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림과 둠밈

연구자료 2013. 9. 25. 10:25

성경에 나타난 기록으로는 그것들의 모양이나 재료, 그것에 새겨진 기호나 상징도 명확하지 않다.  우림과 둠밈은 대제사장의 판결 흉패 속에 두었으며 이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는데 사용하였다(출 28:30).  그리고 이 흉패는 에봇에 달았기 때문에 에봇이 어떤 경우에는 우림과 둠밈을 사용했는가에 대한 정확한 언급은 없지만 아마도 그것들은 긍정적인 응답과 부정적인 응답 가운데 하나를 고를 수 있게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삼상 23:9-12, 30:7-8).  부정적인 응답이 나타날 경우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인 응답 대신 대답을 안 하시고 침묵하셨다(삼상 14:37, 28:6).  우림과 둠밈은 국가적인 중대한 결정을 할 때에 사용되기도 했지만(민 27:21), 다윗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과 함께 사울의 추격으로부터 도망 다닐 때 사용하기도 했으며(삼상 23:10-13), 미가에게 고용된 레위인 제사장에게 단 지파의 대표자 다섯 사람이 질문했을 때에도 사용되었다(삿 18:1-6, 14). 아무튼 우림과 둠밈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존중한 그들의 태도는 오늘날의 성도들이 배울만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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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현대 교회가 범하는 큰 실수 중의 하나는 판매원이 소비자에게 재품을 파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상품화하여 제공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오시면 그분은 지옥에서 우리를 구해주시고 질병뿐만 아니라 결혼생활과 삶의 제반적인 문제들, 즉 좋은 직장과 차와 집을 주실 것이라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분명 죄인들을 지옥에서 구해주시며 다른 모든 일도 하실 수 있지만 문제는 우리가 이 단계에서 더 진보하지 못하고 머무른다면 그 신앙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히 6:1-2).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실 수 있는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오는 것이 꼭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만약 주님이 가정생활과 직장, 혹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바로 잡아주시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주된 관심이 그분과의 친밀감이 아닌 주로 사람의 표면적인 문제들,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실 수 있는 일에 중심을 둔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제대로 충족시켜 주지 못할 때 우리는 그분을 떠나거나 상심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와 우리를 위해서 행해 주시는 필요에 의해 예수님과 관계를 갖는다면 그분과의 우정은 서서히 멀어져 갈 것이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교회 안에는 두 가지 유형의 성도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마르다 신앙을 가진 사람과 다른 하나는 마리아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예수님은 이 두 유형 중 어느 유형이 주님의 기뻐하는 유형인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눅 10:38-42).  먼저 마르다는 헌신적으로 손님을 접대하고 하나님을 섬겼는데 그녀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보는 즉시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고(눅 10:38),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 솔선수범 하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열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봉사를 거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지나친 봉사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열심히 행하는 일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마르다의 분주한 마음이었습니다(눅 10:40).  정신이 분산되면 좋은 일이 고된 일이 되는 것처럼 자신이 섬기는 주님에게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게 되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마르다의 마음이 분주한 것은 대단히 부정적인 결과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로 하여금 걱정하게 만들었으며 그러한 걱정은 기쁨으로 주님을 대접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눅 10:41).  분명 예수님은 마르다의 집에 같이 계셨지만 마르다는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너무나 벅찬 자신의 일에 부담을 가져 주님과 같이 있으면서도 마음이 괴로워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분주함은 성령의 임재를 망각하게 만들고 우리를 불필요한 염려와 근심의 영역으로 이끌어 가게 만드는데 사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이 그분을 섬기려고 할 때 우리는 마르다처럼 예수님께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수 있고(눅 10:40),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며 마르다가 주님에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 명령을 하는 오만함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마르다의 분노, 즉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약 1:20), 그녀 자신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멀어지게 했을 뿐 아니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동생 마리아까지 비판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때때로 열심히 일하다 보면 우리가 하는 일의 목표 자체를 잃어버릴 수가 있고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거나 그분과의 친밀감이 없는 사람이 교회의 여러 부서에서 섬기는 것에 초점을 두게 될 때 이때 하는 봉사는 마르다처럼 우리가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을(롬 14:4), 교만한 마음으로 판단하는 표준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엘리야와 같이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왕상 19:12), 들을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마르다와 다르게 부엌에서 예수님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지도 않았고 그저 거실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당시 관습에 따르면 마리아는 남자들과 함께 거실에 앉아 있어서는 안 되고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은 부엌이었습니다.  만일 마리아가 제자들 곁에 앉아 있었다면 제자들은 그녀가 여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상기시켜 주었을지 모르겠지만 마리아는 제자들 곁에 앉아 있지 않고 주님의 발아래 앉아 그분의 눈을 응시하면서 말씀 듣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분명 마리아는 게으른 사람은 아니었고 주님이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부엌으로 갈 수 있었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그녀는 하나님 아들의 발아래 앉아 그분의 말씀만을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눅 10:39).  지금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마리아가 선택한 ‘이 좋은 편’(눅 10:42), 즉 “예수님과의 교제”를 말하는데 이 친밀감은 우리 인생의 잔치상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유일한 것으로 만일 오늘날 주님께서 마리아를 닮은 사람을 발견하신다면 그 사람에게 마치 친구가 자기 마음의 모든 것을 터놓고 교제하는 것처럼 그 사람과 소중한 교제를 나눌 것입니다(요 15:14-15). 그러나 주님의 친구가 아닌 사람은 성령의 임재를 떠나서도 교회를 다닐 수 있고 종교적인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 섬기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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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여러 신앙 감정을 동시에 체험했다는 사실은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데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도 모조품이 있다.  바로, 사울, 아합,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에도 가짜가 있다(출 9:27, 삼상 24:16, 26:21, 왕상 21:27, 민 14:39-40).  여호와를 경외하면서도 동시에 우상들을 섬겼던 사마리아인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도 모조품이 있다(왕하 17:32-33).  시편66편 3절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 때문에 원수들도 그께 굴복하지만 그런 경외와 굴복은 가짜다. 홍해에서 하나님께 찬송을 불렀던 이스라엘 자손들과 문둥병이 치료되는 기적을 체험한 앗수르의 나아만처럼 그분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에서도 모조품이 있다.  돌발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마 13:20),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처럼(요 5:35), 영적인 기쁨에도 모조품이 있다.  예후와(왕하 10:16), 회심하기 전의 바울과(갈 1:14, 빌 3:5), 믿지 않는 유대인들처럼(행 22:3, 롬 10;2), 열심에도 가짜가 있다.

 

일반적으로 거짓된 감정이 높이 고양될 때 다른 많은 거짓된 감정들도 함께 체험하는 것 같다.  나사로를 기적으로 다시 일으키신 후에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를 맞이한 다수의 군중들은 동시에 아주 많이 신앙심으로 감동된 것 같다.  그들의 마음은 찬탄으로 가득한 것 같았고 또한 그리스도가 밟고 가시는 길에 옷을 깔면서 까지 큰 경외심과 사랑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크고 선한 일을 크게 감사하며 큰 목소리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찬양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곧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믿고 하나님 나라를 진지하게 열망했으며 그 나라를 크게 소망하고 많이 기대하면서 그 나라가 곧 나타날 것을 고대했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은 소망으로 가득 찼고 그들의 외치는 소리는 크게 고조되어 온 예루살렘이 그들의 소동 소리로 가득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내 아들아 기뻐하라 너의 죄가 사람을 받았느니라”고 말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을 때 이전에 그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적도 없고 그분께 자신의 마음을 드린 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이 말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 그 사람의 마음에 아주 다양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또는 연이어서 생겨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 결과 이제 그 사람의 마음은 경탄과 감사로 가득 차게 되고 그는 입을 열어 그가 체험한 것을 늘어놓게 된다.  동시에 자신이 체험한 것들을 경시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격렬한 반감을 가지게 되며 노골적으로 그들과 자신을 분리시키면서 마치 자신의 편에 속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듯 행동한다.  이런 사람은 인간의 본성을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초자연적으로 간섭하지 않으면 이런 일들이 그런 방식으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에게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참됨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사랑의 모조품에서 다른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양자의 경우 모두 사랑은 감정의 원천이며

다른 감정들은 그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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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자들이 믿는 대로 만약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정하셨다면(죄까지도/사 45:7), 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그분에게 하나도 없을까 라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인간이 악에 대하여 인과율적으로 책임이 있을 경우에는 그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지만(요일 3:4),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에 의해(시 115:3), 인간의 죄에 대하여(잠 16:4), 도덕적으로 책임이 없다는 것은 왠지 불공평해 보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선하신 하나님께서(시 25:8), 악을 작정해 놓으신 이유가 무엇이며 왜 그분만이 면제가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해결하기가 어려운 난해한 것으로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 야고보서 1장13-15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죄의 시험을 받지 않으시고 더욱이 그분은 누구라도 죄를 짓도록 시험하거나 죄를 짓게 만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즉 죄는 피조물에게서만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요 8:44),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 죄에 연루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롬 9:14).  반면에 에베소서 1장11절은 하나님이 부득이 하게 모든 것, 심지어 죄까지라도 미리 정하신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칼빈주의자들은 이러한 딜레마는 역설이라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출 15:18), 그분의 절대적 거룩함(시 47:8), 모두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이어야 한다고 강력히 말하지만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실, 즉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함”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문제가 역설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인은 답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주 사용하는 구절인 로마서 9장18-21절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라니…’  그러나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19절에서는 지적 궁금증을 제시하고 20-21절에서는 바울이 이에 대하여 답하고 있지만 19절에서 제기된 질문은 지적 문제뿐만 아니라 질문자의 태도에 대한 문제 모두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20-21절에서 바울은 태도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이것을 통하여 지적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이 문제에 대하여 답할 수 없다고 제안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에 의해 역설이라는 견해가 실제로 입증된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성경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의 뜻 안에는 각기 다른 세 개의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규범적 뜻”과 “하나님의 허용적 뜻”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적 뜻”으로 이 세 개의 뜻 모두는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에 속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창 12:1-9),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거주하며 그 땅이 그들의 기업이 되도록 명하셨습니다(창 17:8).  하나님은 이삭에게도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가나안 땅에 거주하라고 말씀하셨는데(창 26:2),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으로 이 규범적 뜻 안에는 오직 ‘선’만 포함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악을 차마 보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합 1:13).  반면에 하나님의 허용적 뜻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기근을 당할 때 하나님을 저버리고 약속의 땅을 출발하여 애굽을 향해 떠난 것처럼(창 12;10), 이 일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은 아니지만 허락하신 것으로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잠시 동안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행 14:16-17).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이상적인 뜻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완악한 뜻에 맞추신 것입니다(마 19:8).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을 소유하여 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은 좌절되지 않았는데 먼저 하나님의 규범적 뜻은 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허용적 뜻은 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도록 허락하는 것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섭리적 뜻은 호세아 11장1절에서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규범적 뜻은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지만(벧전 1:15-16), 하나님의 허용적 뜻은 악에 대하여 용인하듯이 죄를 허용하는데(요일 1:10), 이는 하나님의 섭리적 뜻 안에서 우리의 죄에서조차 선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롬 8:28).  마치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날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창 50:20).  사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쳐나기는 하지만(롬 5:2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고(창 2:17), 결과적으로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뜻 안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은 실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렘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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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갑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며 여든여섯에 순교의 제물이 되었던 사람으로 당시 폴리갑을 잡아서 심문하던 총독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시이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이 말을 들은 폴리갑은 “내가 팔십 육년 동안 예수님을 믿었지만 주님은 단 한 번도 내게 나쁜 일을 행하거나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나를 배신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그분을 배신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고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폴리갑이 원형극장 안에 들어섰을 때 하늘에서 “폴리갑, 남자답게 담대하라”는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마침내 폴리갑은 11시에 경기장에 끌려가 오후 2시에 화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는 폴리갑 같은 순교자의 정신을 잘 이어받은 주님 보시기에 단점이 없는 모범된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은 다 똑 같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지역과 형편에 따라서 교회의 사정들이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 교회는 처음부터 쟁쟁한 주의 종들이 사역한 곳으로 많은 열매가 있었던 곳입니다.  교인들은 분별력이 있고 참고 견딜 줄 알며 엉터리 거짓 선생들이 통하지 않았던 교회였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이러한 교회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싸움이 끝난 교회며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안정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교회에 대해서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첫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의 문화와 생활은 있는데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계 2:4-5).  여기서 “촛대를 옮긴다”라는 말은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전투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서머나 교회는 늘 환난과 궁핍한 생활 속에 온갖 핍박을 다 받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에베소 교인들이 보기에는 가장 불쌍한 교회로 보였을 것입니다.  사실 사도행전에 자세히 보면 ‘서머나’라는 이름은 나와 있지도 않는데 아마 이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인 관점에서 별로 중요한 곳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아무튼 이렇게 교회마다 형편이 달랐고 주님도 각 교회 형편에 따라 나타나시는 모습이 달랐는데 모든 교회에 다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책망을 받을 교회에는 심판자의 모습으로 위로를 받을 교회는 인자한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렇듯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한 결 같이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신 적이 없고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계 2:1, 8, 12, 18, 3:1, 7, 14).

 

본문에 보면 주님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시는데 하나는 ‘처음이요 나중이요’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2:8). 이 말은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영원하신 주권자”라는 뜻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을 의미하며(계 22:13), 창조주와 심판주로서 과거에도 계시고 현재에도 계시고 미래에도 계시는 분으로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사 41:4).  다른 하나는 주님을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묘사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주님은 고난과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요 11:25-26).  왜냐하면 주님은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해보신 분으로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분이기 때문에(계 1:18), 주님이 이렇게 나타나심으로 지금 환난을 당하는 서머나 교회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무서운 심판을 재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괴롭히고 핍박하며 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서머나 교인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실제로는 이 우주에서 가장 강한 자의 성질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며 그를 대항하여 시비를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행 9:1-5).  이들은 지금 자신들이 누구를 상대로 해서 싸우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행 22:7-8).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고 핍박을 한다고 해서 복수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눅 6:27-35), 그는 지금 나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상대로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바울이 멋모르고 날 뛰면서 주님을 대적하여 싸운 것처럼 말입니다(행 26:14-15).  그러기 때문에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은 주님을 핍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요 15:18, 행 8:3).

 

◈ 본문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무서운 환난 속에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계 2:9).  이 교회는 종교적인 핍박과 환난을 많이 당한 교회로서 육체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 속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생활을 하다가 잡히면 정원에 불을 밝히는데 이들을 횃불로 사용하기도 했고 교인들을 양의 가죽이나 짐승의 가죽을 입혀서 산에다 풀어 놓아 마치 동물을 사냥하듯 살기 위해서 도망치는 이들을 잡아다가 잔인하게 죽였습니다(히 11:37).  뿐만 아니라 서머나 신자들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난한 생활을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족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 더 과격하게 악행과 훼방으로 신자들의 재산을 약탈해 갔기 때문에 이들은 절대적인 빈곤 속에서 굶주려가며 힘든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히 10:24).

 

주님은 이렇게 환난을 당하고 가난한 서머나 신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계 2:9).  본문에 ‘실상은 부요한 자’라는 말은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아가면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부자라는 것입니다(고후 6:10).  여기서 주님의 생각과 우리들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사 55:8-9), 우리들 보기에 서머나 교회는 별 볼일 없는 초라하고 가난한 교회로 보일지 모르지만 주님은 신앙적으로 윤택한 교회로 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아가며 고난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진짜 천국백성으로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벧전 4:12-14).  그러기 때문에 정말 주님을 잘 믿으려고 하면 물질적으로 궁핍해 질 수가 있는데 그것은 불법과 타협하지 않는데서 오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약 2:5-6).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풍성함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막힌 것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사 1:15-17).  서머나 교회는 겉은 초라해 보이지만 주님과의 막힌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드리는 기도는 바로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직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당하는 환난은 주님이 함께 느껴지지 않는 고통과 아픔은 없었습니다.  이 교회는 가장 어렵고 힘든 상황에 있었지만 성도들 사이의 사랑은 풍성했으며 또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체험도 가장 많았던 것입니다.  분명히 편안한 신앙생활은 아닌데 매 순간마다 주님은 그들을 지켜 주시고 피할 길로 열어주신 것입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겉으로는 부유했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속이 골병든 교회로서 그것도 여러 가지 합병증을 가진 교회로 평가를 받은 교회였습니다(계 3:17).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부자는 경제적인 부가 아니기 때문에(마 5:1-11), 하나님 앞에서 부요해지려면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령 내가 가진 것을 쓰지 않고 어려운 사람을 주면 그것은 하나님께 꾸어 주는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께 꾸어준 것이 많은 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들입니다(잠 19:17).  이런 면에 있어서 서머나 신자들은 주님께 꾸어준 것이 많았습니다.  예를 든다면 옆집이 어려움에 처하면 도와주었고 또 친구가 잡혀가면 그 집 아이들을 대신 돌보아 주고 또 감옥에 있는 자들을 돌보아 주어야 했었기에 이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쓴 것이 많았고 그만큼 부요한 자들이었습니다(마 25:34-40).

 

만약 어느 잘살고 어려움이 없는 교회가 있는데 모든 것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고 분명히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지만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런 교회는 실제로는 가장 가난하고 병든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꾸어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약 2:15-16).  내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 것은 하나님께 꾸어드릴 절호의 기회입니다(잠 22:9).  그러므로 그런 도움을 요청하는 자들이 많은 것에 대해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면 줄수록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부요한 자가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딤전 6:17-19).  그렇다면 이렇게 서머나 신자들이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핍박을 받아가면서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소망을 땅에 두지 않고 영원한 천국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이 선진들처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 것입니다.

 

◈ 서머나 교회의 또 다른 문제는 유대인들의 훼방이었습니다(계 2:9).  유대인들은 그 당시에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로서 오늘날로 말하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된다”고 말하자 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라고 말합니다(요 8:31-33).  이 말의 의미는 조상 아브라함이 섬겼던 하나님을 자신들도 잘 섬기고 있으니까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잘 섬긴 백성들일까요?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통해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마 4:8-9).  이 말은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하지만 영적으로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요 8:37).  이들은 입으로만 믿었지 행동은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막 7:6, 딛 1:1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이 이들을 어떻게 보시느냐는 것입니다.  분문에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라고 말합니다(계 2:9).  여기서 ‘유대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를 의미하며 ‘사탄의 회’라는 말은 마귀의 도구가 되어서 교회를 향해 온갖 악하고 더러운 짓을 다하는 사탄의 집단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주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식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타락하면 불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앞잡이가 되어서 주님의 자녀들에게 온갖 못된 짓을 다하는 것입니다(벧후 2:20-22).  마치 바울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것처럼 말입니다(딤전 1:13).  그러기 때문에 교회에 간다고 해서 주의 자녀가 아니고 간판을 걸어 놓고 사람만 모인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겉은 교회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사탄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환난과 궁핍한 생활을 하는 서머나 교회에게 주님은 반가운 소식이 아닌 무겁고 힘든 소식을 전하는데 그것은 이 교회에 당분간 환난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계 2:10).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정부와 결탁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는데 앞잡이 노릇을 했습니다.  사탄의 선동을 받아 서머나 교회를 참소하고 핍박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참소는 사도행전에 여러 차례 기록을 하고 있는데(행 13:50, 14:2, 5, 19, 17:5), 본문에 ‘시험’은 단순히 옥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서머나 신자들 중에 순교의 영광을 얻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십일 동안’이라는 말은 확실하고 피할 수 없는 고통의 기간을 말하는 것으로 서머나 신자들에게는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통과해야 할 것을 말해줍니다(행 14:22).  다시 말해서 서머나 교회가 걸어가야 할 고난의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딤후 3:12).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렇게 앞으로 있을 고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서머나 신자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시키고 계신 것으로 기왕 옥에 갇히고 순교의 피를 흘릴 바에는 세상과 죄와 타협하지 말고 담대하게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주님은 서머나 신자들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다시 한 번 당부하십니다(계 2:10).  이것은 무섭고 어려운 시험이 다가오면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살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라는 것입니다(계 13:4-5).  주님의 말씀 속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해 비굴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이긴 주님만을 바라보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요 16:33).  왜냐하면 담대함이 나중에 큰 상급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히 10:35).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마 5-7장).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좁은 길로 걸어가기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마 16:24).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세 사람이 주님을 따르려고 할 때 그들은 대가를 치르지 않고 따르려고 하자 주님은 그들에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해야 하고 죽을 각오를 하고 믿음으로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7:13-14).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난의 길을 갈 때 혼자서 가지 않고 주님이 끝까지 동행을 해주신다는 것을 믿고(마 28:20), 고난을 당할 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시 23:4).  왜냐하면 고난의 키를 주님이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사 45:7).

 

◈ 분문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2:10).  여기서 ‘충성’이라는 말은 “믿음이 꽉 찬”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주님에 대한 신앙의 절개를 말하며 이것은 생명을 걸고 신앙을 지키라는 말로서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서머나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순교할 것이라는 말씀은 아니지만 모든 신자들이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음을 각오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 앞에서도 주님에 대한 일편단심 신의를 지킬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계 14:4).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님을 위해 고난이 다가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때에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을 쓰지 말고 그 가운데서 죽을 것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면 물론 죽는 사람도 생길지 모르지만 그 가운데는 반드시 길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복음을 알바니아라는 나라에서 전하다가 붙잡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살아나온 YWAM의 사역자 ‘레오나 피터슨’과 ‘에비 머글턴’의 간증은 로렌 커닝햄의 저서『벼랑 끝에 서는 용기』와 『네 발에 신을 벗으라』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처럼 죽기 하루 전날에 감옥에서 빠져 나오는 것과 같은 극적인 상황에서 구출된 것을 기록한 실화 간증이야기입니다.  반면에 같은 YWAM의 사역자들인 ‘마이크’와 ‘제니스’ 부부는 두 살배기 딸과 3개월 된 아들과 함께 필리핀 산악지역에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부족민들에 의해 살해를 당하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로렌 커닝햄 목사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하나님께 이렇게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이제 당신의 모든 보호하심이 떠나버렸습니까? 하나님!”

 

이 일이 있는지 며칠 뒤에 태국 내 캄보디아 국경 길에서 의료사역자 9명이 소형 승합차를 타고 사역지로 가다가 게릴라들에 의해 무차별 총격을 받아 모든 유리창은 다 깨어지고 말 그대로 총알이 빗발치듯 그들을 행해 날러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총격이 끝나고 부셔진 차에서 의료 사역자 9명이 간신히 나왔을 때 상처를 입은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고 그것도 총알이 머리 옆을 스치는 가벼운 상처였습니다.  총알을 맞은 차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고 부셔졌지만 이들은 멀쩡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던 로렌 커닝햄 목사는 마치 하나님이 “로렌, 이 제 YWAM의 사역자들이 나의 보호아래 있다는 것을 알겠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그분의 살아계심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히 11:6).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있는데 그것은 두 번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둘째 사망”이란 마귀와 그의 추종자들과 불신자들이 들어가는 영원한 형벌인 불못을 말하는데(마 25:41, 계 20:14), 이 둘째 사망은 영과 육이 분리되는 첫째 사망과 구분되는 사망으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는 무서운 형벌을 말합니다(계 21:8).  즉, 육체적인 사망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으로 인간의 육체가 멸절이 되지 않고 끝없이 의식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형벌입니다(계 20:10).  그래서 주님은 서머나 신자들에게 고난 받는 것과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고난이 두렵다고 해서 주를 부인한다면 정말 자비가 없는 무서운 심판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마 10:28).

 

◈ 오늘날처럼 신앙의 절개가 귀한 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군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딤후 2:4).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마귀와 끝까지 싸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엡 6:10-13).  본문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다르게 책망이 하나도 없는 칭찬만을 받은 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칭찬을 받은 이유는 어려운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잘 견디어 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질문해 봐야 합니다.  만약에 진리의 말씀 위에 서서 싸우기를 포기한다면 둘째 사망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의 말씀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 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영혼을 자유케 하기 때문입니다(요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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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지성을 가진 신학자가 되지 않아도

훌륭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말씀을 읽어야 하고

그 다음에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실천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우리의 큰 선생은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가르친다(약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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