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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 피는『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구약 예언자는 성령의 감동 하에 계시를 받아 주의 백성들에게 심판과 구원을 선포했고 예언의 주류는 “몰아지경”이나 “광증”과는 별로 관계가 없으며 예언 속에 미래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말세에 성령의 부으심으로 요엘 2장28절의 예언이 성취되었고 그 결과 모든 신자들이 받을 수 있으며(행 2:17-18), 바울서신에서도 예언은 널리 퍼진 현상이고(살전 5:19-22, 롬 12:6), 회중의 건덕과 격려를 위하여 집회시간에 구두로 전달된 성령에 감동된 자발적이고 알아들을 수 있는 메시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예언자들이 예언을 통제할 수 있었다”라고 말합니다(고전 14:26-33).  간추린다면 예언은 성령의 계시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은사로 이미 과거에 주어진 성경계시를 삶의 현장에 현재적으로 지혜롭게 적용하는 것과 미래에 대해 미리 말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만 무조건 받아들일 성질의 것이 아니라 분별해야 하는 것으로 신약의 예언은 성경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유익을 위해(요 16:7),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은사 중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웨인 그루뎀이 말한 것처럼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이 기록된 후에는 교회에 더 이상 성문화되거나 구두화된 하나님의 말씀은 없다고 역설합니다.  이들에 의하면 이는 특히 예언의 은사의 경우에 잘 들어맞는데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이것이 주의 백성을 위한 완전하고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의 근원이기 때문에 지속되는 예언적인 말씀을 더하는 것은 성경을 더하거나 성경을 완성하는 행위가 되는데 이는 성경의 충분성에 도전하는 것이고 실제로 우리의 삶에 있어 성경의 유일한 권위가 침해된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신약시대의 회중의 예언이(고전 14:26), 그 권위에 있어 구약의 예언이나 신약 사도들의 말씀과 동등하다면 중단론자들이 제시하는 이의는 지극히 타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오늘날 선지자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는 말을 했다면 이 말은 권위에 있어 성경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그와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성경에 기록해 놓아야 합니다.  또한 계시록을 완성된 후에 계속해서 성경에 더하지 못하도록 완성해 놓았다는 확신이 있다면(계 22:18-19), 오늘날 교회의 유익을 위해 허락하신 예언은 더 이상 없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신약의 예언은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는 것이 많은 중단론자들의 주장의 근거이기 때문에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중단론자들은 예언을 그렇게 보지 않고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지 말론은 “기독교의 주류에 있는 비중단론자 중에 오늘날의 계시가 성경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신약 교회에서 회중의 예언이 성경적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면 사도 바울은 예언을 분변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고전 14:29),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예언을 멸시치 말고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살전 5:19-21).  여기서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했다면 예언에는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은 것도 있다는 말인데 구약 선지자의 말이나(신 18:19, 렘 1:9, 겔 33:7), 신약 사도들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대해서(행 1:2, 엡 2:20, 3:5),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언은 성경적 권위를 갖고 있는지 않지만 그 가치에 있어 성경을 위협하거나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성경 및 회중의 성숙한 판단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고전 14:29, 요일 4:1).

 

여기서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경에 “계시” 혹은 “계시하다”는 단어의 용법은 다양한 가능성의 넓은 범주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모든 경우에서 “계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혹은 성령에 의해 주어집니다.  그러나 계시는 놀라운 상황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데 가령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은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계시하신 것인데(마 16:17), 베드로는 계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알려주실 때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엔 에모이’, 문자적으로 “내 안에”, “내게” 혹은 “나에 관해서”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바울의 회심을 두고 한 말로 여기서는 시공적 역사 속에서의 객관적 자기계시(하나님의 아들), 즉 성경의 공적인 기록에 의해서 널리 증거 되고 지금 입증된 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께서 바울에게 개별적으로 계시한 것을 말합니다(마 11:27, 고전 2:10).  에베소서 1장17절 말씀도 개별적인 계시(중생시), 이후에 은혜와 성숙과 관련된 계시도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빌 3:15).

 

이런 의미에서 예언의 은사가 계시에 의존한다고 할 때(고전 14:30), 계시는 정경의 종료를 위협하는 권위적 계시 형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은 계시가 평가되어야 하고 사도와 사도의 복음에 원칙적으로 종속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오늘날의 계시는 성경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경계시의 종료와 함께 예언의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개신교 조직신학의 용어와 성경의 용어를 혼돈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추린다면 사도 바울은 예언이 “계시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언자들의 권위가 절대적이라고 결론을 짓지 않았고 아무리 탁월한 예언적 말씀이라도 사도적 전통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는 거절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입장입니다(갈 1:6-9).  카슨은 “이러한 원리가 어떠한 예언(계시)은사에서도 성경자체에 대한 위협을 발견하는 현대의 비은사주의자들의 경악을 어느 정도 잠재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는데 예언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계시종결과 함께 계시은사의 종결을 주장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존 맥아더는 계시의 지속성이 교회에 많은 이단 운동을 불러 일으켰음을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남용이 예언의 은사의 기능에는 항상 수반된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오류와 남용이 하나님의 은사를 무효하게 만든다고 계속 주장한다면 우리는 성경공부도 그리고 교회 행정도 그만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성경 선생들이 잘못된 것을 가르쳤고 이단들을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을 오도했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가 말한 것처럼 무엇이든지 사용하는 데에는 남용이 있는 법인데 은사의 바른 사용이 불가능하지 않는 한 은사의 남용을 우려하여 은사의 바른 사용을 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날드 기는『Spiritual Gift in the Work of Ministry Today』에서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인도하심의 개인적인 메시지를 주고 받는 일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 성경은 그와 같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음을 증거 하지만 그것은 균형 있게 보존되어야 하며 또한 은사를 통한 메시지를 지나치게 사모하는 자들은 지난 세대와 오늘날 파멸된 것을 통해서 경고 받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데니스와 리타 베네트는『The Holy Spirit and You』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숙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의 사역이 아닌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예언은 20세기 초반에 시작된 성령운동에 많은 손상을 입혔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주 안에서 말씀을 전해야 하고 그 말씀들은 유익하고 신성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말씀을 받은 사람에게 성령의 증거가 있어야 하고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예언을 받을 때는 아주 조심해야 하며 예언이나 방언의 통역, 혹은 지식과 지혜의 말씀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원래 가지고 있던 계획을 무조건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 당신의 친구가 “주님께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무조건 따라 하지 말라. 만일 주님께서 당신을 위한 지시가 있었다면 당신의 마음속에 이를 증거 하실 것이며 이 경우에 당신의 친구가 한 말은 하나님께 이미 당신에게 보여 주신 일에 대한 확인일 뿐이다. 당신을 인도하심은 성경과 일치되어야 한다”  이들의 말은 예언을 받을 때 신중하게 살펴보고 영이 하나님께 속했나 분별하라는 것입니다(요일 4:1).

 

그렇다면 성경의 충분성과 예언의 은사 사이의 관계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합니까?  우리는 성경의 독특성을 보호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어떤 것도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중단론자들의 뜨거운 열정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중단론자들의 견해가 잘못된 것일 경우에 거기에 따르는 하나의 위험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행하시는 일을 반대하고 그로 인하여 바리새인들처럼 성령의 역사를 심하게 대적하는 위험이 바로 그것입니다(마 12:28-32).  하나님은 자기의 사역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시며 그 사역을 통해 영광을 받기 원하시며(사 43:7),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어(엡 4:12), 은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허락해 주셨습니다(고전 12:7).  따라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오류를 승인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실 것과 진실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약 1:17), 대적하지 않도록 교법사 가말리엘처럼 지혜롭게 행동해야 하고(행 5:34-39), 무엇보다도 말을 조심해야 하며(마 12:34-37), 섣불리 판단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건전한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고통당하는 마음에 그 향유를 바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신실한 해석과

양심에 강요하는 율법의 요구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보존되는 곳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율법의 요구를 제외한 율법의 해석이 우위를 차지하는 곳에서는

독선적인 바리새주의가 조장되고,

복음의 선포가 율법의 요구를 배제하는 하는 곳에서는

신앙 지상주의의 방종이 발생케 된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아마 기독교 사회는 복음 설교를 50번 들었다면

율법에 관한 설교는 한 번 정도 들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실로 그 결과는 비참하고 가련하게 되었다.

즉, 느슨하고 부주의한 걸음과 동시에 경박하고 뼈가 없는 종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연속해서 해석하고,

그 과정에 있어서 율법에 관한 구절에 이르면 그것에 머물러 그의 청중들에게

율법의 요구를 강요하는 것이 오늘날(이전보다 더) 그에게 요구되어지고 있는 본분이다.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여기에 말의 순서를 주목해 보면 ‘행하며 가르치는’이라고 되어 있다.

바울이 믿음 안에서 그의 아들에게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라”고 권고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종들에게 생활의 고결함과 교리의 건전함을 요구하고 계신다.

 

행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서로 다른 사역자들은 주님을 조롱하며 심히 모욕하는 것이 된다.

만일 우리의 생활이 우리의 설교와 반대가 된다면,

복음 전파하는 일을 전적으로 그만두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길과 자신의 말이 조화되지 않는 사람의 설교에는 능력이 없을 것이다.

그의 말은 그의 청중들의 마음에 확신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사역자는 먼저 자기가 설교할 것을 실천하지 아니하고는

양심의 깨끗함과 마음의 기쁨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임무를 가르칠 수 없다.

 

아더 핑크 『산상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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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소돔에는 교회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무수한 교회가 있다.

소돔에는 성경이 없었다.

우리에게는 수백만 권의 성경이 있다.

소돔에는 설교자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설교자들이 넘친다.

소돔에는 기도회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다.

소돔은 이런 불리한 조건 가운데 멸망했다.

현재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타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다.

 

레오나드 레이븐힐『소돔에는 말씀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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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때에 정확하게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는 우리에게는 신비에 속하는 일이지만 에베소서 2장1절 말씀처럼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가 어떻게든 하나님께 대해 다시 살아나서 실제적인 의미에 있어 거듭나게 되었음은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는 압니다(요 3:3, 7, 엡 2:5, 8, 골 2:13).  하지만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와 같은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확하게 무엇을 하셨는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8).  즉 우리는 그 소리를 듣고 결과를 보지만 그 자체는 볼 수 없듯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도 그와 같은 것으로 중생이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단 한번 일어나며 죽었던 우리의 영혼이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새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벌코프는 이것에 대해 “중생은 하나님의 은밀하고 불가사의한 사역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중생의 수단으로 사용되느냐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불어넣는데 있어 도구와 수단으로써 성경 말씀 혹은 설교 말씀을 사용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펠라기안주의에서는 말씀선포 없이 성령이 직접 역사하는 것으로 보나 개혁주의에서는 말씀선포를 통하여 역사하는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에스겔 37장에 보면 수많은 마른 뼈들에게 성령이 역사해서 큰 군대를 이루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부흥을 보여주는 동시에 개인 영혼의 부활도 보여주는 것으로 거기서 나오는 바람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인데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을 대언하라고 하셨고 말씀이 선포되자 마른 뼈들이 큰 군대로 살아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말씀선포 없이는 중생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할 때에도 성령의 역사보다 먼저 베드로의 말씀선포가 있었고(행 1:15-26),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할 때에도 베드로의 설교가 먼저 있었습니다(행 10:44).

 

그러면 왜 성령께서는 말씀선포를 통해서만 역사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엡 1:13).  요한복음 3장14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가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불뱀들을 보내어 물리게 하실 때 모세가 부르짖어 기도하자 하나님은 구원의 방법으로 놋뱀을 만들어 들게 하셨고 모세는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들이 살아나는 방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후 누구든지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민 21:4-9).  여기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과 그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고 믿는 자는 구원 얻게 될 것임을 예표 하는 것으로(행 2:36), 말씀선포의 목적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 말씀선포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스펄전은 예수님을 보여주지 못하는 전도의 약점을 이렇게 지적한 적이 있는데, “예수 믿으십시오! 안 믿으면 지옥에 갑니다. 이렇게 말하고 예수님을 보여주지 아니하는 전도는 마치 홍수가 나서 많은 사람이 떠내려가는데 언덕 위에서 어떤 사람이 나오라고 소리 지르는 것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이 물 밖으로 나와야 할 줄을 모르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나오란 말입니까?  방법을 알려주어야 하는데 바로 생명의 밧줄을 던져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로 타락한 인간의 비참한 광경과 생명의 구주되시는 예수님의 대해 잘 설명을 해주어야 합니다(행 26장).  성경은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말합니다(롬 10:14).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해 들어 본적이 없는데 어떻게 믿을 수가 있고 믿지 않는 자에게 어떻게 중생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말씀을 듣지 않고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실례를 찾아본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찾아와서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요 20:23).  이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제자들이 자의적으로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그대로 둘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았다고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는 신학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사죄의 권한을 제자들에게 맡긴다는 뜻이 아니라 사죄의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뜻으로(막 2:10), 그분께서 사죄의 역사를(중생의 은혜), 제자들의 말씀선포를 통하여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말씀선포의 권한을 제자들에게 주시고 성령께서는 제자들의 말씀선포를 통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받는 결과가 생기지만(행 2:37-42), 복음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죄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끝내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으로(막 16:15-16), 말씀선포를 통해 성령께서 죄인인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요 3:3-6, 5:24-25, 고전 12:3).

 

그렇다면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말씀을 선포할 때마다 성령이 역사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은 인간의 권한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주권에 달려있으며 말씀을 선포하거나 말씀을 들어도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때가 있는데 주로 사람들이 마음이 완악하고 성령을 거역할 때입니다(행 7:51-60).  그렇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는데 왜냐하면 말씀을 받은 사람에게는 언젠가는 성령이 역사할 수 있는 기초공사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역사는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여기서 말씀선포는 기초공사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마 13:1-23).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이 마음에 뿌려진 사람은 언젠가는 그 말씀을 통하여 성령이 중생시킬 가능성이 있지만 말씀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은 중생할 기초공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결론적으로 주께서 자주장사 루디아의 마음의 문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도록 하신 것처럼(행 16:14), 죄인은 진리의 말씀, 즉 복음의 능력과(롬 1:16), 성령의 사역을 통해 그분의 설득력에 감화된다고 볼 수 있는데(겔 11:19), 이것이 바로 중생인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담임목회자 한 사람이 모든 제자훈련을 인도한다면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이겠지만 제자훈련 담당 교역자가 여러 명이라면 “좋은 지도자”를 만나게 해 달라는 기도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도 중요하지만 지도자를 어떤 태도로 대하며 어떻게 관계를 맺어 가느냐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제자훈련 지도자에 대한 훈련생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1.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로 인정하십시오.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려면 지도자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지도자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어떤 약점을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분명 어떤 연약한 부분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약점을 아시면서도 그를 지도자로 세우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취향으로 판단하지 말고 나를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적절한 지도자를 만나게 하셨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알고 인정하게 될 때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 되면 지도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적시게 되고 변화의 은혜는 그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2. 마음을 여십시오.

소그룹 안에서 지도자와 마주 앉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때때로 매우 불편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그룹 안에서 지도자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그저 피상적인 이야기만 나눈다면 제자훈련의 과정은 그저 거쳐 가는 코스 정도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여러분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여러분의 생각을 나누시고 기쁨과 어려움을 나누십시오.  무엇인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결정의 과정을 함께 나누십시오.

 

3. 지도자의 약점을 품으십시오.

소그룹에 마주 앉으면 서로의 강점도 서로의 약점도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짧은 시간 동안에는 감추어질 수 있겠지만 일 년이라는 시간을 지내다보면 서로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지도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강단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지도자의 연약함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지도자의 연약함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고 그 부분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 약점이 사역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사랑으로 기도해 주십시오.

 

4. 기도로 동역하십시오.

영적인 지도자는 기도의 후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도자를 넘어뜨리는 것이 사단의 전략입니다.  특히 제자훈련은 치열한 영적싸움의 현장이기에 기도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특별히 지도자의 연약함에 대해 기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더불어 제자훈련의 과정을 통해 지도자도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5. 지도자가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하십시오.

지도자에게 가장 큰 선물은 훈련생의 변화와 성장입니다.  훈련생들의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 지도자는 큰 보람을 느낍니다.  지도자에게 사랑과 감사와 존경을 표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인격과 삶의 변화를 선물하십시오.  지도자와 훈련생의 만남은 참으로 특별한 만남입니다.  이 만남을 아름답게 잘 가꾸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시고 축복으로 여기십시오.  왜냐하면, 이 만남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선하신 것이며 이 만남을 통해 우리 안에 귀한 일을 이루실 줄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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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에 함께 참여하도록

그분의 사람들을 초청하시는 일을 주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 일하시지 우리 계획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이미 일하고 계셨던 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적인 안목을 뜨이게 하셔서

자신이 어디서 역사하고 계신지를 보여 주는 것이 그분께 동참하라는 초청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볼 때,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인 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보여주시는 순간이

당신의 삶을 하나님께로 조정하기를 원하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이 목적하신 일은 하나님이 스스로 완수하실 것임을 보증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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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말씀은 성경 어느 곳에도 전혀 언급한 적이 없는 은사로 성경 이외의 다른 초대 기독교 문서에도 이 구절을 사용한 기록이 없음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 은사에 관한 유일한 자료는 고린도전서 12장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지식의 말씀은 다른 은사와 달리 전후 문맥에 따라 이 은사에 대해 이해해야 하는데 모든 성경주석가들은 이 구절만 가지고 연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확실히 이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의 말씀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다른 의견이 있는데 이 은사가 신자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전에 미리 알 수 있는 자료에 근거하지 않는 지식이기 때문에 기적적인 은사로 보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지식의 말씀을 일반적인 은사로 보는 것으로 주어진 상황에서 지식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데, 예를 들면 성령께서 즉각적으로 주시는 특별한 계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얻은 지식을 근거한 것으로 신학자나 교사, 혹은 배우는 일에 열성을 보이는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견해입니다.

 

여기서 먼저 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말씀에 대한 견해를 살펴본다면 칼빈은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화는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있다”라는(골 2:3), 말씀에 근거하여 지혜와 지식은 서로 관련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지식은 거룩한 것들에 대한 이해”로 해석했고, 박윤선은 “지식의 말씀은 역사적 방면 재료들을 다루는 것이고 복음을 변증하는데 있어서 없지 못할 귀한 요소”라고 말하며, 존 아처는『Charisma and Christian Life』에 실린 글을 인용해 성령께서 어떤 숨겨진 사실이나 상황을 계시하시는 정신적 인상, 그림 혹은 비전이라고 규정하면서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이상적인 유추나 설명이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은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피터 와그너는 “지식의 말씀은 몸에 성장과 여러 가지 정보와 사상을 발견하고 쌓고 분석하고 명료하게 하는 역량이다”라고 하면서 이 은사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착상이 어디서 오는지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며, 반면에 고든 피는 “지식으로 교만에 사로잡힌 고린도 교인들의 의식으로부터 성령의 이 은사를 구출해 내는 의미에서 언급된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 8:1, 3, 7).

 

이러한 다양한 견해 속에서 한 가지 공통점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지식의 말씀’이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아는 것이란 일상적으로 배워서 얻어지는 계속되는 지식을 말하는 것인가? 예를 든다면 배우는 일에 열성을 보이고 장시간에 걸친 집중력을 가지고 놀라운 양의 지식을 습득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고찰하여 거기서 얻어낸 진리를 교회에 전달하는 것으로 모든 신자들이 다 같이 알아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메시지, 즉 복음을 안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이 사전에 미리 알 수 있는 자료에 전혀 근거하지 않는 즉각적으로 주어진 초자연적인 지식, 즉 인간의 이성이나 합리적 판단과 추론에 의해 도출된 자연적인 지식이 아닌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공간을 초월해서 “즉각 계시적인” 신비스러운 지식을 말하는가?  이것에 대해 마이클 그린은『I Believe in the Holy Spirit』에서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십비라의 마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안 것은 그에게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행 5장).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은사는 배워서 얻어지는 지식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인 지식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의료 선교사와 목회자의 길을 걸었던 정신과 의사 존 화이트 박사의 저서『The Cost of Commitment』에 나온 내용에 하루는 그의 아내가 아들과 함께 볼리비아행 비행기를 탑승하게 되었는데 바로 순간에 그들을 전송하러 나왔던 화이트 박사에게 어떠한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아내와 아이들이 비행기를 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었는데 그는 아내에게 그 말을 미처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탄 비행기가 이륙했다는 말을 듣고 그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뇌에 사로잡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만을 신뢰하라고 분명히 말씀해주셨지만 결국 그 비행기는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 그의 아내에게도 역시 그러한 사고에 대한 지식의 말씀이 있었기에 그의 아내는 그 비극이 일어나기 직전에 착륙한 공항에 내려 그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우리 삶의 구체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을 성경에서 그 실례를 조금 더 찾아본다면 먼저 구약성경에 나오는 엘리사가 이 은사를 사용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왕하 5:26, 6:12).  그리고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만난 예수님께서는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사람의 외모에 의해 판단하시지 않고(사 11:3), 성령에 의해서 판단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계셨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이 여인의 영적인 갈증과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함께 부도덕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요 4장).  그러기에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서 이 여인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는데 필요한 조처를 아셨던 것입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지식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전형적인 본보기였던 것을 알 수 있는데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이미 그의 성품을 훤히 아셨던 것과(요 2:46-48), 나무 위를 쳐다보시면서 삭개오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는 일 등등(눅 19:1-10),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현시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으므로 전지하셨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옳은 말이고 예수님은 그 당시에도 하나님이셨고 지금도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막 2:5-7, 요 10:30),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십니다(마 4:2, 요 4:6, 19:28, 눅 2:52).  그분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이시지만 성경은 인간의 형체를 취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신적 속성들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셨다고 가르쳐 줍니다(빌 2:6-11).  예를 들어 예수님은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함께’ 할 때까지 기다리셨고(눅 5:17), 사람들의 불신앙 때문에 치유 사역에 제한을 받은 일도 있었으며(막 6:1-6, 마 13:58),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능력의 근원은 그의 신성이 아니라 성령에 의존함이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눅 4:14-21).  베드로 역시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했다고 말합니다(행 10:38).  따라서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실 동안 인성의 한계들을 받아들이셔서 자신의 신적 능력을 빌어 치유하거나 사역하시지 않으셨습니다(마 12:28).

 

오늘날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제한 없이 받아들이는 교회나 집회에서 종종 누군가가 “주님께 받은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존 아처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다양한 방법으로 계시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오감을 통해 사용된다고 말하면서(왕하 5:26), 이런 말을 합니다.  “린다라는 이름의 한 여자가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붉은 의자 위에 앉아 있습니다. 린다, 당신은 목 신경이 손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로 이 순간 당신을 치료하고 계십니다”  이런 애기를 접할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아, 그것은 사실일거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얼마든지 역사하실 수 있어!”  아니면  “이런 것은 내가 신학교에서 배운 것과 다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고 최면에 걸렸거나 사탄에게 미혹당한 것 아니면 다른 어떤 잘못된 현상일거야”  “나도 사실 그런 것을 체험하고 싶은데 우리 교단의 생리에 맞지 않아! 등등”  열정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에서 절대적 부인 그리고 그 사이에서 거리감을 두고 살펴보는 신중 등 반응이 다양할 것입니다.

 

사실 모든 은사는 본래 교회의 유익과(고전 12:7),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인데(엡 4:12), 몸의 필요성이 다양하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지식도 지식의 말씀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이렇게 볼 경우 신비스러운 지식과 성경계시와의 관계 면에서 문제가 제기될 수 있기에 은사중지 문제와 관련하여 “계시”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목적을 위해 특정한 정보를 초자연적으로 계시해 주는 은사로 주의 자녀로 하여금 어떠한 행동을 취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이 은사가 교회를 건강하게 자라나도록 다른 지체들을 섬기는 도구로 사용할 때에 신중해야하는 이유는 지나가는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세 있는 말처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펄전은 “기록된 말씀과 반대로 나오는 계시가 없듯이 한 개인을 위한 지식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직간접적으로 성경과 관련되어 있다”라고 말합니다.  즉 성령의 은사가 교회의 각 지체에게 유익하고 조화롭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는 가운데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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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봄, 노르웨이의 오슬로가 그랬다.

그녀는 내가 그곳의 한 교회에서 설교한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다.

오슬로에 그녀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즉시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방문 약속을 잡았다.

친구들이 그녀를 집회 장소에 데려다주기도 했다.

 

테레시아는 돈을 모아서 왕복 비행기 표를 샀다.

떠나기 전에 나이로비의 모든 친구들이 그녀와 함께 기도했고,

그녀가 갈망하는 성령의 불을 받아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오슬로의 교회가 문을 열자마자 테레시아가 맨 먼저 들어갔다.

교회에 사람들이 가득 찰 때까지 테레시아는 앉아서 기다렸다.

그때 그 지역에 사는 한 자매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했다.

“당신이 하나님께 받기 원하는 어떤 것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당신에게 주시겠다고 제게 말씀하셨어요”

그것은 놀라운 확증이었다.

테레시아는 그 자매에게 감사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끝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어 강대상에 올라간 나는 테레시아의 존재를 금세 알아챘다.

노르웨이 교회에서 아프리카 여성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아프리카 전통 의상을 입은 그녀는 눈에 확 띄었다.

내가 병자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면 그녀는 기도를 받으러 쏜살같이 달려 나갈 생각이었다.

그녀는 이미 8년이란 긴 시간을 기다렸지만 다음 초청까지 20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내가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앞으로 달려 나와 내 앞에 서서 기대감에 떨고 있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고 테레시아는 결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도 내가 그녀의 머리에 안수했는지 안 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그것을 인식할 겨를이 없었다.

하나님의 불은 내손의 안수와 아무 상관이 없지만 여하간 나는 그녀의 머리에 안수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강력한 힘에 의해 내 손 아래로 밀려 넘어져 공중으로…

그 힘이 너무나 강력해서 그녀의 신발이 양쪽 다 벗겨졌다.

한쪽 신발은 노르웨이 청중들 한가운데 떨어졌는데 다시 찾을 수 없었다.

 

오슬로의 집회가 끝났고 나는 독일로 돌아갔다.

그때 테레시아는 그 교회 바닥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의식을 되찾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다리가 너무 후들거려서 친구들이 그녀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

그리고 그날 밤 신었던 신발 한 짝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그 밤에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기 위해 그 신발 한 짝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테레시아에게 부으신 기름부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녀는 축복을 헛되이 받지 않았다.

테레시아는 사역의 능력을 받으려고 왔기에 사역을 할 것이었다.

 

1988년 우후루 공원에서 울던 여자 테레시아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었다.

“오 하나님, 본케 목사님에게 10만 명의 영혼들을 주실 수 있으시다면

제게 100명을 단 100명이라도 주세요.

주여, 그러면 저는 행복한 여자가 되겠습니다”

 

테레시아는 오늘날 매우 행복한 여자가 되었다.

아프리카 사람들 입에 그녀의 이름이 회자된다.

나는 그녀의 승리를 전해 듣고 주님께 물었다.

“왜 주님께서는 이 위대한 사역에 이혼녀를 선택하셨습니까?

우리 성경학교에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많은 훌륭한 남자들이 있습니다.

왜 그들 대신 테레시아를 선택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말씀을 내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테리시아를 선택한 것은 내가 깨어진 그릇을 취하여

영광의 그릇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 말씀이 나를 얼마나 겸손케 했는지 모른다.

 

오슬로 집회 2년 후 그리고 내가 우후루 공원에서 설교한지 정확히 10년 후인 1998년

나는 아내 아니와 나이로비를 방문했다.

우리는 공원 옆의 호텔에 묵었다.

나는 일부러 첫째 주일에 그곳에 찾았다.

그날 우후루 공원에는 20만 명이 모였다.

테레시아는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설교했고 수천 명이 주님께로 돌아왔다.

마치 사도행전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았다.

 

라인하르트 본케『부흥, 성령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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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야곱이 욕심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먼저 야곱을 알기 전에 그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라반에게 당당하게 말한바와 같이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라고 지난 20년을 회상하고 있습니다(창 31:40).  그렇다면 14년을 라헬이라고 하는 여자를 위해 보낸 야곱이 어떻게 단 6년 만에 엄청난 부를 취할 수 있었을까요?  야곱의 외삼촌이며 장인이 된 라반은 탐욕스런 성품을 지닌 자였습니다.  빈손으로 온 조카에게 어차피 결혼할 딸을 주면서 7년이나 되는 긴 세월을 거저 일하도록 하였는데 그것도 모자라 언니 레아를 동생 대신 신방에 넣고는 사전에 야곱에게 말 한마디 없이 자신의 동네에서는 언니 보다 동생이 먼저 결혼하는 법이 없다고 나중에야 변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미리 계약 내용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며 만일 그렇지 못하였다면 계약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라반이 사전 양해도 없이 자신이 약속하지 않은 다른 딸과 대신해서 혼인을 시키고 다시 7년을 더 일하게 만드는 야비한 방법은 탐욕과 거짓으로 가득한 라반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야곱의 입장에서도 눈이 어두워 앞을 못 보는 아버지를 속이고 에서로 가장하여 대신 축복을 받았으니 이 똑똑하고 약삭빠른 야곱이 어두움 가운데서 남에게 속게 되는 것은 마땅한 보응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라반은 야곱이 불만을 품을까봐 레아와 결혼을 시킨 후 일 주일 후에 다시 라헬을 주고 대강 일을 수습하려고 합니다.

 

이렇듯 다시 7년을 아무 소득 없이 일하게 된 야곱은 악덕 장인 라반을 얼마든지 골탕 먹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차피 7년을 일한다고 했으니 정해진 시간만 지나가면 되는 것이기에 일을 하러 나가서 슬슬 시간만 때우는 태업을 함으로 라반에게 보복할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야곱이 대강 일한다고 하더라도 라반은 야곱에게 아무 시비도 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는 헛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상황에서 나중을 위해 대답할 말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요긴한 시간으로 활용합니다.  14년이 지난 후 야곱은 라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 되는데 그것은 야곱을 통해 라반이 엄청난 부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헌신적으로 일했을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이 복을 내리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라반은 장인이 된 긴 세월동안 야곱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은 것에 대한 약간의 양심의 가책도 생겨 이제 계약 기간이 지났으니 새로 품삯을 정하자고 나섰습니다.  이때 야곱은 정말 어리석어 보이는 제안을 스스로 내놓았는데 그것은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 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창 31:32).  양과 염소 중에 점과 얼룩이 있는 것을 다 가져간 다음 오직 흰 것만 남겨 놓은 가운데 만약 나중에 검은 얼룩과 점이 있는 것이 생기면 그것이 자기의 삯이 되는 것으로 제안합니다.  세상에 이런 어리석은 요구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6년 만에 야곱이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가 부자가 된 근본적인 방법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실한 양이 개천의 물구유에 물을 마시러 와서 새끼 밸 때에 살구나무 신풍나무 버드나무 가지의 껍질 벗긴 것을 짐승들의 눈앞에 세워놓으면 얼룩진 양이 태어날 수 있는 것일까?  유전적으로 이 대답은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짐승의 얼룩은 유전에 따른 것이지 얼룩진 나무를 쳐다본다고 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특별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야곱에게 나타나 내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많은 재물을 이끌고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이 약속에 따라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지금 이 실한 양의 새끼를 나에게 주사 부요케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나뭇가지를 세우는 야곱의 소원을 들으셔서 얼룩진 양으로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삶에 적극적인 사람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어떤 환경과 조건 가운데서라도 자신의 인생을 내던지지 않고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14년의 세월을 인내한 야곱에게 단 6년 동안 그가 정상적으로 20년을 일해도 얻기 힘들만큼의 부귀와 재물을 한꺼번에 부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야곱을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충분히 부자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며 밤에 늦게 누우며 집을 세우는 자의 수고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허사가 될 것입니다(시127:1).  야곱은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충족시킨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을 향해 복을 내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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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극심한 기하로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자주 전해 듣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나도 배가 고파서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서 머슴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나마 배고픈 것보다는 더 낫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굶주린 사람보다 더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먹는 것에 대한 굶주림 외에 또 다른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의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들을 때에 의아한 생각이 드는데 그것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표현을 해석하기가 그다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먹을 것을 위해 자유를 찾아 자기 나라를 탈출하는 사람은 볼 수는 있어도 의를 위하여 탈출하는 사람은 별로 만나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런 사람이야말로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산상수훈에 기록된 팔복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처음 네 가지 복은 빈틈없이 논리적인 영적발전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각 단계는 다음 단계로 이끌며 앞의 단계를 필수조건으로 삼고 있습니다.  즉, 영적으로 파산선고를 받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죄를 보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팔복은 일회적이지 않고 영속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 나라 들어갈 때까지 모든 것이 계속 이어져 갑니다.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함과 애통함과 온유함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님이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실 때까지 계속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입니다(계 7:16-17).  그리고 예수님은 팔복이 천국백성만이 가지고 있는 성품으로 반드시 그렇게 산 사람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하면 이러한 성품으로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천국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팔복’ 앞부분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3).  우리는 보통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교만의 반대어로 사용합니다.  늘 자신만만하다가 어떤 큰 실패를 경험하고 나면 사람이 조금 겸손해 지는데 그런 것을 마음이 가난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하나님 없이 평생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살다가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인식하고 그분 앞에 자신이 별 볼일 없는 존재이며 엄청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애통해 하는 것은 상한 심령에 대한 반응으로 죄 용서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울며 부르짖고 회개하는 것을 말하며(마 5:4), 온유하다는 것은 영적 파산과 애통함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으로 변화된 성품으로 세상적인 허영심을 버린 겸손한 태도를 말합니다(마 5:5).

 

◈ 이 세상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특별히 세 가지 것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것은 “돈과 명예와 세상적인 인기”입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돈을 손에 넣기 위해서 안달하는 사람들, 쾌락을 찾아서 헤매는 사람들, 명예와 권력을 움켜쥐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 인기를 얻기 위해서 물불을 안 가리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어느 누구도 이 세 가지에 대해 굶주려 있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도 세상 것으로 굶주려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했는지 모릅니다‘(요일 2:15).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특징이 무엇입니까?   수가성 여인이 체험한 것처럼 세상 것은 가지면 가질수록 만족감이 없고 오히려 더 갈증을 느낀다는 것입니다(요 4:13).

 

본문에 ‘의’라는 단어가 나옵니다(마 5:6).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칭의’ 즉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롬 3:22-26).  구약성경 이사야 선지자는 ‘의’를 구원과 동등시하고 있습니다(사 54:8, 46:12-13, 51:5, 56:1, 61:10). 그래서 팔복의 ‘의’라는 단어를 구원으로 보고 구원을 받기 위해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라고 대처해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의’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라면 즉, 죄 용서를 받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주리고 목마른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통하는 것이 바로 죄 용서를 받기 위해 애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의’는 구원받은 육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의 몸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는 것으로 보고(고전 6:20), 로이드 존스는 “예수 안에서 새 사람 닮아가도록 소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엡 4:24).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은 의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세상 것들에 굶주려 있지만 의에 대한 배고픔은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만약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비췬 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분이 계신지도 모르고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본적이 없는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고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의에 주리고 목말라한다면 그는 이미 새 생명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상한 심령과 애통함의 단계를 거친 사람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이지만(출 3장), 그런데도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는 간구를 합니다(출 33장).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자녀의 모습이며 의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모습입니다.

 

◈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합니다.  죄인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통한(벧전 1:23, 약 1:18), 성령의 역사입니다(고전 12:3).  그러면 이렇게 거듭난 사람은 무엇을 먹고 자라납니까?  거듭난 영혼은 신령한 젖, 말씀만을 먹고 자라납니다(벧전 2:2).  우리의 육체는 음식을 먹어야 건강해질 수 있듯이 영혼은 영의 양식인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요 6:63).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하면 우리 영혼은 완전히 기아상태에 빠지게 되고 다른 어떤 것으로 채움을 받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한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있을까요?(암 8:11).  그런데 물론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그 고통이 무엇인지 알지도 또 알려고 하지도 않지만 거듭난 사람이라면 베뢰아 사람들처럼 날마다 말씀에 굶주려 있습니다(행 17:11).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성령의 도우심을 날마다 간구합니다.  우리 안에는 두 개의 샘물 구멍이 있는데 하나는 더러운 정욕의 샘물 구멍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샘물 구멍입니다(약 3:11).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엡 5:18).  더러운 정욕의 샘물구멍에서 썩은 물이 올라와서 한순간에 마음을 더럽혀 놓습니다(마 15:19).  조금 전까지 성령충만했다 하더라도 한순간에 교만해서 타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0:12).  그 이유는 우리는 아직도 완전하지 않은 육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계속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오히려 신앙이 자라면 자랄수록 더욱더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빌 4:13), 내 안에 선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롬 3:9-18), 다윗처럼 늘 하나님으로부터 채움 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간구하게 됩니다(시 42:1-2).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시 63:1).

 

굶주린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먹을 양식입니다.  새 옷이나 신발이 아니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이들에겐 가장 필요합니다.  본문에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합니다(마 5:6).  이 말은 동물에게 먹이를 잔뜩 주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로 “원하는 것을 다 얻어 만족하게 되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풍족하고 배부르도록 채워진 것을 말합니다.  마치 누가복음에 나오는 집 나간 탕자가 집에 돌아와 배불리 먹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탕자는 집을 떠날 때 타향에서 행복하게 살 것을 꿈꾸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객지에서 깨닫게 됩니다.  그가 먹을 것이 없어 몹시 굶주릴 때 아버지를 생각하며 집으로 다시 돌아오자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을 위해 준비해 주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살진 송아지였습니다(눅 15:11-32).   

 

◈ 신구약 성경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 대한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본문에 말하는 것처럼 배부를 것을 약속합니다.  먼저 우리가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의를 구하는 자에게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채워주십니다(요 6:35).  천국에는 어떠한 사람들이 들어갑니까?  한결 같이 의에 굶주리고 목말랐던 사람들입니다(계 7:16-17).  세상에서는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말이 좋지 않은 것이지만 영적인 세계에서 쓰일 때는 거룩한 법칙으로 사용됩니다.  만약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정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 말씀으로, 기도로, 예배로,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은 자꾸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는 더 은혜를 주시고 그것을 바라지 않는 자에게는 그에게 남아 있는 은혜마저도 거두어 가신다는 것입니다(마 13:12).  우리는 본문 말씀을 생각하면서 각자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과연 “나는 무엇에 굶주리고 목말라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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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에 이루어졌던 선지자들의 예언자적 사역의 예를 자세히 살펴보면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대부분의 전체 실례들은 커다란 단체를 대상으로 한 계시였습니다(사 6:6-8, 렘 11:6-7).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는 엄청난 책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말씀을 전하며 기록할 수 있었으며(렘 1:9), 이들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라고(출 9:1, 삼상 10:18), 말한 다음에 한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 같았습니다(신 18:19, 겔 33:7).  이렇게 선지자들이 말로 메시지를 시작한다면 그것은 곧 계시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해석과 적용 없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지 그대로를 전하고 선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민 22:38).  그래서 구약 선지자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했으며(신 18:18-20, 겔 2:7), 따라서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선지자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삼상 8:7, 왕상 20:35-36).

 

이렇게 구약 선지자들이 주요 역사가이며 오류 없는 성경을 쓰는 사람들이었고(대상 29:29, 대하 9:29, 12:15), 신약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행 4:33), 기록하며(엡 3:5), 성경에 기록되게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행 1:2), 예수님은 그들을 선지자라고 부르지 않고 사도라고 불렀습니다.  이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구약시대의 선지자에 준하는 사람들이지만(고전 2:13, 고후 13:8, 갈 1:8-9, 11-12, 살전 2:13, 4:8, 15, 벧후 3:2), 교회의 권위 구조는 구약시대의 이스라엘과는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각 사도들에게 각각 다른 영역을 위한 권위를 주셨는데 베드로에게는 유대인들을 향한 권위가 있었고(벧전 1:1), 바울에게는 이방인을 향한 권위가 주어졌으며(롬 11:13, 행 9:15), 교회는 이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사도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권위를 세우고자 할 때에 선지자란 호칭에 호소한 적은 한 번도 없고 언제나 자신을 사도라고 불렀고(롬 1:1, 고전 1:1, 고후 1:1, 갈 1:1, 엡 1:1, 벧전 1:1, 벧후 1:1), 그리고 이들은 신약성경을 기록할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엡 2:20).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직접 선포하신 말씀이고 신약의 사도 또한 그러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면 오늘날 신약의 선지자들은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사도들처럼 이들이 전한 말이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웨인 그루뎀은 신약의 예언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는데 그는 고린도의 신약 예언자들은 구약의 예언자들 및 신약의 사도들과는 다르다고 말하고 이에 대해 카슨은『Showing the Spirit: A Theological Exposition of 1 Corinthians, 12-14』에서 그루뎀이 제시하는 이유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예언은 계시를 전제하는데 구약 예언은 “여호와께서 이렇게 가라사대” 라는 말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 인용의 형식을 취하지만 신약은 이런 경우들이 드물다. 구약 선지자들의 합법적인 후계자들은 권위 면에 있어 신약 예언자들이 아니라 사도들이었다. 구약 선지자가 일단 참된 예언자로 인정되면 그 예언이 내용에 대해서 점검하는 일이 없었으나 신약 선지자는 그 예언의 내용을 조심스럽게 점검받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와 달리 신약의 선지자들은 자기 메시지와 하나님의 영의 메시지를 혼돈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예언을 일인칭으로 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처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또한 자신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고 있는 신구약 성경에 의해 테스트 되고 확인되는 과정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약한다면 신약의 선지자들도 얼마든지 과오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행 21:10-12), 자신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른 지체들에게 확증 받고 시정 받을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고전 14:29).  사실 신약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일상생활에서의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자”라는 의미보다는 그저 “초자연적인 지식을 소유한 자” 혹은 “미래를 미리 말하는 자, 아니면 신적인 권위라는 의미가 함축되지 않은 채 대변인” 정도를 의미했던 것 같은데(요 4:19, 딛 1:12), 이것에 대해 헬무트 크래머는 “선지자라는 헬라어는 단지 알리고 선언하고 선포하는 전달자라는 공식적인 기능을 나타낼 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약의 선지자들이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먼저 사도행전 21장에 보면 두로에 있는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말을 하지만 바울은 이 예언에 순종하지 않았는데(행 21:17), 만약 두로의 제자들이 말한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면 바울은 결코 그 말씀에 불순종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언을 분변하라는 것인데 만일 예언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면 분변할 필요가 없는데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29절에 분변하라고 명함으로 신약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제시합니다.  또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하는데(살전 5:20-21), 만일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면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 선지자의 말이나 신약 사도들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언자들이 전한 계시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모든 결정을 내리기를 바래야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확실히 그랬는데 사람들이 그에게 유다에 머물러야 하는지 이집트로 탈출해야 할지를 물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유다에 남아 있는 자만을 지키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전하지만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이집트로 갔다가 죽음을 당합니다(렘 42장).  그러나 오늘날 신약의 선지자들은 계시를 전함에 있어 예레미야나 구약의 예언자들을 표준으로 삼고 따르기에는 너무나 많은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4장 29-30, 36절에 나타난 대로 예언의 은사가 상당히 규제 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데 신약의 어떤 예언도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와 동등하지 않고 신약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전달하는데 있어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부르스 요컴은 “우리가 말씀을 직접 받든지 아니면 메시지의 느낌을 받든지 간에 예언은 불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이나 사상이 우리가 받은 메시지에 섞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언자로부터 구약 선지자처럼 인도함을 구하는 것은(삼상 9장), 신약에서는 완전히 불법화된 구약의 중요 기능이기 때문에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각자 스스로가 믿는 자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며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가집니다(롬 8:14).  다시 말해서 신약의 사람들은 인도와 방향, 삶에 대한 관리 등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딤후 3:16, 벧후 1:21), 성령으로부터 받습니다(갈 5:18).  그렇다고 신약 예언자들이 믿는 자들을 도울 수 없다는 말은 아닌데 이들은 우리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방향을 제시하여 기도해 볼 수 있는 기회와 예수님과의 개선된 관계로 나아가도록 권면의 말씀과 확신을 제공하기도 할 것입니다(고전 14:3).  간추린다면 신약의 어떠한 선지자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다스리는 예언을 주거나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믿는 자들에게 확신을 주고 명확하게 해줄 수는 있지만 만약 새로운 또는 미래에 관한 예언적 말씀을 받을 때에 우리는 그것들을 판단하고 분별하고 확인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요일 4:1).

 

그래서 바울은 말년에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할’것을 권면했고(딤후 2:15),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의 특성을 강조했으며(딤후 3:16), 베드로도 ‘어두운데 비치는 등불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라’고 말하면서(벧후 1:19-20), 바울의 편지에 나타난 모든 가르침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벧후 3:16).  성경은 교회에 있는 선지자들의 가르침에 주목하라든지 이들을 통한 말씀에 순종하라는 권면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 사후에 많은 지역 교회에 선지자들이 있었지만(행 11:27, 13:1, 15:32, 21:9), 이들은 사도들과 같은 권위에서 예언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끝 날에는 예언자의 역할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아직 오지 않은 두 명의 강한 예언자들이 남아 있는데 이들의 권한은 구약시대의 예언자들과 같을 것입니다(계 11:3-12).  마이클 그린은 “예언이 사도 시대에 죽어버렸다고 생각할 여하한 이유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언’이라고 하면 무조건 정경적 예언으로 생각해서 정경계시의 종료와 함께 예언은사의 종료를 주장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이것을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는 지혜가 필요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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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눈물이 말라버린 껍데기 경건의 시대”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눈에서 언제 눈물이 흘렀는지 기억하기 조차 힘들다.

우리의 눈이 마른 것은 우리의 마음이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구세군 사역자들이 윌리엄 부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의 모든 수단을 다 써보았으나 사람들이 끔쩍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고 물었을 때,

부스는 “울어보십시오”라는 짧은 답장을 보냈다.

그들이 그의 말을 따랐을 때 부흥이 일어났다.

오늘날 교회는 눈물을 가르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 없이 눈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죄에 대해 비통함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

박사 학위를 아무리 많이 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리빙스턴은

“주여, 죄 때문에 생긴 이 세상의 상처가 언제 치료될 수 있습니까?”라고

거듭 부르짖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부르짖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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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삶은 어떠한 원칙 위에서 구현될 수 있는가?

대략적으로 네 가지를 언급할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에 대한 의무의 삶을 구현되어진다.

즉, 그분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부터 우러나오는 우리의 순종에 의하여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표현은 1549년에 발간된 크랜머의 기도서에 나오는 요리 문답에서 유래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이렇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의무는 그분을 믿는 것이며,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며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분께 예배하는 것이며 그분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며,

그분께 나의 전폭적인 신뢰를 맡기는 것이며 그분을 부르는 것이며,

그분의 거룩한 성호와 그분의 말씀을 공경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내 생애의 모든 날들을 다해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구원받은 삶은 이웃 사랑의 삶으로 구현된다.

크랜머는 자신의 기도서에 있는 요리문답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웃에 대한 나의 의무는 나 자신처럼 그를 사랑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내가 모든 사람들에 해주는 것이다”

 

사랑은 그것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면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과 발전을 추구한다.

그것은 마음의 의지의 문제이며, 감정을 초월하는 문제이고,

순간적인 충동이라기보다는 지속적인 헌신의 문제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의무와 마찬가지로

이웃에 대한 사람의 의무는 생활 속에서의 훈련을 요구한다.

 

셋째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유의 삶으로 구현된다.

이것은 다시 네 가지 의미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구원을 얻기 위한 공로의 필요성으로부터의 자유"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율법의 전형적인 법령에 부여된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모든 피조물들을 사용하고 누릴 수 있는 자유"(딤전 4:4-5, 6:17),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수고함으로 얻어지는 성취와 만족이라는 차원에서의 자유 등이다"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삶은 하나님에 대해 열려 있는 삶으로 구현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은사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분을 향해 마음을 여는 삶이다.

 

D. A. 카슨 『하나님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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