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3.08.28 직분론
  2. 2013.08.28 형식과 제도에 묶인 교회
  3. 2013.08.15 십일조
  4. 2013.08.11 묵사발 당하지 않으려면
  5. 2013.08.08 사랑의 피상적 표현
  6. 2013.08.03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주된 근원

바울은 “장로/감독”의 위치를 매우 중요한 역할로 보았다.

또한 누구든지 이 위치에서 섬기기를 원하는 사람은 

가치 있고 정직하며

책임 있는 사역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바울은 이 직분으로 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을 반영하는 자질을 

드러내야 함을 분명히 했다(딤전 3:1-7).

 

이미 장로/감독이 된 어떤 사람들

(아마 바울이 밀레도에서 권면했던 사람들 중에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은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행 20:30)을 하였다

그리고 영적인 리더가 되기를 원하지만 ‘선한 성품’을 보여주지 못해서

이 ‘선한 일’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딤전 3:1).

 

어느 때에는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든 받지 않든

스스로 장로/감독의 기능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스스로 임명된” 자들이다.

때때로 이런 사람들이 순수한 동기와 자격을 갖추었다면 

일이 잘 진행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런 사례가 바로 그레데에서 생겨났다.

바울이 디도를 그 섬에 남겨두어 장로들을 임명하고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딛 1:11), 자들을 잠잠케 하려고 한 

주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스스로 임명된 리더들은 유익보다는 해를 더 많이 끼쳤다.

 

진 게츠『직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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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다양한 교회들이 있고 각 교파와 교리마다 신앙의 모습에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각 교회마다 교회로서 특성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는 윤리적인 생활을 강조하는가 하면 다른 교회는 상담과 내적치유를 강조하고 또 다른 교회는 선교와 구제에 온 마음을 쏟기도 하며 반면에 기도와 성령의 은사를 유난히 강조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제자훈련을 통한 영적인 성숙을 중요시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교회의 모습 가운데서 어떤 교회가 바른 교회의 모습이냐 하는데 대한 혼란이 일어나기도 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단지 그 당시 교회에 대한 평가일 뿐 아니라 앞으로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에 대한 평가이기도 한데 이 일곱 교회들 중에 반드시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있고 그렇지 않는 교회도 있습니다.

 

계시록 나오는 일곱 교회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해석이 있는데 먼저 세대주의자들의 해석으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일곱 세대를 뜻하는 것이라는 학설입니다.  예를 들면 에베소 교회를 초대교회부터 주후100년까지 그리고 서머나 교회는 속사도시대인 100년부터 기독교가 로마에 정식으로 공인이 된 313년까지 또한 버가모 교회는 로마 공인을 받으면서부터 점점 세속화되는 590년까지를 말하고 두아디라 교회는 교리적으로 타락하고 배교적인 행위가 많았던 1517년 교황시대까지 그리고 사데 교회는 17세기 말인 종교개혁이후의 시대까지 빌라델비아 교회는 무디와 스펄젼, 피니 같은 위대한 설교자들이 나온 19세기 말까지이며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는 오늘날 미지근한 말세 교회를 상징한다는 학설로서 일곱 교회를 각 시대별로 나눈 것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1세기 당시의 일곱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록했다는 학설인데 사실 일곱 교회는 그 당시 대표적인 교회들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었는데 이 해석은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이 그 당시 교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각 교회들마다 얼마든지 소아시아 일곱 교회처럼 똑같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해석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초대 교회에도 있었고 중세에도 있었고 근대와 현대에도 있는 어느 시대에 얼마든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유형의 교회들을 기록한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여기서 첫 번째와 두 번째 해석은 일리는 있지만 성경과 근접한 해석은 세 번째 해석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에베소 지역에 대한 두 가지 특징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에베소는 고대의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그 유명한 아데미 여신전이 있는 곳으로 가장 음란하고 세속적인 도시였습니다(행 19:24-35).  그래서 신전은 여사제들이 종교적인 행위로 창녀 역할을 하는 신비주의 중심지이기에 부적을 만들어 장사하는 사람들과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행 19:18-19).  다른 하나는 에베소 교회는 탁월할 주의 종들이 목회를 했던 곳으로 사도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 이곳에 와서 삼 년간 복음을 전했고(행 19:1, 20:31), 성경학자인 아볼로가 말씀을 가르쳤으며(행 18:24),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목회를 한 적이 있었고(행 18:26), 디모데가 말씀을 가르쳤던 곳이기도 합니다(딤전 1:3-4).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는 가장 성경적인 가르침을 많이 받은 소아시아 여러 교회들 중에 가장 전통적이고 뿌리 깊은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께서 어떠한 모습으로 에베소 교회에 나타나셨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일곱 금 촛대를 다니시는 이‘ 라는 말이 나오는데(계 2:1), 이 말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이 절대적인 통제권을 가지시고 교회를 세밀하게 감찰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골 1:18).  그리고 ‘일곱별’이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은 주의 종들인 사역자들을 가리키며 ‘일곱 금 촛대’는 주님이 피 값을 주고 세운 모든 교회를 말합니다(계 1:20).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주님께서 교회 사역자들을 붙들고 계시며 또한 교회를 관할하고 치리하시며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마 16:18).

 

우리는 이것을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마지막 한 말을 통해 알 수가 있는데 교회는 인간들이 모여서 “우리 교회를 하나 만듭시다”라고 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생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마 16:17).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세운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행 20:28, 히 9:12).  여기서 교회를 피 값을 주고 샀다는 말은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분열시키거나 분쟁을 일으키면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경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히 10:29).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동네 반상회 모임이나 라이온스 클럽 모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분쟁을 일으켜 분열시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심판받을 것을 재촉하는 것과 같습니다.

 

찰스 콜슨은『이것이 교회다』에서 “신앙 안에서 확신을 갖지 못한 사람일수록 교회 안에서 더욱 목소리가 높은 법이다. 반대로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자신들과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에게 관용을 베푼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교회에서 분쟁과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거의 목소리가 크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도 목소리를 안 높이시는데 감히 누가 주님 앞에서(교회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짓들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막장국회”처럼 서로 욕설이 오고가고 멱살 잡고 싸우고 경찰들을 동원시키는 것은 참으로 코미디 같은 웃기는 일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두려운 일들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것입니다.

 

◈ 본문에 보면 에베소 교회가 칭찬을 받은 이유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무엇보다도 행동으로 보일 정도로 열심히 있는 교회였습니다.  본문 계시록 2장 2-3절 사이에 나오는 단어들을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행위, 수고, 인내, 참음, 견딤, 게으르지 않음’ 이라는 단어들이 나오는데 이 말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에베소 교회의 신자들은 신앙생활을 적당히 하거나 믿은 것이 아니라 강도 높은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입으로만 믿지 않고 행동으로 신앙의 열매를 나타낸 것입니다(눅 6:46-49).  다른 하나는 거짓 선생인 이단들을 용납하지 않았던 교회입니다.  즉 사도바울의 마지막 권면을 잘 받아들여(행 20:29-31), 니골라당의 잘못된 가르침을 단호하게 대적했던 교회였기에(계 2:2, 6), 에베소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니골라당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는데 본문에 나와 있는 ‘니골라’가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 중에 한사람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분명한 근거는 없고(행 6:5),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들은 이단으로서 “율법 무용론”을 주장했습니다.  율법을 무시하고 폐기하는 이들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지금은 신약시대인 은혜 시대에 살고 있는데 구약의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모든 율법은 성취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고 얼마든지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를 받으니까 무도덕주의자처럼 자유분방하게 살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해서 육체는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죄를 짓든 쾌락을 누리든 마음대로 해도 전혀 문제를 삼지 않는 한마디로 영지주의적 이단이었습니다(계 2:14-15).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워낙 탁월한 목회자들로부터 정통적인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반 율법적인 교훈은 씨가 먹혀 들어가질 않았고 그들은 이런 반 율법주의적인 엉터리 신앙을 혐오하고 미워했으며 끝까지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신앙생활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에베소 신자들을 칭찬하시면서 주님도 이런 자들(니골라당)을 미워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계 2:6).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율법은 지금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마 5:17-19).  왜냐하면 우리가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롬 3:20, 갈 2:16-17, 21),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께 인도함을 받게 되고(갈 4:24),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되고(롬 3:20),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기 때문입니다(롬 7:7-12).  그러기 때문에 율법 안에 있는 도덕법만큼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마 26:36-40, 요 14:21).

 

오늘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는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로서 자신들의 삶을 전혀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현대판 니골라당”입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가 이런 자들을 교회 안에 끌어들이기 위하여 직분을 주고 또 이들이 교회를 떠날까봐 죄를 책망하지 못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어 버린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반면에 이들은 교회를 마치 여가이용이나 부담이 없는 교제의 장소로 생각을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을 미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는 믿는 자의 길이 있고 삶이 있는데(마 7:13-14), 예를 들어 삭개오처럼 돈에 노예로 살아온 자가 그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듯이 사는 방식을 바꾸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눅 19:8-10).

 

◈ 본문에 ‘내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2:3).  이 말은 에베소 교회는 인간적인 야망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동으로 보일 정도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당시 복음을 전하는 순회 전도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대접하며 힘써 수고한 흔적이 있고 문제가 생기면 오래 인내하는 가운데 신중하게 해결해 나가는 지혜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짓 사도인 이단들을 단호하게 대적했는데 아마 그 당시 거짓 선생들은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말하면서 여러 가지 대접을 받으며 거짓된 교훈을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자세한 사정은 알 수는 없지만 거짓 선생들의 거짓된 것들을 밝혀냈고 이러한 일들을 감당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에베소 교회는 도덕적 순결과 교리적 순결을 위하여 힘쓰던 교회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에베소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모범적인 교회로 보였지만 실상 내면 깊은 곳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교회 전체가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외형상 보기에는 너무나도 신실한 교회요 교인들이었지만 내면을 들추어 보면 과연 여기를 교회라고 불러야할지 말아야할지 모를 정도로 곪아 터질 정도로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계 2:4).  본문에 ‘처음 사랑’ 이라는 말은 처음 주님을 믿고 회심할 때 가졌던 복음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말합니다.  쉬운 말로 말한다면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은혜의 눈물과 뜨거운 기도가 있었는데 복음을 받아 들인지 3-40년 만에 그 뜨거움이 사라지고 주님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차가운 얼음처럼 식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오래된 신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형식과 제도만 남아있지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없으며 설교를 들으면서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아마 눈물을 흘린 지가 수년 아니면 수십 년은 되었을 것입니다(마 5:4).  그리고 주님 앞에서 간절하게 기도한지가 너무나 오래 되어서 기억조차 하지 못합니다(살후 5:17).  그래서 말씀을 듣고 회개하거나 영혼구원에 대한 간절함이 없고 자신들은 교회 생활을 착실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롬 3:11).  왜냐하면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은 끝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이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심으로 자신들은 이미 의인이 되었기에 십자가 같은 것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바울이 죽기 직전까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딤전 1:15).

 

왜 사람들이 교회 일에 열심을 냅니까?  그렇게 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열심히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계 3:19), 그 열심이 종교적인 행위에서 하는 것인지 성령이 주시는 힘과 은혜로 하는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롬 10:2).  많은 사람들이 교회 생활에 익숙하고 모든 것이 제도적이고 기계적이며 전혀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더 심각한 문제는 교회에 새로 돌아오는 자들 중에 눈물을 흘리는 자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정해진 순서와 시간에 의해 장엄하고 엄숙하게 드리지만 뜨거움이 없으며 헌금은 다른 교회들보다 넉넉한 편이고 목회자도 대단히 인격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분이며 교인들 모두가 말씀으로 잘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분별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의 첫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뜨거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교회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롬 1:16).  왜 이런 일들이 생깁니까?  그것은 오래된 교회일수록 자신들에게는 복음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사실 계속 자라나야 할 신자들이 이미 다 배운 것처럼 교만하게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엡 4:15).  그러나 윤리적인 삶이 어디서 옵니까?  바로 십자가의 복음에서 옵니다.  이들은 성령의 능력보다는 자신들의 오랜 신앙생활을 경험삼아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신종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고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는 데는 빠른데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무감각합니다(마 7:1-5).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것이 바로 오래된 교인들의 특징으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오직 자기 힘으로 사는 윤리적인 행위만 남은 것입니다.

 

◈ 본문에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라는 말이 나오는데(계 2:5), 이 말의 의미는 왜 복음의 감격과 은혜와 사랑을 잃어버리고 열정이 식어졌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라는 것입니다(고후 13:5).  즉 “너희들 옛날에 거짓선생인 이단들을 색출한 것처럼 너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라”는 뜻으로 주님은 에베소 교회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이 교회에 대해 경고하시길 첫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계 2:5).  여기서 ‘촛대를 옮긴다’ 라는 말의 의미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가장 성경에 근접한 해석은 예루살렘 성전이 심판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처럼 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말한다면 교회라는 이름과 건물만 있지 그 안에 성령의 능력이 없다는 것으로 한마디로 제도에 묶인 형식적인 교회로 전락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에 감격이 없이 종교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청산하고 처음 신앙을 가지고 뜨겁게 믿던 시절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것을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합니다(계 2:5).  모든 체면과 염치를 불구하고 자기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신앙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함께 찾아내어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싫어서 계속 자기 체면만을 지키려한다면 그 교회는 성령의 불길이 완전히 꺼지고 말 것입니다.  마치 유럽의 수많은 교회들이 처음에는 뜨거웠지만 지금은 모든 교회가 전멸하다시피 쇠퇴하고 박물관이나 관광지로 변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현대 교회는 유럽에 있는 교회들처럼 그 전철을 밟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박제화”된 교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조지 바나 연구논문에 의하면 최근 목회자들에게 “그리스도가 오늘 재림하셔서 자신들의 교회를 평가한다면 어떨 것인가?”라는 내용의 설문 조사를 했는데 질문 대상자 주에 0.5퍼센트 미만만이 자신들의 교회가 그 역할을 신실하게 잘 감당했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43퍼센트는 성공적은 아닐지라도 남부럽지 않은 평가를 받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으며, 53퍼센트는 인간 영혼과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거의 끼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이 평가는 자신들의 교회에 대해서 그리 좋은 평가를 내린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교회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더 놀라운 것은 갤럽 조사에 의하면 이력서 내용의 과장과 세금포탈을 하는 사람들을 조사해본 결과 불신자와 신자 사이에 윤리적 견해나 행동상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분명히 우리는 남들이 갖지 못한 귀한 특권인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며 소유된 백성인데 말입니다(벧전 2:9).  뿐만 아니라 주님도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에게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마 16:18).  그런데 왜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현대 교회는 장소와 마케팅 그리고 건물과 프로그램, 교인수와 재정을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열매보다 더 많은 관심과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이 세우신 교회는 영적전투를 수행하기 위해(엡 6:10-13), 각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어 그 전투에 소집된 영적군사들이라는 것입니다(딤후 2:4).  그러므로 곤궁한 이 땅에 참된 소망과 진리를 전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 예수님이 지금 에베소 교회에 대한 영적인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은 성령이 모든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며(계 2:7), 영적인 귀가 열린 사람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을 경고하시는 것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듣고 깨닫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이기는 그에게’ 라는 말은 현재 상태에 만족하지 말고 주님의 첫 사랑을 회복하도록 힘써 싸워서 이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처음 믿을 때부터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영적전쟁입니다(엡 6:10-13).  이렇게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과실을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나무’는 죽음과 질병과 고난이 완전히 사라진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는데(계 21:1-4), 즉, 영원한 천국과 영생을 확실히 보장해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종교적인 의식과 제도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타종교가 말하는 것처럼 윤리나 도덕적인 삶에 있지 않고 무슨 의무감이나 기계적으로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과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삶에 있습니다(빌 4:13). 이 말은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세상에서 능력 있는 삶을 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난로만 가진 에베소 교회처럼 정통적이고 교리적인 차갑고 냉랭한 신자가 되지 말고 난로 안에 불이 활활 타오르는 오순절 초대교회처럼 성령의 뜨거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향한 신앙의 온도는 지금 얼마나 됩니까?  한번 측정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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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십일조

연구자료 2013. 8. 15. 03:53

십일조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기 이전부터 시행되었다.  즉 아브라함은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자신의 전리품 가운데 십분의 일을 주었으며(창 14:17-20), 야곱도 벧엘에서 하나님께 자기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창 28:22).  이처럼 십일조는 율법을 통하여 확정되기 이전에도 시행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십일조의 의미는 인간의 소득이 되는 모든 구원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하며 더불어 더 많은 축복을 바란다는 것이다(레 27:30-33, 말 3:8-10).  이러한 십일조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  ① 제 일의 십일조(민 18:21-24): 이 십일조는 성전에서 봉사의 책임을 맡고 있는 레위인의 생활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농산물 소출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다.  ② 제 이의 십일조(신 14:23-27):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성소에 가지고 가 일부는 잔치 비용으로 사용했으며 또한 성경에 분명한 언급은 없으나 성전의 제단이나 화로 같은 기구가 낡았을 경우 제 이 십일조로 그런 기구들을 수리한 것으로 보여 진다.  ③ 제 삼의 십일조(신 14:28-29, 26:12-13): 유대인들은 안식년을 기준하여 제3년과 제6년에는 이의 십일조로 잔치를 벌이지 아니하고 이것을 각 성에 모아 가난한 자와 고아, 그리고 과부를 돕는 구제비로 사용하였다(신 26:12-15).  이를 곧 “제 삼의 십일조”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용도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제 이의 십일조”와 동일한 것이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올바른 십일조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즉 올바른 십일조란 땅의 소산의 십일조만 바침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하셨다(마 23:23).  이는 물질을 바치는 것으로 신앙생활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참된 헌신의 자세를 가지고 드리는 십일조가 올바른 것이라는 뜻이다(눅 11:42).   이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서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곧 내 재산 중 일부를 주님께 희사(喜捨)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십일조를 바침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재산이 그분의 허락으로 인한 것임과 또한 주님은 모든 것이 주인이시며 자신은 단지 그것을 맡은 청지기에 불과한 자라고 신앙고백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성도들은 바른 십일조를 드리기에 힘쓸 뿐만 아니라 나머지 “십 분의 구”도 정당하고 올바른 용도에 사용되도록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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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개혁주의 교단에 소속되어 목회를 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말씀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처럼 그 말씀에 따르는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교인들에게 말씀만을 강조해오던 터라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나고 성령의 은사를 접목시킨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회고해 보았을 때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사역이 잘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라는 갈등과 고민을 몇 년을 거쳐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목회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면서 금식기도에 들어갔는데 첫날에는 주님은 말씀을 통해 많은 은혜를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뜨거운 체험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만약 이번에 은혜를 받지 않으면 목회를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원에 들어온지 23일째 되는 날 주님은 나에게 성령의 강한 임재하심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 후 집에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놓고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날 그 자매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이 아무런 영적싸움에 경험이 없는 나에게 이러는 것 같았습니다.  “너는 아직 내 적수가 되지 못해”  그날 나는 식음 땀을 흘리며 그 영적싸움에서 완전히 묵사발 당함을 경험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전쟁을 치루고 있는데 성경은 온 세상은 악한 자안에 처해 있으며(요일5:19), 우리는 하나님의 군사로서(딤후 2:3), 적진 안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기에(딤전 6:12), 군사인 우리는 지휘관의 명령에 순종하여야 하며 절제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지만(딤후 2:4),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그렇듯이 우리는 항상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고(수 24:15, 마 7:13-14), 싸움의 결과와는 관계없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할 수 있으며 적이 승리하리라고 판단한 나머지 전투를 하지 않고 도망감으로써 지휘관 대신 예수님께 불복종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전투에 임하여 행동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전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는데 예를 든다면 아기 예수를 죽으려했던 사탄의 시도로부터(마 2:13), 광야에서의 유혹에 이르기까지(눅 4:1-2), 그리고 결국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이끌어 갔던 사탄의 공격에 관한 기록을 통해(마 27장, 막 15장, 눅 23장, 요 19장), 복음서는 우리가 반드시 대적해야만할 적이 항상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고 사도들 역시 그러한 체험과 기록을 사도행전에서 남기고 있으며(행 13:4-12, 16:16-34), 특히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전투에 참여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에베소서 6장은 그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는 그러한 전투가 적진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단을 ‘이 세상 임금’이라고 부르셨으며(요 14:30), 사도 요한은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고 말하고 있고(요일 5:19), 에덴동산에서 이 세상에 대한 권세를 일시적으로 아담으로부터 사탄에게로 넘어가게 한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눅 4:5-8),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은 결코 우리가 섬기고 있는 주님께 대하여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당연히 그분의 군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인 제복을 입혀주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엡 6:10-13), 우리는 민간인처럼 행동하지 말아야 하며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할 것처럼 군인들에게 요구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규율을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딤후 2:3-4).  그런데 만약 전투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인처럼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대하여 충성스럽지 못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바울이 우리를 경기에 있어 운동선수에 비유한 것처럼(딤후 2:5), 우리로 하여금 적의 움직임에 대하여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할 것과(벧전 5:8), 동시에 적이 사용하는 속임수가 어떤 것이며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에서 누가 이길 것인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The Agape Road』의 저자 Bob Mumford가 말했듯이 “우리는 이미 성경의 결론을 통해 누가 승리하게 될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롬 8:37), 우리는 이런 영적전투에 대해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과 확신을 가지고 전투에 임할 수 있어야 하며(약 4:7), 만일 어떤 사람이 회심하거나 치유되거나 아니면 육체적, 정서적, 영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마귀의 지배로부터 풀려난다면 사탄의 세력들은 격퇴당하고 그의 영토가 주님의 수중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눅 13:10-17).  오늘날 사탄은 상처를 입고 죽어가는 맹수와 같기에(계 12:12), 돈에 약한 가룟유다나(요 13:2, 26-30), 발람같이(벧후 2:15-16), 아니면 세상을 사랑한 데마처럼(딤후 2:10, 몬 24절), 취약한 상태로 내버려 두는 사람을 사탄은 미친 듯이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비록 두려움 없이 자신감에 차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높은데 마음을 두거나(롬 12:16), 대단한 것처럼 교만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하며(잠 16:18), 늘 성령 안에서 늘 기도해야 하고(엡 6:18), 항상 성령충만한 준비된 상태를 갖추고 있어야만 영적전투에서 패배를 당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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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체험하는 감정에서 사랑이 나타난다는 것 자체는

그 감정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감정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사랑은 지식이나 예언이나 기적이나 사람과 천사들의 방언보다도 더 귀한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 가운데 가장 숭고한 것이며 참된 믿음의 생명이고 본질이며 요체다.  사랑으로 우리는 천국의 모습에 가장 근접하게 되며 지옥과 마귀의 모습에 가장 반대 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성질 때문에 사랑에는 모조품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어떤 것이 탁월하면 탁월할수록 그것의 모조품들은 더욱 많다. 그래서 철이나 청동보다는 금이나 은의 모조품들이 더 많다.  가짜 다이아몬드와 루비는 많지만 누가 흔한 돌의 모조품을 만들려고 할까?  어떤 것이 탁월하면 탁월할수록 그 본질과 내적 성질을 닮은 모조품을 만들어 내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래서 그 모조품들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그 외형을 정확하게 모방하려고 더 많은 공교한 기술들을 사용한다.

 

그리스도인의 미덕과 은혜도 마찬가지다.  사탄이 교묘함과 사람에게 있는 기만성은 최고의 영예를 누리는 이런 미덕들과 은혜를 모방하는데 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과 겸손 보다 더 많은 모조품을 가지고 있는 은혜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사람에게 일종의 종교적인 사랑이 있더라도 그 사랑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로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을 고백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사랑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임을 말씀하신다.  ‘불법이 성함으로 많은 사랑의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2-13).  하반절이 분명히 보여주는 그들의 사랑이 끝까지 지속되지 못하고 식어지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매우 강하고 진하게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사랑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로운 것이 아닐 수 있다.  많은 유대인들이 분명하게 이 경우에 속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아주 높이 칭송하였으며 고기나 물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밤낮으로 그분을 따라다녔으며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주를 따르겠나이다’라고 말했으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다.  사도 바울은 그가 살던 시대에 그리스도를 가짜로 사랑한 사람들이 많았음을 암시하는 듯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불순하고 영적이지 않게 사랑하고 있었음을 바울이 감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 역시 가짜로 모방될 수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가 없이도

사람들은 이런 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 대한 갈라디아 교인들의 사랑이 그 좋은 실례일 것이다(갈 4: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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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학교 운동장에 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어떤 엄마가 자기가 낳은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 많은 아이들 중에 과연 몇 명의 아이들이 그 음성에 반응할까요?   아마도 오직 한 명만이 그 음성을 듣고 반응을 보일 것인데 왜냐하면 그 아이는 자기 엄마의 음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그분과 조용히 그 음성에 귀 기울이며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우리의 영의 귀는 그분의 음성에 친숙해질 것이고 성경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라고(요 10:27), 말씀하고 있는데 문제는 만약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누군가가 어떤 음성을 들었다면 그것은 귀신에게 사로잡히거나 환청이라는 증세에 시달리는 의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단정을 짓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을 볼 때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전통과 제도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고 성령께서도 이런 바리새적 신앙을 가진 사람에 대해 기뻐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정상적인 신자라면 하나님은 어떤 형식에 갇혀 있지 않는 분이라는 것과 주님의 음성을 성경 이외에 개인적으로 듣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와 의사소통을 하시기 위해 선택한 방법들은 다양하지만(민 22:25-28, 삼하 12:1-12, 욥 33:14-18, 행 8:26, 10:3), 사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가장 주된 근원은 성경인데(딤후 3:16), 성경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음성을 더 자주 그리고 분명하게 들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식적인 성경공부를 통해 듣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달라스 윌라드는 『In Search of Guidance』에서 A.W. Tozer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지속적으로 공부하여 성경과 교리의 전문가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지식에 영적인 조명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마음에 베일이 덮여 있는 것과 같아서 진리에 도달하기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것은 머리에 든 지식에 불과하지 하나님과의 친밀감이나 음성을 듣는데 있어서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약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율법사들은 구약성경을 가지고 있었고(마 23:2, 눅 11:52),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들을 늘 암송하기도 했지만(요 5:39-40), 실제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마 26:57-68).

 

또한 이들은 성경연구에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고 그 시대에 가장 훌륭한 성경해석자들이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훈련으로는 성령의 능력을 얻지 못했고 주님의 음성도 듣지 못했습니다(요 5:37).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도적 교리는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고전 2:13),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말의 뜻은 인간의 지혜로만 이해하려 하지 말고 영적으로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2:14).   오늘날 신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여러 이유들 중에 하나는 가르치는 선생들이 성경공부를 할 때에 신학교에서 배운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강조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에 열심히 성경공부는 했지만 결국 그것은 만족을 주지 못하는 무미건조한 종교적 의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C.S. 루이스는 “성경을 읽을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의 주제에 대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한 분에게만 열중하는데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성경을 묵상하는 주된 목적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오직 예수님만을 사랑하는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 사람은 기록된 성경말씀에 아주 친밀해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날마다 규칙적으로 성경을 묵상하는 것을 대신할 만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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