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부부

광야의 소리 2013. 7. 31. 08:53

우리가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아나니아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이가

베드로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죽이신 것이다.

그런 다음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하신 일을 보고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거짓을 꾀했다는 것을 알고

똑같은 선고를 이 악한 여자에게 주저 없이 내렸던 것이다.

이 불행한 부부가 사도들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뜨거운 불길 속에서 위선자로 지냈다면

오늘날 현대교인들이 그들처럼 위선자로 사는 것은

천 배나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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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성경이 믿음과 실천을 위한 최종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이런 성경을 어떻게 하면 정확하고 바르게 해석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해석하는 데에는 중요한 단계를 따라야 합니다먼저 테스트를 '문법적'으로 즉, 단어의 어원, 특히 동사나 명사 등의 각종 변화형과 문장 구문론 등의 문법적 요소와 문학양식, 문맥구분, 저자의 문체 등을 분석하여 문자기록의 해석에 필수적인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이 있고, 그리고 '역사적'으로 주해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은 텍스트가 처한 역사적 배경과 상황 속에서 거기에 쓰인 단어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으로, 이것은 주관적 요소들이 가미되어 텍스트의 의미를 흐트러뜨리는 것을 막아줍니다여기서 더 나아가 텍스트를 '신학적'으로 주석하는 작업인데 이 단계는 텍스트를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주석하고 텍스트 의미를 밝혀주는 신학을 세우는 작업으로 해석 대상이 구속사적으로 볼 때 성경 전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해석을 시도하는 방법입니다이러한 해석론을 기초로 해서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는(고전 4:6), 사도 바울의 말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연구할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놓고 각 사람들이 해석하는데 있어 일치된 신학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 그리고 웨슬리주의자들과 가톨릭주의자들은 성경을 기초로 해서 교단 신학에 입각해 성령세례에 대한 어떤 정의들을 내릴 때 다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옳은 부분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의 사역의 성격이나 강도, 즉 성령으로 채워지는 결과는 받는 자가 믿음을 얼마나 이해하고 믿음에 얼마나 합당한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Walter C. Kaiser는 “성경에서 비슷한 표현들을 발견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 경험을 처음 기록된 경험과 같은 것이라고 추정할 수 없다”라고 말했는데, 사실 성령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신약성경의 다른 저자들보다 풍부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을 W.T. Conner는 『The Work of the Holy Spirit』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다른 신약의 저자들도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기독교인의 삶에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 그렇게 분명하게 도전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보다 분명하게 성령의 사역을 받는 자의 입장에서 경험되는 무엇가를 논하고 있다”

 

사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과 결정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고전 12:3), 성경은 신자들에게 성령과의 새로운 관계를 추구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고 이것에 대해 존 스토트는 “그들(사도들)은 결코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하거나 가르친 적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새롭고 다른 방식으로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성령과의 관계에 있어 언급된 유일한 두 가지 적극적인 명령, ‘성령을 따라 행하라’( 5:16, 25)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5:18),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헬라어 현재 시제로 신자가 이미 맺은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의 지속적인 성장을 암시하는 것이지 어떤 결정적인 새로운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신약성경의 어떤 본문에서도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호소나 명령은 없고 반면에 에베소서 518절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통해 “성령세례는 하나이지만 성령충만은 다양하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칼빈이 사도행전 15절과 217(주석)에서, 그리고 로이드 존스가 『성령세례』에서 말한 것처럼 성령의 영구적인 내주를 경험하면서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입장을 종합해 보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라는 용어를 성경에서 언급한 여러 경험들 중 어느 하나에 국한하여 배타적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세례에 대한 개념적 오류들은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을 경험하는 것은 때로 우리의 개념을 초월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헨리 블랙커비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직 그분이 당신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대로 경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개념이 부족하다고 해서 경험의 진실성을 무시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순절주의자들은 개혁주의가 말하는 성령론을, 개혁주의자들은 오순절주의가 말하는 성령론에 대해 서로 강하게 거부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살전 4:8), 주어진다고(전치사 ‘엔’ 대신 ‘에이스’ 현재 시제의 사용은 우리의 삶속에 나타나는 성령이 진행 중이고 지속적인 역할을 강조) 말한 것처럼 성령론은 완성되지 않는 과정 중에 있음을 기억하고 그분께 귀를 기울이며 서로 겸손하게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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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라는 위치에는 큰 특권과 책임이 따른다.

야고보서 3장1절을 보면 선생들에게는 

큰 영향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더 엄하게 심판받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선생은 그들과 닮은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하나님은 위조품이 배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한 부담과 책임이 있기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영적 지도자가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기도의 후원을 받게 하셨다.

 

어떤 영적 지도자가 오류를 행하거나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이면

일반적인 규칙인 “말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원칙을 따르라.

문제를 떠벌릴 수 있는 사람들 대신에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이야기 하라.

 

영적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기 전에

그들을 위해 효과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가로막는 요소가

마음속에 있는지 보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시 66:18).

효과적으로 기도하려면 

용서의 영과 인자한 마음이 꼭 필요하다(갈 5:6).

 

지도자를 향한 판단의 영이나 

원망하는 마음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넘치게 되기를 구하고

믿음으로 그 사랑을 받아들이라(롬 5:5).

 

조이 도우슨 『스릴 있고 성취감 넘치는 중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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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사회에서 범죄자에게 가해진 형벌의 종류는 단순했는데 이러한 형벌에는 사형 이외에 체형(體刑)과 벌금형 등이 있다.  이러한 처벌 방식 중에 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었으며 실시되었던 것이 사형이다.  구약 성경에는 사람을 불법적으로 잔인하게 죽이는 형태의 살인(출 20:13),과 정당한 절차를 밟아 범죄자를 죽이는 합법적, 도덕적인 살인행위(사형)가 분명히 구별되어 있다(창 9:9).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에 관한 규정은 다음과 같다.  1. 인명에 대한 중죄들: 속전으로 대치할 수 없는 고의적인 살인(출 21:12, 레 24:17, 민 35:16-21, 31, 신 19:11)과 노예를 만들 목적으로 사람을 훔친 행위((출 21:16, 신 24:7)가 이에 속한다.  2. 하나님에 대하여 범한 중죄들: 우상숭배(출 22:19, 렘 20:1-5, 신 13:2-19, 17:2-7),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레 24:15), 안식을 범한 죄 즉, 안식일의 거룩함을 더럽힌 행위(출 31:14, 민 15:32-36), 무당 행위(출 22:17, 레 20:37, 삼상 28:3, 9), 그리고 제사장의 딸이 음행을 행했을 경우가(레 21:9), 이에 속한다.  3. 부모에 대하여 범한 중죄들: 부모의 권위는 하나님의 승인을 받은 것이다(출 20:12, 레 19:3).  그래서 부모를 치는 것(출 21:15)이나 경멸하는 것(출 22:17, 레 20:9, 신 27:16)은 사형으로 처벌하기로 규정된 것이다.  4. 성범죄: 간음(레 20:10, 신 22:22), 여러 형태의 상피(相避)들(레 20:11, 14, 17), 남색(레 20:13), 그리고 수간(獸姦/레 20:15) 등이 이에 속한다.  한편 이와 같은 죄를 범한 자들에게 취해진 형 집행의 방법도 다르게 나타난다(출 32:27, 레 21:9, 24:14, 왕하 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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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일은 그저 우발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만물의 활동 배후에는 반드시 그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협력 섭리가 있다고 말하며(마 10:29-31), 그러한 그분의 섭리는 인간의 활동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증거 합니다(잠 16:33).  물론 어떤 사람들은 “내가 나의 생각과 뜻대로 행동을 했는데 거기에 무슨 하나님이 협력이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사실 외견상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은 분명 자신이지만 그처럼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배후에 그분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요셉의 사건을 통해 이 사실을 명백하게 증거 하는데 요셉을 애굽에 판 것은 그의 형들이지만 그 배후에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섭리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창 45:45).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 가운데 그분의 섭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심지어 성경은 악한 성격의 일에도 하나님의 협력의 역사가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왕상 22:20-23).  그렇다면 “죄의 최종 원인자가 하나님이신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사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는(고후 5:21), 거룩한 분이시고(사 5:16), 그분은 타락한 인간의 자기 의지에 따른 악한 행동에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으시지만 다만 허용하심으로 악인의 그러한 행동들을 통해서 자신의 영원하신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단지 자유의지를 가진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이 그 의지로써 죄를 짓는 것을 제지하시지 않으시고 허용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만족한 답변을 얻을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의 원천인 성경이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지혜가 무궁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확신하건대 하나님께서 죄를 허용하신 것은 분명 어떤 거시적인 원대한 그분의 뜻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사 55:8-9).  우리는 이것을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나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동의 원인이 되심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를 볼 수 있는데 다시스로 가는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요나를 배 밖으로 던져버렸지만 그러나 15절후에 요나는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되어 진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다고 말하면서(욘 1:15),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를 바다에 던지셨다고 증거 합니다(욘 2:2:3).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 하는 것과 요나 스스로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도덕적인 책임이 있는 인간의 의지적인 선택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욘 3:1-4).

 

조금 더 성경을 살펴보면 신약에 와서 인류 역사상 인간이 저지른 가장 악독한 행위 하나를 들라고 한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악을 짊어지시고(요일 2:2), 고통스럽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입니다(요 3:14, 갈 3:13).  그러나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으로(창 3:15), 단순히 이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행동까지도 그분이 계획하셨습니다(행 4:27).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여했던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었지만(눅 22: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하나님에게 그 도덕적인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날 이 사실을 분명히 밝혔는데 그는 한 문장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예지를 법 없는 자들의 도덕적 책임과 연관시켜 설교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여기서 주목할 만할 것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들은 그렇게 행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강요당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지적인 선택을 통해 미리 정하신 뜻을 이루신 것이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행 2:36).

 

이렇게 인간과 사단의 악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사용에 관한 많은 구절들을 통해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 속에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무엇이든지 사용하시며 심지어 자신의 영광과(롬 9:14-18), 우리의 선을 위해(롬 8:28), 악을 사용하시고(출 9:16), 그 악을 심판하심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지만(시 76:10, 잠 16: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시고(잠 8:7), 악을 행하시는 일이 없으시며(욥 34:10-12, 롬 9:14), 악에 대한 책임도 없으시다는 것입니다(시 5:4).  그런데 만에 하나 우리는 그분의 뜻을 거절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이 공정한가에 대한 철학적인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고 다만 전능하신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주권과 권리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롬 9:11-13).  물론 이러한 바울의 말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위를 상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 받은 물건이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9: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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