서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과는 다르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칼빈은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미치광이들은 악이란 말을 놓고 왜곡하여 마치 하나님이 악을 만드신 분, 즉 죄를 만드신 분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사야의 본절을 얼마나 어리석게 오용하는지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심판에 속하는 재앙의 조성자일뿐 범죄에 속하는 악의 조성자는 아니라는 통상적인 구분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면서 결론짓기를 “하나님만이 홀로 모든 사건의 조성자이시다”라고 합니다.  칼빈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악의 기원의 문제는 기독교가 당면한 최대의 난제이며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악 같은 것을 허용하셨는지에 대해 성경은 합리적으로 답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Heinrich Ott는 이 세계 안의 악의 근원에 관한 질문에 대해 “신학적 한계의 질문으로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G. Gutierrez는 『On Job: God-Talk and the Suffering of the Innocent』에서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악을 허용하신 하나님은 결국 도덕적으로 악한 분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악의 기원에 관해 질문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유와 은혜를 인간의 신학적 개념 안에 가둘 수 없는 이유는 그분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그 지식에서 작용되는 논리는 결국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결과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제한될 수 없는 분으로(롬 11:33-34, 고전 1:25),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고(사 55:8), 하나님은 자신의 행동을 인간처럼 일일이 변명하지 않으시며(욥 13:6),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렘 32:19).  Herman Bavinck는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악을 사용하시면서도 그의 자녀들에게는 절대로 악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을 보이기 위해 자신은 예리한 칼을 사용하면서 자녀에게는 칼을 만지지 못하게 하는 부모의 예를 들었는데 비록 하나님께서 악의 조성자는 아니시지만 그 어떤 재난도 그분의 주권적 뜻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욥 1-2장, 암 3:6), 만약 우리가 이 상충적인 양 진리를 무리하게 조화시키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을 침범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과 죄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다”라고 한 Louis Berkhof의 말에 동의하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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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디라 교회가 설립된 과정은 두 가지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나는 두아디라 지역에서 비단 장사를 하는 루디아라는 여자 상인이 빌립보에서 사도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귀향해서 설립된 교회일 가능성과(행 16:14), 다른 하나는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 있는 두란노 서원에서 2년간 복음을 강론할 때 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주의 말씀을 들었는데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던 소아시아 사람들 가운데 두아디라 사람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를 설립했을 가능성입니다(행 19:10).  이렇게 설립된 두아디라 교회는 일곱 도시 가운데 가장 작은 도시에 있는 교회로서 일곱 교회에 보낸 메시지 중 가장 긴 메시지를 받았고 버가모 교회보다 더 깊은 죄악을 빠진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나신 모습은 버가모 교회에 나타난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데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모습이었습니다(계2:12).  이렇게 양날 선 칼을 들고 나타나신 것은 돈에 탐나서 모압 왕 발락에게 팔려가는 거짓 선지자를 죽이려는 천사의 모습과 같고(민 22:21-30),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회복할 가능성이 있기에 잘못된 부분을 잘라내고 수술해서 다시 살리겠다는 의도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버가모 교회보다 훨씬 더 절망적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계시록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것으로 당시 제우신의 아들 “아폴로”가 두아디라의 주신(主神)으로 숭배 받고 있었기 때문에 참 하나님의 아들은 아폴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계 2:18).

 

본문에 ‘눈이 불꽃같고’라는 말은 인간의 중심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의 통찰력을 의미하며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발은 빛난 주석 같고’라는 말은(계 2:18), 회개치 않는 죄인들을 발로 밟듯 무서운 심판하시겠다는 것으로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평화의 복음을 전하던 발이지만 교회를 심판하실 때는 포도주 틀을 밟듯 무서운 심판의 발인 것을 보여줍니다(계 19:15).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심판하실 때 곡식이 가득 실은 수레가 누르는 것 같이 하실 것이라고 했는데(암 2:13), 짐이 가득 실은 짐차에 깔리면 어떻게 됩니까?  거의 초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에 벌겋게 달군 주석 같은 발로 한번 밝히면 어떻게 됩니까?  아마 뼈가 으스러지듯이 이런 식으로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책망하시기 전에 먼저 칭찬을 하시는데 그것은 두아디라 교회에 선행의 실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를 위해 산 삶의 흔적이 있었고 무엇인가 열심히 일을 하는 교회로 가만히 있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것을 ‘사업, 사랑, 믿음, 섬김, 인내’라고 말합니다(계 2:19).  처음 시작은 별 볼일이 없이 시작한 교회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선교와 구제 사업을 많이 하고 삶의 열매도 풍성하게 맺힌 교회로 성장을 한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려서 책망을 받았지만 두아디라 교회는 그들이 갖지 않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두아디라 교회에서 하는 일들은 모두가 좋은 동기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열매가 많이 맺힌 교회라면 책망을 받지 말아야 되는데 다섯 가지 좋은 일을 하고도 한 가지 죄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무서운 책망을 받았습니다(계 2:20-21).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알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거룩하고 온전한 삶을 살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마 5:48, 벧전 1:15).  마치 우리가 낳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며 바른 삶을 살기 원하듯 말입니다(엡 6:1).  하지만 두아디라 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속은 죄악 된 생활로 물들어 버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눈에는 바리새인들처럼 겉과 속이 다른 교회로 보였던 것입니다(마 23장).

 

◈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많은 사업을 하고 삶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힌 이 교회를 음행에 빠지도록 만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 선지자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계 2:20). 다시 말해서 교회가 이단적인 교리를 용납하고 수용해서 문제가 생긴 것으로 자칭 선지자 이세벨의 잘못된 가르침과 함께 세상의 더럽고 음란한 풍조들이 교회 안으로 밀려들어 왔습니다.  즉 교회의 도덕적 제방을 무너뜨린 장본인이 바로 이세벨이라고 부르는 거짓 선지자인데 이 여자를 용납하고 받아들이면서부터 두아디라 교회는 음행으로 몸살을 앓게 되고 주님으로부터 무서운 책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교회의 문제는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부적인 이세벨의 더러운 음행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책임이 다 이세벨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초대 교회에 있었던 상황을 보면 대단히 음란한 사회인 것을 알 수가 있는데 로마서 l장만 보아도 수많은 성적인 타락과 동성애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아디라 교인들이 처음부터 정결하고 순결한 생활을 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분명이 그들 중에 예수를 믿기 전에 성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또 개인적으로 늘 그런 유혹에 노출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다 타락한 마귀가(계 12:9), 이것을 모를 리가 있을까요?(벧전 5:8).  사악한 마귀는 성적으로 약한 사람들이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는 것을 나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세벨을 도구로 사용해서 두아디라 교회가 음행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사실 잘못된 생활에 빠졌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난 후에 더 이상 그런 생활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싫어하시고 또 교회는 그런 생활을 묵인해 주거나 받아주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교회는 아주 든든한 방파제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추악하고 더러운 죄악 가운데 산 사람이라도 일단 주님께로 돌아와서 회개하면 용서는 받지만 신앙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서도 다시 죄악 속에 살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두아디라 교회는 아직 세상의 죄악으로부터 오염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에 도덕적인 방파제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린 일이 생긴 것은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미끼를 던졌을 때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반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간음을 저지를 수 없듯이 누군가 반응을 한 사람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잠 6:28-29).

 

그렇다면 이렇게 교회를 안으로 썩게 만든 이세벨이라는 여자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물론 여기에 나오는 이세벨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보면 적어도 800년의 간격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여자가 아닌 것만은 사실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세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많은 학설이 있는데 두아디라 교회 감독의 부인이 아니면 그 지역 권력자의 부인, 혹은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크게 행사한 여자였는지 모릅니다.  확실히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두아디라 교회 공동체를 의도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해서 들어왔고 그 목적을 위해서는 몸을 무기로 삼아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않았던 음란한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구약에 나오는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세벨은 시돈 왕의 딸로서 바알의 선지자 사명을 가지고 시집을 왔고 이스라엘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생각했습니다(왕상 16:31).  그래서 가나안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이스라엘의 진영에 퍼뜨린 여자로서 이스라엘 공동체에 가장 큰 타격과 피해를 준 장본인이었습니다(왕상 16:31-33).  그 외에도 이세벨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왕상 18:4), 엘리야까지 죽이려다 미수에 그치고(왕상 19:2), 무죄한 백성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거짓 증인을 세워 강제로 죽였던 잔인하면서도(왕상 21:10), 음행과 술수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구약성경에서는 가장 악녀였습니다(왕하 9:22).  이와 마찬가지로 본문에 나오는 이세벨도 교회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게 하고 점점 죄악과 타협하도록 유혹한 여자였기에 구약의 이세벨과 같은 이름으로 부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세벨이 두아디라 교회 안에서 유혹한 사람들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신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주의 종들로 본문에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2:20).  여기서 내 종들이란 말은 오늘날 주의 종들인 목사들을 말하는데 이세벨이 얼마나 교묘하고 사악한 여자인지 평신도를 유혹한 것이 아니라 목회자들을 유혹해서 교회를 깨트리기 위해 얼굴과 육체를 무기로 삼고 교회로 들어온 것입니다.  짐작하건데 이 여자가 주의 종들을 꾀어서 음행을 하게 할 정도라면 대단히 매력적이고 지적인 여성으로서 어느 남자라도 이 여자를 한번 보면 반할 정도로 매혹적인 여자였을 것입니다.  거기에다 영적인 은사까지 가진 사람으로 행사하며 주의 종들의 영혼과 육체를 타락시켰습니다.  결국 교회 전체를 말아먹은 여자였습니다.

 

사실 발람은 속이기만 했지 이렇게 인격적으로 지배하지는 못했고 이 여자는 완전히 사람들을 호려서 자기 품에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었는데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도 발람의 영향은 일시적이었지만 이세벨의 영향은 지속적이어서 결국 이스라엘을 망하게 만들고 유다를 망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유 11절).  그래서 거짓 선지자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면 진리에 있어 혼란만 주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육체까지 지배해 결국에는 망할 때까지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를 잘못 만나면 일시적으로 타락했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지만 잘못된 여자를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거의 돌아오지 못합니다.  둘 다 망할 때까지 떨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남자를 잘못 만나서 신세를 망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골계가 아닌 “칠계”를(출 20:14), 조심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성품은 모든 인간들이 멸망을 당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벧전 3:9).  한 영혼이라도 심판을 받지 않도록 반드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이세벨과 그와 간음한 모든 자들에게 회개할 것을 말씀하시는데(계 2:22-23), 여기서 ‘회개하라’는 말씀은 죄 지은 모든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세벨과 함께 음행에 빠진 사람들이 회개를 했습니까?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그들은 회개하거나 죄악된 삶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계 2:21).  성경에 보면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아서 망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예를 들면 바로 왕(출 9:30), 홉니와 비느하스(삼상 2:25), 아마샤(대하 25:16), 므낫세(대하 33:10), 아몬(대하 33:23), 시드기야(대하 36:12), 벨사살(단 5:22-23), 신약에 와서는 부자청년을 들 수가 있습니다(마 19:22).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서 신앙의 순결을 팔아먹을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도 추하게 생각하는 더러운 죄에 어떻게 빠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그 누구도 안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본성은 거룩한 방향보다는 더럽고 추악한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막 7:21-23), 누구든지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넘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평소에 경건의 훈련을 쌓지 않고 음행과 우상숭배가 얼마나 무섭고 치명적인 것인지를 늘 조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넘어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마음에 기억을 해야 하는 것은 “나는 천사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고전 10:12).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잠 28:26).

 

그러므로 사람들마다 자기 약점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런 약점이 노출될 수 있는 데는 근처도 가지 말아야 하겠지만 다른 사람을 그럴만한 분위기로 이끌지도 말아야 합니다(고전 15:33).  누구든지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아예 미리부터 차단을 시켜버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노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아예 장난삼아 카드나 화투를 손에 잡지도 말고 눈으로 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도박으로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또 이성에 유달리 약한 사람들은 아예 다른 여자와 일대일 만나는 기회조차 갖지 말아야 하고(딤전 5:2), 술에 약한 사람은 술 근처에 가지도 말고 술친구와 사귀지도 말아야 합니다(잠 23:31).  그래서 우선적으로 이런 유혹에 노출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며 세상에는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른 실수는 회복될 가능성이 있지만 성적인 실수나 범죄는 치명적이기 때문에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한순간에 날려 버립니다(잠 6:32-35).  우리는 그것을 뉴스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서 이미 많이 접했을 것입니다.  여자나 남자가 간음죄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정욕은 살아있고 유혹에 넘어갈 가능성을 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한 순간에 넘어질지 모릅니다(고전 10:12).  그래서 사탄은 두아디라 지방에서 특별히 뛰어나고 매력적인 여자를 사용해서 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멍청한 주의 종들을 찍어 넘어뜨린 것입니다.  사탄은 항상 방심하는 사람을 공격하지 정신을 차리고 날마다 주님 앞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주님의 은혜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다고 매순간 고백하는 사람들은 공격하지 못합니다.

 

◈ 본문에 ‘침상에 던진다’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2:22).  이 말을 어렵게 해석하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이 침상에서 범죄를 했으니까 다시는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건강으로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음란하게 즐겨 사용했던 침상이 고통의 병상으로 변한 것이고 죽을 때까지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그 병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면서 일평생 자리에 드러눕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는 말씀처럼(계 2:23), 침상에서 범죄를 했으니까 침상에서 오래 누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을 죽이리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세벨의 잘못된 가르침에 완전히 빠진 사람들로 그 여자가 낳은 영적자녀들로 그들의 신앙도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속은 사람들만 다 망하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주어진 기간 동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시키다가 결국에는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마치 탈레반의 자살 특공대처럼 맡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무모하게 죽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여자에게 걸려든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데 아름다운 가정, 좋았던 교우 관계와 추억들이 다 파괴되고 비참하게 끝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너무 좋아하거나 가까이 하면 안 되고 너무 잘해 주려고 하면 결국 이세벨의 그물에 걸려들어 신세를 망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적절한 것이 좋고 가능한 욕을 조금 얻어먹더라도 자기 자신을 굳게 지키며 사는 것이 안전합니다(잠 4:23).  왜냐하면 자기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침상에 드러눕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한 번 드러눕게 만드시면 다시는 일어날 가망성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 안에 신종 이세벨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두아디라 교회는 겉으로 본다면 전혀 문제가 없는 교회이고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열매를 많이 맺힌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들어 와서 내부를 살펴보면 음행에 빠진 교회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겉과 속이 다른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음행에 빠져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많지는 않지만 이세벨의 잘못된 가르침인 사탄의 깊은 것에 빠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계 2:24),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성경은 “알곡”이라고 부릅니다(마 3:12).  다시 말해서 두아디라 교회 안에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들이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엘리야가 자기 혼자만 남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어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신실한 자기 백성 칠천 명이 남아 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교회 안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왕상 19:18).

 

여기서 ‘사탄의 깊은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깊은 것과는(고전 2:10), 반대되는 말로서 이세벨의 이단적인 가르침을 말하는데 이 용어는 주로 영지주의자들이 사용했던 말로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자신들만의 어떤 특별한 가르침이나 새로운 깨달음이 있다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어떤 영적인 신비한 지식이 있다고 말을 하지만 그것이 바로 사탄의 깊은 것인 이세벨의 잘못된 이단교리를 말합니다. 이 가르침 안에는 성적인 방종과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단들에게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교인들 중에 평범한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엇인가 색다르고 특별한 가르침이 있다고 하면 무조건 배우려는 사람들과 진리의 말씀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이러한 사람들은 마귀의 밥이 될 가능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 전혀 동조하지 않고 말씀 하나만을 굳게 잡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두아디라 교인들 중에 다수가 아닌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사탄의 깊은 것을 배우기 위해 이교회 저교회 무리처럼 방황하지 않았습니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심지가 굳건한 사람들입니다(사 26:3).  본문에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시는데(계 2:25), 이것은 한번 잡은 것은 사생결단하여 놓치지 말고 꽉 잡을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여러 가지 부족하여 남들처럼 뛰어나지는 못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것, 진리의 말씀되신 예수님만을 굳게 잡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히 3:14).  그러시면서 주님은 이들에게 ‘다른 짐을 지울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계 2:24).  이것은 이들에게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 복음을 굳게 잡은 그들을 칭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주님은 복음을 끝까지 잘 지키는 자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시는데(계 2:26-29), 하나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주님이 오실 때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이긴 자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으로(마 19:28), 메시야가 오셔서 왕 노릇할 때 복음을 잘 지켰던 자들도 같이 왕 노릇한다는 것입니다(계 20:6).  다른 하나는 ‘새벽별을 주리라’고 말씀하시는데 계시록 22장16절에 보면 예수님을 광명한 새벽별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의미는 어두움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같이 동행해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꿈에도 그리던 천국입니다.  물론 이 지상에 살면서도 주의 자녀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는 권세와(눅 10:19), 주님이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실 것을 이미 오래전에 약속했지만 말입니다(마 28:20).

 

◈ 이렇게 두아디라 교회에서 앞뒤가 꽉 막힌 것처럼 융통성이 없이 복음만을 굳게 잡은 자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고리타분하게 한다고 미워하며 무시했고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진리의 말씀만을 굳게 잡은 자들이 결국 승리를 한 것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만을 죽기까지 굳게 붙잡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소망이 없는 세상을 사랑해서 간음죄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약 4:4).  만약 두아디라 교회처럼 여러 가지 교회 사업을 많이 하고 열매를 맺혔더라도 세상 풍조를 받아들이고 신앙의 순결을 팔아먹는다면 주님이 주시는 권세와 새벽별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계 14:4).  오늘날 이 시대는 자신의 신앙의 순결을 굳게 지켜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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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연구자료 2013. 11. 6. 08:55

영어로 절기를 나타내는 ‘Feast'라는 말은 사적인 잔치나 공적인 잔치를 구별하지 아니하고 영어 성경에서 모두 적용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전자에 대하여는〈미쉬테〉를, 후자에 대하여는〈모엗〉과〈학〉이란 두 원어를 각기 적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특히〈학〉이라는 말은 3대 연중 순례절기, 즉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에만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의 동사형은 “순례를 하다”를 의미하는데 순례에는 행진, 춤, 축제, 그리고 때로는 음주가 포함된다.  그리고〈모엗〉은 이스라엘 백성이 공동으로 지키기로 정한 모든 때를 의미하므로 주로 ‘정한 절기’(appointed feasts)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학〉으로 언급된 이스라엘의 거룩한 절기(축제일)는 종교의 일부로 즐기는 잔치였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축제일을 지키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즐거이 놀며 기념하는 것을 뜻한다(신 16:14, 삿 21:21, 시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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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이란?

논쟁거리/이단 2013. 11. 2. 08:06

오늘날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다른 여러 교파의 사람들에 대해 '비성경적이다', '거짓교사다' 혹은 '종교다윈주의자다' 더 심하면 '이단이다' 라고 까지 하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만이 가진 신앙과 신학이 성경과 가장 근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YWAM의 창설자인 로렌 커닝햄에 대해서 말할 때에 성경이 완성된 이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이단적인 가르침이라고 말하며, 존 파이퍼와 인터뷰한 새들백 교회의 릭 웨렌에 대해서는 종교다윈주의자이며, 제임스 패커는 유진 피터슨의 성경번역본 『The Message』를 극찬했다는 이유로 에큐메니칼 사상을 지닌 자로, 존 스토트는 “영혼 멸절설”을 말했다고 해서 비성경적인 인물로, 그 외 A.W. 토저, 빌 브라이트, 등등 여기서 다 열거할 수는 없을 정도의 복음주의자들을 경계의 대상이나 요주의 인물 아니면 거짓 선생으로 단정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핵심 인물인 칼빈이 제네바를 개혁하기 위해 세르베투스를 화형 시킨 사건이나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론을 제시하지 않고 침묵한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어떤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칼빈에게 영향을 받아서인지 교회를 개혁한다는 이유 아래 돈키호테처럼 쓸데없는 논쟁의 칼을 휘둘러 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기도 받고 쓰러지면 '이단!', 예언과 방언을 하면 '사이비!', 환상을 보고 꿈을 꾸면 '신비주의자!', 육체의 질병을 고치면 용한 무당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기에 자살한 목사의 입에서 '양복 입은 무당'이라는 균형 잡히지 않은 반쪽짜리 설교가 나왔는지 모릅니다.  분명 성경은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하고(요일 4:1), 분별하여(고전 14:29),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했는데(살전 5:21), 무조건 칼빈주의 신앙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바리새인처럼 다른 신앙을 적대시 하는 것은 그다지 옳은 행동은 아니라고 봅니다(막 9: 38-40).  누가복음에 보면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 바리새인은 자신을 의롭게 여기고 상대방 세리에 대해서 멸시를 하는데 이 바리새인이 착각한 것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른 것으로 생각했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으로 세리를 보니까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눅 18:11).  그러나 결과는 자신의 신앙과 신학에 자부심을 가졌던 바리새인은 예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고 신학과 관계없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한 세리는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입니다(눅 18:14).  마찬가지로 자신이 가진 신앙만이 가장 성경적이고 다른 형제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잘못되었다고 논쟁의 칼을 휘둘러 댄다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그분께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롬 2:1-3).

 

사실 교회를 분열시켰던 사람들도 자신들의 거짓된 가르침과(딤후 2:17-18), 이단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성령의 증거에 열렬히 호소하는 경우가 있는데, 만약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신앙과 신학을 제시할 경우 우리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영들을 시험하는 것”입니다(요일 4:1).  왜냐하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종교들과 이단/사이비들이 범람해 왔으며 늘 거짓 선생들이 하나님의 계시인 진리를 모방해 왔기 때문입니다(갈 1:6-8, 벧후 2:1).  최근에 우리 주위에서 이단적인 행태와 그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 세대에도 그런 시대적인 흐름에서 결코 예외일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고, 이런 문제를 놓고 H. Wayne House는 이단에 대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역사적 기독교에 모순되는 중심 교의를 한 가지 혹은 그 이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라고 정의를 내렸는데, 사실 초대교회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이단들이 없었던 때는 없었으며 이단들은 때로 교회 안에서 생겨 누룩처럼 퍼져 나가기도 하고(행 20:30), 어떤 경우에는 밖에 있는 이교적인 사상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벧후 2:1), 진리의 일부를 왜곡시키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예수님은 이러한 이단들이 말세에는 더욱 횡행하여 신자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경고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24:5, 요일 2:18).

 

그러나 이러한 것을 빌미로 해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교회에서 유익한(고전 12:7), ‘예언’과 ‘방언’(고전 13:8-13), 성령의 놀라운 영광에 압도되어 쓰러지는 것을 가지고(겔 1:18, 단 10:8-9, 마 17:6, 행 9:4), 비성경적이거나 신비주의, 더 심하면 이단이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기도 받고 쓰러지는 경우 타락한 인간 조건에서 항상 찾아볼 수 있는 복합적인 심리적 현상을 수반하기 때문에 눈에 거슬리게 보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인 사라가 일주일 이상 천국의 영광(황홀경)을 체험한 것에 대해 간증을 하면서『균형 잡힌 부흥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일들이 광신주의적인 것이며 정신이 돌아서 생긴 일이라면 내 머리가 더욱 이런 정신병에 걸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만일 이것이 미친 것이라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온유하고 아름다고 영광스럽게 미치기를 기도합니다.”  에드워즈는 사라가 체험한 황홀경에 대해 비성경적이지 않고 이단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역시 에드워즈에 대해 그는 냉철하고 합리적이며 지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에 대해 히스테리에 기만당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 있게 말했는데, 그렇다면 오늘날 이러한 에드워즈를 보고 이단이거나 비성경적, 혹은 성경에서 벗어난 요주의 인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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