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각성과 죄에 대한 깨달음이 있은 후에

어떤 일정한 순서를 따라 위로와 기쁨이 뒤따른다는 사실로는

그 감정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매우 두 가지 다른 상태에 있게 된다.  처음에는 정죄의 상태이고 다음에는 칭의와 축복의 상태다.  사람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지성과 이성에 맞게 다루신다.  그래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감각적으로 자각할 수 있도록 이 두 상태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일치하며 또한 합당한 듯하다.  먼저 그들은 정죄의 상태 속에 있는 자신들을 감각적으로 체험하여 자신들이 심각한 재난과 두려운 비참함 속에 있다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  이어서 그들은 구원과 행복의 상태를 체험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먼저 그들이 처해 있는 절대적으로 극심한 빈곤의 상태를 체험하고 나서 그리스도의 충분성과 그리스도를 통해 다가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시기 전에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시는 것이 사람을 다루는 하나님의 방식이다(출 2:23, 5:19, 신 8:2, 16, 눅 8:43-44, 마 15:26, 고후 1:8-10).

 

하나님께서 옛 성도들에게 자신을 특별히 나타내신 사건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분께서 일반적으로 먼저 자신을 두려운 분으로 나타내신 후에 위로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아브라함(창 15:12-13), 모세(출 3:7), 엘리야(왕상 19장), 다니엘(단 10장), 사도 요한((계 1장)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교회를 다루시는 것처럼 성도 개개인을 두려운 천둥과 번개 속에서 율법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교회를 몽학 선생 아래 두어서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시온 산에서 나오는 기쁨 복음의 소리로 교회를 위로하시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의 죄와 비참에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전에 그들의 크고 두려운 죄악과 그것 때문에 자신들이 비참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방식이라면 사람들에게 종종 마음에 큰 고통과 근심이 생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하다(행 2:38, 16:30).

 

다른 한편으로는 위로와 기쁨이 큰 공포와 지옥에 대한 놀라운 두려움에 뒤이어 왔다는 것이 반드시 그 위로와 기쁨이 바른 것이라는 증거는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양심의 죄를 자각할 때 종종 공포감이 뒤따르기는 하지만 죄는 공포감을 느꼈다고 깨닫는 것이 아니며 공포감은 종종 다른 원인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성령이 죄를 깨닫게 하고 각성케 하셔서 큰 두려움을 느꼈다 하더라도 그들의 두려움이 반드시 참된 위로를 낳을 것이라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이 사실은 거짓 겸비함과 거짓된 굴복과 가짜 위로가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충분히 입증된다.  사울은 비록 위대한 왕이었지만 이 교만한 왕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그가 미워했던 신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서도(삼상 24:16, 26:21), 여전히 계속해서 그에게 원수로 행했다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각하고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여전히 하나님께 원수로 남아 있으며 끝까지 계속 그렇게 남을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한다.

경험상 우리는 최고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과 그리스도인들의 회심 과정에서

성령을 헤아릴 수 없고 추적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령이 영혼 안에서 일하시는 단계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께 맡겨 두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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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가치관에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판단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달란트를 영원히 거두어 가시기 전에

우리는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렇게 해야 할 때이다.

과거 베를린에서

사람들이 러시아의 저주스러운 압제에서

탈출하기 위해 굴을 팠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원자탄의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반드시 악을 심판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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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보통 계시록에서 예수님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기 전까지 교회라면 다 신앙이 좋고 순수하며 그것 자체가 바로 천국의 문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광야 같은 세상에 살면서 개인의 신앙을 잘 지키는 것은 어렵고 사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면 바로 교회 전체가 신앙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의 믿음이 다 똑같지 않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한지를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착각하여 그릇된 길인 줄 모르고 따라가게 되는데 마치 갈라디아교회처럼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칠 수 있습니다(갈 3:1-3).

 

신앙생활하기에는 에베소 교회가 서머나 교회보다 월등하게 좋아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교인 한명 한명이 신앙이 좋았고 그들은 열심히 수고하고 참고 인내할 줄 아는 자들이며 쉽게 아무 것이나 호락호락 받아들이는 가벼운 교인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 전체적으로 보면 어떠합니까?  모두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의 능력과 감사와 감격을 잃어버린 병든 교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예배를 드리고 열심히 섬기고 인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이상 영적인 싸움을 하지 않고 이미 스스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첫 사랑이 식어버린 종교와 제도에 얽매인 교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촛대를 그 곳에서 옮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계 2:5).

 

반면에 서머나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하기에 너무나 어려운 교회인 것 같습니다.  이 교회는 아직도 한창 전투중인 교회였는데 교인들 간의 분쟁이 아니라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는 유대인들의 박해가 너무나 심해서 환난과 궁핍한 가운데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이 교회를 칭찬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 전투하는 살아있는 교회였기 때문에 주님이 보시기에 평안한 교회보다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영적으로 싸우는 이 교회가 더 부요한 교회로 보신 것입니다.  비록 신자 한 명 한 명이 어려워 보이지만 교회에는 말씀이 살아있고 기도가 살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그래도 주님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킨 교회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쩌면 한국과 한인교회와 가장 비슷한 교회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바로 세속주의로 물든 버가모 교회입니다.

 

◈ 버가모 지역은 황제숭배가 일 년 내내 행해지는 곳으로 로마황제 “가이사”를 신격화 시켜서 백성들로 하여금 “주님”이라고 부르도록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마치 북한이 죽은 김일성의 동상을 세워 놓고 절하며 섬기듯이 말입니다.  본문에 ‘사단의 위’라는 말이 나오는데(계 2:13), 이 말은 버가모 지역은 사단이 권세를 휘두르는 총본부가 있는 곳으로 쉬운 말로 말한다면 영적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일어나는 지역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항하는 강한 세력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로마황제가 주님이다”와 “그리스도가 주님이다”라는 주장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역이었습니다.  로마의 황제숭배가 서쪽 센터라면 버가모는 황제숭배의 동쪽 센터에 버가모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버가모 교인들은 처음부터 신앙생활을 열심히 충성스럽게 잘했던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계속 들어가자 결국 예수님을 “주”로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황제숭배가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생기자 곧 바로 영적전쟁이 일어났습니다(엡 6:10-13).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사단과의 정면충돌이 생긴 것입니다(고후 10:4).  이것은 이미 오래 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이고(마 10:34-36), 마치 에베소 교회에 십자가의 복음이 들어가서 그들이 섬겼던 미신적인 것들을 다 불태워 버린 것처럼(행 19장), 버가모 교회가 복음을 받아들이자 가장 먼저 거부한 것이 로마 황제숭배였습니다.  그리고 충성된 증인 ‘안디바’라는 순교자가 나올 정도로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것입니다(계 2:13).

 

본문에 보면 ‘네가 어디서 사는 것을 아노니’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2:13).  이 말은 버가모 교인들이 사는 곳은 로마 황제숭배를 피할 수 없는 곳인 것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버가모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 칭찬을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사탄의 세력이 강한 곳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켰고 이렇게 주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켰다는 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고 그분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안디바’라는 충성된 증인이 죽임을 당하는 현실 속에서 주님께 대한 신앙의 절개를 지킨 것입니다.  여기서 ‘안디바’는 어떤 사람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신자들 중에서 우상숭배의 희생자가 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버가모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은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버가모 교회는 사탄의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목숨을 내놓고 순교자를 배출할 정도로 신앙을 지켰던 믿음이 대단한 교회였습니다.  이만하면 예수님은 칭찬을 하시고 다른 말씀을 하시지 말아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이 교회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주님은 이 교회에 대한 칭찬과 책망을 구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계 2:14).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얼마나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문제에 대해 대충 얼버무려 넘어가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버가모 교회가 우상숭배에 대한 박해를 잘 견디어 내어 칭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책망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부의 공격이 아닌 내부로 파고 들어오는 사탄의 유혹을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본문은 버가모 교회가 책망 받은 일에 대해 두 가지를 제시하는데 하나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계 2:14).  이것은 버가모 교회 안에는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일부 교인들 중에 발람의 교훈을 굳게 잡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계 2:13).  그런데도 교회 전체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교훈에 대해서 책망을 하거나 권면을 주는 사람들이 없었고 그냥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마치 고린도 교회 안에 음행을 저지른 자에 대해서 소문이 날까봐 교회 전체가 쉬쉬하며 꿀 먹은 벙어리 같이 묵인한 것처럼 말입니다(고전 5장).  만약에 오늘날도 이러한 죄악들을 묵인하고 용납한다면 교회로서 이미 기능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드시 “치리”가 있어야 합니다(마 18:15-17).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조심하고 나중에 주님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딤전 5:20).  물론 죄를 범한 사람을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을 말할 것도 없지만 말입니다(고후 2:6-8).

 

본문에 나오는 발람은 히브리인이 아닌 거짓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행을 부추겼던 사람으로(민 22-25장), 돈 때문에 발락에게 자신의 예언을 팔아먹은 대표적인 파렴치한 선지자였습니다(벧후 2:15-16).  히브리인이 아니면서 하나님의 영감이 임한 선지자이니까 얼마나 귀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 사십년 간 훈련을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가장 무서운 적이 있었다면 그가 바로 발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심한 해를 이스라엘 백성들에 끼쳤는가 하면 그의 계책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의 멸망당할 뻔했고 결국 염병이 퍼졌는데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의 열정이 하나님의 진노를 겨우 막았던 것입니다(민 25:7-9).

 

사건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숫자가 많았다는 것과 가나안의 많은 왕들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지자 발람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모압 왕의 부름을 받고 발람은 당연히 가지 말아야 하는데 돈에 눈이 어두워진 그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어겨가며 발락에게 가고 맙니다.  그는 길을 갈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있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타고 있던 나귀는 그 사자를 보고 두려워 앞으로 가지 않으려 하기에 발람이 채찍으로 나귀를 마구 때리자 나귀가 “왜 자꾸 때리느냐?”고 말을 하며 발람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나 돈에 미친 발람은 나귀가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결국 모압 왕에게로 갔고 그가 시키는 대로 제단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저주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하여 그 입을 틀어막고 저주 대신에 축복이 나오게 합니다.  그래도 돈에 팔린 거짓 선지자 발람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이 짓을 계속 시도합니다.  결국 세 번을 시도하다가 실패하니까 나중에 발락에게 한 가지 계책을 알려주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여자들과 간음을 하도록 하는 무서운 계략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염병이 돌아서 이스라엘 자손 이만 사천 명이 하루아침에 죽어 나갑니다.  다시 말해서 발람은 자기에게 하나님의 영감이 임하는 것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고 돈에 대한 욕심에 팔려 결국 이스라엘 앞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올무를 놓아서 그들을 파멸로 이끈 장본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민 22-25장).

 

이러한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가 버가모 교회 안에 많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와 간음을 즐기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우상숭배와 간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우상숭배이며 영적간음이라는 것입니다(약 4:4).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만큼은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마 10:37).  만약에 주님보다 더 관심을 끌고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탐심이고 우상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되 특히 우상숭배인 탐심을 멀리해야 합니다(골 3:5-6).

 

◈ 다른 하나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계 2:15).  이들은 무율법주의자들로서 자신들 나름대로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하지만 방종한 삶을 사는 사람들로 이들은 “지금은 율법이 필요 없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은 은혜의 시대이고 복음의 시대이기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구원파 교리와 유사하고 간단하게 말한다면 “그노시스 사상”을 가진 이단입니다.  그노시스 사상이란 사람의 육체는 근본적으로 죄 되고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이거와 상관없이 영혼은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사상으로 율법폐기론을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만 깨끗하면 되고 육체는 더러워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혼과 육체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고후 7:1).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만(엡 2:8),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대로 살아야 함을 성경은 똑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요 14:21).  이것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눅 6:46).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라면 세상에서 아름다운 열매도 맺혀야 하는데(마 4:7-9),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요 15:8).  만약에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살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마 7:19-21).  지금 버가모 교회의 문제는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방종한 생활로 세상 향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이란 오늘날 세상풍속을 따라가는 세속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실 마귀가 버가모 교회를 심하게 핍박할 때는 그들은 순교를 각오하면서 신앙을 지켰고 외부로부터 오는 핍박과 환난을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잘 견디어 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마귀가 전술을 바꾸어서 세상 것으로 유혹을 할 때는 쉽게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즉 내부로부터 지속적으로 파고 들어오는 세상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은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고 즐기며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정욕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요일 2:15).  이 세상이 주는 편안함과 쾌락 그리고 안락한 삶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마귀가 속여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다 갉아 먹어버렸습니다.  겉으로는 순교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속은 이미 마귀가 뱀처럼 좌리를 틀고 앉아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겉만 교회이지 속은 이미 곪을 때로 곪아 터진 세속주의로 물든 교회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에게 무슨 경고를 하십니까?(계 2:16).  먼저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회개하라는 말은 잘못된 삶의 방식을 완전히 뜯어 고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한번 그들에게 기회를 주시면서 돌이킬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사실 에베소 교회는 뜨거운 열정은 없지만 그래도 쟁쟁한 목회자들인 바울을 비롯해서 성경학자 아볼로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디모데, 사도요한이 목회를 해서 그런지 이단 니골라당의 교훈을 철저하게 대적하여 물리쳤고 반면에 버가모 교회는 순교의 열정과 뜨거움은 있었지만 말씀으로 잘 무장되어 있지 않아 이단적인 교리가 틈을 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만약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가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뜨거움으로 균형 잡히게 잘 무장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지금 주님이 버가모 교회에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 알 수 있는데 그분은 양날이 날카로운 칼을 들고 찾아오셨습니다(계 2:12).  그리고 주님은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계 2:16).  그렇다면 충성된 증인 ‘안디바’라는 사람이 순교할 정도의 교회에 주님이 무엇 때문에 칼을 들고 나타나셨느냐는 것입니다.  혹시 버가모 교회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닌가요?  여기서 ‘그들’이란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말씀대로 살지 않는 지도자들과 교인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시고 이 교회를 치시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버가모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들, 즉 성경에서 벗어난 것들을 진리의 검으로 대수술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 여기서 발람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 필요가 있는데 이 사람은 그렇게도 “돈, 돈”하다가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민 31:8).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물론 돈을 사랑하면 칼에 찔려서 죽을 수도 있겠지만(딤전 6:10), 발람의 교훈인 이단적인 가르침을 따르거나 가르치는 자는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안에서 진리의 말씀을 변질시켜 이단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지도자와 또 그것을 배우는 교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계 19:15).  그러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심판의 수술 대상자”가 되지 않으려면 바른 진리위에 서야 합니다(갈 1:8).  가장 미련한 것은 나귀가 소리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교인이나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아내나 남편 혹은 자녀의 입에서 경고의 소리가 들릴 때 빨리 돌이키지 않는다면 시퍼런 식칼을 들고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유일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인데 그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키고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계 2:17).  반면에 주님은 이렇게 부패하고 세속주의로 물든 교회에서 믿음을 지키는 신자들이 있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 대한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본문에 이기는 자에게 주는 두 가지 난해한 단어들이 나오는데 하나는 ‘감추었던 만나’입니다(계 2:17).  이 말은 버가모 교인들 중에 발람의 교훈을 배워서 우상의 제물을 먹듯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발람의 교훈을 따라가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신령한 떡인 만나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요 6:47-51).  쉽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지성소에 참예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다는 것으로 영원한 천국인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말합니다(히 4:16).

 

다른 하나는 “흰 돌”인데(계 2:17), 이 흰 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성경에서 돌은 그리스도를 상징하지만(벧전 2:4-8), 본문에 흰 돌은 고대 법정에서 무죄를 상징하는 돌이나 아니면 공식연회에 참석할 수 있는 초대장을 의미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물론 본문은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아무튼 흰 돌은 어느 집에 들어올 때 주는 패스와 같은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 패스는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패스입니다(엡 3:12).  다시 말해서 메시야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특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흰 돌은 그냥 돌이 아니라 새 이름이 새겨진 돌이라고 말하는데 누구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까요?  주님의 이름일까요 아니면 받는 자의 이름일까요?  그것은 알 수가 없고 단지 이 돌을 받은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나와 흰 돌”이란 세상풍속에 물들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자들에게 천국입성을 허락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계 21:27).

 

오늘날 마귀는 재래식 공격무기인 직접적으로 무식하게 핍박을 하지 않고 지금은 전략을 바꾸어서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믿는 자들을 유혹을 합니다.  외부적으로 강하게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안으로 파고 들어오며 세상에 있는 것들인 풍요로운 삶을 가지고 유혹을 합니다.  즉 생활이 윤택해지고 신앙생활 하되 어려움이 없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어려움이 없고 일이 잘 풀리면 기도 안 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려움이 있으면 주님을 찾으면서 열심히 기도하지만 어려움이 해결되고 생활이 안정이 되면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는데 마귀는 이것을 귀신들의 두목답게(계 13:9), 귀신같이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가능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도록 유혹의 손길을 계속 뻗치면서 한 영혼이라도 더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마귀는 온갖 궤계를 다 사용합니다(벧전 5:8, 살전 5:3).

 

◈ 그러므로 우리가 만나와 흰 돌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여기서 ‘이기는 그에게’라는 말은 싸움에서 지면 만나와 흰 돌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까 피 흘리기까지 싸워 이기라는 것입니다(히 12:4).  지금 신자들의 싸움은 사람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마귀와의 싸움으로(엡 6:10-13), 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외부적으로 들어오는 핍박과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세상 유혹을 동시에 이겨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싸움을 동시에 이기려면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고,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보내주시는 성령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요 14:16-17).  이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영적전쟁에 승리하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속주의 신앙에 물들지 않기를 원한다면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눅 2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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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정사와 권세를 패배시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2:15).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에 대해 영적으로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데 만약 그들이 이미 패배했다면 십자가상에서 하신 주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요?  물론 어떤 일도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에(13:12), 가감할 수는 없고 그분의 희생은 단번에 드려진 것으로( 10:10), 사탄이 패배를 당했다는( 10:18),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계속적으로 스스로를 씻어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즉, 하나님 나라는 이곳에 있고 우리가 그 일부분이며( 17:21),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는 그 나라가 완전히 성취된 것이 아니기에 피 흘리기까지 영적전쟁을 치룰 수밖에 없습니다( 12:4). 다시 말해서 복음이 세상 가운데 퍼져감에 따라 계속 악의 세력이 축소되고 또 사탄은 이미 패배한 자에 불과하지만( 4:1-11),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어찌 되었든지 그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인 것만은 사실이기에( 6:10-13), 영적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사탄과의 영적전쟁에서 그리고 효과적으로 사역을 행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는데(고후 13:5),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용서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일 뿐만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말합니다(벧전 2:9).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사야처럼 하나님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고( 6:5), 왕 되신 그분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으며( 4:16),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8:15).  또한 우리는 우리가 성취한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때문에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고(요일 3:1),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이고( 2:8), 우리가 능력을 받는 것 역시 그분의 은총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8:32).  예수님께서는 이 땅을 떠나시면서 우리를 성령의 수중에 맡겨 주셨고( 14:16), 제자들과 우리들을 너무 신뢰하신 나머지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부르셨으며 요한복음 1515절에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우리에게 맡겨 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좇아 주님을 닮아가야만 하고(벧전 2:21), 그분께서 하신 일을 우리도 하여야 하며 그 이상의 것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14:12).

 

이 문제를 놓고 무디의 동역자이며 성서학자인 R.A 토레이는 『What the Bible Teaches』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는 타고난 신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한 기름부음을 받으심으로써 거룩한 사역을 위한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분은 능력이라는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조건 아래 있었다”  사실 성령의 은사인 ‘지식의 말씀’을(고전 12:8), 알기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생각을 아시고 사역을 행하셨던 것에 대하여 오직 한 가지 설명밖에 할 수가 없었는데( 9:4, 12:25, 4:17-18), 그것은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일을 행하실 수 있고 그 행하신 기적들을 주님의 “신성”의 증거로 설명했지만 예수님께서 어떤 것을 모르고 계신 것처럼 보이는 경우들에( 9:16, 21, 8:45), 대하여는 적당한 설명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식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여러 가지 일들을 가르쳐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어떻게 예수님께서 완전한 인간으로서( 2:8), 아무 것도 이야기를 해 준적이 없는 것들을( 1:48, 19:5, 4:18), 알고 계셨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 역시 예수님처럼 성령과 능력을 받으면( 10:38),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리라고 약속하신 그 어떤 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4:13).

 

그러나 신자들 가운데 이러한 주장을 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들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며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지니고 계셨지만 우리는 단지 인간에 불과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시기 위해 신적인 특권들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셨다고 말하며( 2:6-11), 물론 어떤 신비스러운 방식을 통해 자신의 신적인 속성을 완전히 유지하신 것만은 사실이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자신의 사역을 본받기를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기 전까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 인간으로서 평범하게 살아가셨고( 6:3), 세례를 받으신 후에도( 3:16), 스스로는 아무 것도 행할 수 없었으며( 5:30), 오직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 따름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5:19), 다만 그분의 인성이 죄가 전혀 없으시다는 점에서( 4:15), 원래부터 우리와 다르기는 하지만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일에 대해(벧전 2:21), 좌절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놀라운 특권이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고( 1:12), 성령충만한 가운데 자신을 본받으라는 그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그분께서 행하신 것과 마찬가지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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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하는 사단의 부지런함을 곰곰이 생각하라.

그는 아무 때든지 소홀히 하지 않는다.

우리가 게으르기를 바라는 

그 자신은 항상 바쁜 것이다.

이 우는 사자는 항상 그의 먹이를 찾아 구하며 

그는 변절자를 만들려고 땅과 바다를 일주한다.

그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순례자가 아닌 정탐군으로 돌아다닌다.

그는 휴식이 없는 영이며 ‘두루 다니며’라고 하였다(벧전 5:8).

 

만일 그가 시험에 의해 조금이라도 이득을 본다면 

그는 극력 이것을 추구한다.

만일 그의 죄의 제안이 먹혀들기 시작하면,

그는 이것을 바짝 뒤따라서 죄의 행동으로까지 밀어 붙인다.

그가 유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팔아넘기도록 유혹하였을 때

그리고 그가 호의적이라는 것과 

그래서 은 삼십의 미끼를 물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는 그를 서두르게 해서 

그의 주를 팔아넘기기까지 그를 떠나지 않았다.

 

시험하는데 있어 사단의 부지런함은 

그가 사용하는 시험의 다양성에서 보여진다.

그는 한 가지 종류의 시험에만 자기 자신을 국한 시키지 않으며

그는 하나 이상의 책략을 가지고 있다.

만일 그가 한 가지 시험이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면

그는 또 다른 것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육욕이 타오르도록 유혹하여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는 교만하도록 유혹할 것이다.

만일 탐욕에의 시험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는 낭비벽에로 유혹할 것이다.

 

이와 같이 시험하는데 있어 사단의 부지런함은 대단하다.

그는 있는 수단을 다 쓸 것이며

그는 가지고 일할 여러 개의 연장을 가지고 있으며,

만일 한 가지 시험이 통과하지 않으면 

또 다른 시험을 사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토마스 왓슨『주기도문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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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악해져 가는 불신 세상에 둘러싸여 다음 천 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때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성령의 능력을 받는 일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교리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대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일에 있어 필요한 것이지만 ‘교리’ 그 자체는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아니며 우리를 변화시키거나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 성령의 강력한 체험을 하지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을 받았으니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식으로 자기도취에 빠져 냉랭한 성령론을 간직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몸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고든 Fee는 『God’s Empowering Presenc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능력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실 때(약 4:8), 보기 드문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그분의 분명한 임재라고 부를만한 현상은 종종 전율(합 3:16), 위엄에 사로잡힌 경외심(사 6:1-5), 서 있지 못함(왕상 8:10-11, 대하 7:1-3, 계 1:17), 압도적인 기쁨(시 16:11) 및 이와 관계된 다른 징조 등과 같은 반응을 촉발하는데 이 점은 성령의 비상한 부으심의 시대에는 특별히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의 성회 신자인 고든 Fee가 말한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대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오늘날 나타나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은사들, 가령 "예언적 은사"처럼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초기시대의 교회에 “정경적” 원리의 일부로 기능했지만 그런 은사들은 정경의 완성과 더불어 중단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사도적 교회 수립과 관련된 표적 은사들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연구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은 특정한 용어와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를 구분하는 것으로 특정한 용어의 사용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더 큰 진리를 놓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특정한 언어적 언급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진리냐 아니냐가 결정될 때는 더욱 그러한데 영국 철학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고 논리학 이론과 언어 철학에 관한 독창적이며 중요한 철학적 사유체계를 제시했던 Ludwig Wittgenstein이 지적한 것처럼 “언어는 우리를 미혹시킬 수 있다”라고 주장했는데, 특히 신학적 용어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D. A. 카슨이 말한 것처럼 성경에서 나오는 어떤 특정 단어 하나를 놓고 신학자들끼리 언어학적인 말장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논쟁거리 중에 하나인 성령세례는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같은 사건인가?” 아니면 “중생 이후에 일어나는 또 다른 사건인가?”에 대해 매우 난해하고 다양한 해석들, 즉 각 교단과 교리 노선에 입각한 각기 다른 의견의 차이 때문에 많은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든다면 오순절 날 일백이십 명에게 일어났던 초자연적인 사건이 성령을 체험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서 똑같이 일어나는 것인가?  만약 오순절이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의 모형이라면 그리스도인들도 모든 경험에서 그와 같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들이(행 2:3), 드러나는 같은 경험 또는 유사한 체험을 매번 기대해야만 하는가?  만일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답한다면 성령이 처음 임했을 때 나타났던 현상들 중 한 가지를 선택할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바람소리나 불의 혀 같은 모든 현상들이(행 2:1-4), 다 나타나야 한다고 계속 주장해야만 하는가?  이렇듯 수많은 질문에 사로잡혀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각자의 주장이 옳다고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신학을 하거나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가장 근절되어야 할 것은 모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는 선입관이 포함된 교조주의적 태도와 생각입니다.

 

이러한 전통에 대해 Robert W. Lyon는 『Wesleyan Theological Journal』(volume 14, 1-Spring 1979). “Baptism and Spirit Baptism in the New Testament”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오순절을 기점으로 모든 믿는 자들은 회심할 때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된다.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 또는 성령충만을 받는 것을 구별하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오히려 사도행전은 이 모든 표현이 서로 호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세례’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구절들도 이러한 결론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이 표현들 모두 믿는 자들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포괄적인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존 브라이트는 『The Authority of the Old Testament』에서 “성경은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고 많은 것은 의미하도록 만들어질 수 있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 해도 성경이 해석되는 원칙들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고전 4:6), 성경에 최종 권위를 두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어지지 않으면 특정한 교리 문제로 신학적 논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쟁을 두고 은사주의 신학분야의 초기 선구자인 루터교 목사이며 신학자로 회중의 연합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균형 잡힌 사역을 하고 있는 Larry Christenson는 『Speaking in Tongues』에서 오순절주의자와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을 합니다.  “성령께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서 역사하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결정할 문제다. 사실 기독교인들을 서로 비교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사역의 다양성을 간과하는 행동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각자가 독특하다. 성령은 각 사람을 독특한 방식으로 다루신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의 역사는 매우 신비스럽고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 어떤 확실한 정의를 내리거나 주장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적 논쟁들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신앙감정론』에서 말한 것을 통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은 사람들의 생각하듯이 틀에 짜여진 방법으로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편견으로 시야가 어둡게 가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은 너무나도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대부분 성령을 추적하거나 그의 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성령세례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이나 정의를 내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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