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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는 “교만은 죄라는 건물의 기초 중에서도 가장 낮은 부분에 놓여있으며 그 일을 하는 방법이 가장 은밀하고 속임수가 많으며 찾아내기가 어렵다”라고 말했고, C. S. 루이스도 “우리 안에 교만이 많을수록 그만큼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교만을 싫어한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모든 죄 중에서 교만이 가장 위험한데 그 이유는 그것을 탐지해 내기가 어려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교만한 사람들을 찾으라고 한다면 백성들을 가르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이들의 교만이 얼마나 은밀한지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 위대하게 여기면서도 자신들의 그러한 교만의 죄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마 23장).  성경에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신다고 말씀하시는데(벧전 5:5), 사실 우리도 종종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교만한 모습을 보지만 나 자신 안에 있는 교만에 대해서는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마 7:1-5).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은 “교만”이라고 부르지만 나에게 있는 것은 “진리의 말씀에 대한 관심” 혹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라고 포장해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교만이란 무엇일까요?  이 교만에 대해 성경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위대하게 여기는 것과 자신을 높이려는 욕구인 동시에 태도라고 보고 있는데(사 14:12-14), 그중 가장 좋지 못한 형태의 교만은 “종교적인 교만”입니다.  사실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이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분 모든 면에서 무한히 우월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고개를 “푹” 숙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교인들이 얼마나 교만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분명한 예를 들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눅 18:9).  이 비유의 핵심은 종교성이 강한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그분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기뻐했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게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눅 18:9-14).  이렇게 종교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눅 16:15), 하나님의 생각이 자기와 같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멸시하기 위해 성경지식을 가지고 상대방을 저주하거나 무시합니다(요 7:45-49).

 

이렇듯 종교적인 교만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태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월하게 여기신다고 믿는 믿음이기도 합니다(마 6:1-2).  이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고린도에 많은 신전들이 있었지만 살아계신 성령의 전은 고린도교회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만일 누구라도 주의 성전을 파괴하려 한다면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고전 3:17).  그렇다면 하나님의 교회에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전후 문맥을 살펴볼 때 한 부류의 사람으로 그것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고전 3:18-21).  사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알며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아 줄 것인가를 아는 사람들이지만 문제는 이들이 교회 밖에 사람들보다 교회에 더 심한 해를 끼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자신의 지식과 헌신과 열심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입니다(롬 2:17-24).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진지하게 그분의 의견을 묻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언젠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 바리새인들에게 함부로 대하거나 기분을 상하게 한 일로 인해 걱정을 했던 것 같습니다(마 15:1-13).  그러나 예수님은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5:14).  예수님은 자신이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려고 오셨다는 말씀을 하셨는데(눅 4:18),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실 것 같지 않는 말씀이지만 주님이 하신 말씀을 주의 깊게 살려보면 그분이 바리새인들을 배격하신 것은 그들이 소경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눈먼 인도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마 23:15).  그러니까 눈먼 사람이 진리에 눈을 뜨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진리를 눈앞에 두고 스스로 소경되기를 원했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배척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다른 죄와는 달리 종교적인 교만은 눈과 귀를 멀게 만들고(요 5:37),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해 성령을 거스리거나 대적합니다(마 12:28-32, 막 3:22-30, 눅 11:14-23, 12:10, 행 7:51).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의 좋지 못한 신학이나(요 4:20), 부도덕함을 보고도 그 여인에게 손을 내미는 일을 금하지 않으셨고(요 4:18),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까지도 망신을 주거나 멀리하지 않으셨지만(요 8:1-11),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소경됨은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고전 8:2), 예수님은 그 사람을 무지 안에서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날까지 내 버려두실 것입니다(롬 2:16).  이것은 고대시대에 주어진 경고로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이러한 경고를 주기 700년 전에 이사야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라고 말합니다(사 5:21).  아마 예수님께서 하신 가장 무서운 말씀은 로마서에 나오는 말처럼 “그대로 두어라”일 것입니다(롬 1:24, 26, 28).  세상의 구주로부터 내버림을 당한 것보다 더 비참한 운명은 없을 것이고 지옥의 궁극적인 고통은 뜨거운 불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부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종교적으로 교만하거나 평생을 배워도 다 못 배울 성경지식을 가지고 무엇인가 안다고 떠들어 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실 것이며 우리는 그 분의 음성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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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형 큐티 (혀)

제자훈련 2012/02/27 10:11

본문 : 야고보서 3:1-18

내용관찰

형제 여러분, 선생 된 우리는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므로 너도 나도 선생님이 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다 실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만일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으면 그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마음대로 부립니다.  배를 보십시오.  그렇게 큰 배가 강풍에 밀려다녀도 항해사는 아주 작은 키 하나로 그 배를 마음대로 조종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혀도 몸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잘못 사용하면 큰 손해를 가져옵니다.  작은 불씨가 큰 숲을 태우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의 혀는 불과 같고 악으로 가득찬 세계와 같습니다.  혀는 몸의 한 부분이지만 온 몸을 더럽히고 우리의 생애를 불태우며 끝내는 혀 그 자체도 지옥 불에 타고 맙니다.  여러 짐승과 새와 파충류와 바다 생물은 사람에 의해서 길들여지고 있고 또 길들여졌습니다.  그러나 혀를 길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걷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이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이 혀로 하나님을 찬송도 하고 그분의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도 합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함께 나올 수 있습니까?  형제 여러분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거나 포도덩굴이 무화과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짠 샘이 단물을 낼 수는 없습니다.

 

연구와 묵상

1. 야고보는 혀를 무엇에 비유했는가?

말의 행방을 어거하는 재갈 / 배의 항해를 좌우하는 작은 키 / 많은 나무를 태우는 작은 불씨

 

2. 온전한 사람의 표준은 무엇인가?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

말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다른 모든 행위도 제어하고 절제할 수 있다.

 

3. 야고보가 책망한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내는 표리부동한 믿음을 책망하였다.

 

4. 혀의 파괴적인 힘을 어떻게 표현했나?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른다고 말한다.

전 인격을 오염시키고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개인의 삶이 완전히 파멸된다.

 

5. 온유의 성경적 정의는?

인간 내부로부터 충만해진 겸손 또는 온화함, 하나님을 인식하여 그분께 자신을 순종시키는 것이다.

 

느낀점

우리가 매일 쓰고 하루 종일 쓰는 말처럼 우리와 가까운 것도 드문 것 같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죄중에 대부분이 말로 지은 죄가 가장 많다고 한다.  또 실제로 나도 안해야 될 말을 실수로든 무의식중으로든 하고는 얼마나 후회한 적이 많았는지…  누구나 말의 절제성은 동감하면서도 남에게 해당되는 말이지 자신은 반성을 잘하지 않는다.  나도 말씀을 읽을 때는 지혜로운 입술과 절제하는 입술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너무도 쉽게 상대방을 향해 바람직하지 못한 말을 할 때가 많다.  말의 실수는 치명적인 것임을 생각하며 절대 삼가는 것을 명심해야겠다.

 

결단과 적용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듯이 신중히 생각하고 진실 되게 말하며 상냥한 표정으로 대한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입술임을 생각하고 오염시키지 말자.  “남편이 담배를 피울 때 그만 피우라고 짜증을 내면서 말한 적이 많다. 오늘은 부탁하는 말투로 담배 좀 줄이라고 상냥하게 권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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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그리스도인들 중에 대다수 사람들은 “사랑이 가장 큰 은사”라고 말을 하지만 이것이 적절하지 못한 이유는 사랑이 은사라면 사도 바울이 은사의 목록에 이것을 반드시 포함시켰을 덴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고전 12장).  물론 넓은 의미에서 사랑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사이기는 하지만(요일 4:10), 그렇다고 사랑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에게는 주고 또 다른 지체에게는 주지 않으시는 그런 의미의 은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31절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한 다음 바로 뒤이어 13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비교적 길게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욱 큰 은사’는 “더 탁월한 은사들, 혹은 더 큰 은사들”을 가리키는데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2장31절에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씀이 나오고 바로 뒤이어 13장1절에 사랑이 나오기 때문에 사랑이 ‘더 큰 은사’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은사’는 단수가 아니라 “은사들” 즉, 복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더 큰 은사들’을 사모하도록 권면한 다음 뒤이어 고린도전서 12장31절 하반절에서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더 큰 은사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제일 좋은 길’을 제시하는 데 그 이유에 대해 카슨은『Showing The Sprit』에서 “최고의 은사들을 추구하다가 보면 성령의 최고의 열매인 사랑을 제쳐놓을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이 사랑을 ‘제일 좋은 길’로 제시한 것이다. 사랑은 많은 은사들 중에 한 은사가 아니라 그 중요성 면에서 이런저런 카리스마를 전적으로 앞서는 총괄적으로 감싸는 총체적 생활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의도는 은사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은사들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이다가 보면 모든 신자의 삶을 특징지어주게 하는 총체적인 생활방식으로 가장 중요한 사랑을 무시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을 제일 좋은 길로 제시하는데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즉 바울은 은사 면에서 교회의 유익을 위한 제일 좋은 길을 사랑으로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교회의 불행은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귀한 영적 은사들을(엡 4:7-8), 받은 일부 신자들이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고 은사를 사용하기 때문에 고린도교회처럼 시기와 분쟁이 많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고전 3:3).  사실 열매가 없는 은사는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데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이 점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7절에 의하면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이상적 혼합 은사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성령의 은사를 발견하여 사용하는데 있어 은사에 충실했지만 영적으로는 무질서했던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혼란한 교회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은사가 아닌 열매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을 기록한 연유도 이것이며 여기서 성령의 열매인 사랑에 대해 웅변적으로 토로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무리 탁월하고 뛰어난 은사를 가지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꽹과리처럼 소리만 요란하지 아무 유익이 없듯이(고전 13:1-3), 교회 유익을 위해 주어진 은사가(고전 12:7), 열매가 없다면 그 은사는 공기가 빠진 타이어와 같아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는 이점에 있어『Keep in Step with the Spirit』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인식해야 했던 것 그리고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퓨리탄 학자 존 오웬이 말한 대로 은혜 없는 은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즉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유익하게 하는 것을 행할 수 있으면서도 참된 “신지식”이 가져오는 성령이 주시는 내면의 변화에 대해 스스로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은사를 행하는 성령의 나타남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에 있어서의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동일한 것이 아니며 후자가 거의 혹은 전혀 없으면서 전자는 많이 나타날 수 있다. 많은 은사들을 가지고도 은혜는 거의 가지지 못할 수 있는데 발람, 사울, 그리고 유다와 같이 진정한 은사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정한 은혜는 전혀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신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인간의 삶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때 윤리적인 것이 은사적인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은사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다는 점에서 사랑의 중요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성경에 보면 은사에 관한 구절과 열매에 관한 구절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은 물론이고 로마서 12장6-8절의 은사 목록 다음 구절에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말하며(롬 12:9-10), 에베소서 4장의 경우에도 16절에서 은사의 목록이 마쳐지고 그 다음 구절부터 열매의 대목이 이어지는데 5장2절에 가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하며, 베드로전서 4장9절에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말씀 바로 앞에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라고 말합니다.  간략하게 말하면 모든 은사들은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사랑에 기초를 두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찰스 스탠리는 “성령의 은사는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 얻어지는 부산물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에게 있어서 은사는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헌신은 그 열매를 통해 평가를 받는데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6).  이것은 성령의 은사 가운데 사역하는 모든 일은 그 결과가 반드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야 함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벧전 1:8), 만약 어떤 사역자의 삶에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그가 아무리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은사는 무언가 잘못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영적은사들을 말하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 사이에 사랑을 논한 13장이 있는 것입니다.  즉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위해 주어지지만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은사들이 사랑 안에서 발휘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사랑 없이는 모든 은사가 제 아무리 굉장하더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은사와 사랑을 사이에 두고 선택해야 할 필요는 없는데 그것은 이 둘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함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약 1:17).  이처럼 사랑이 은사를 행하는데 있어 기본이 되는 것이기에 사랑을 가장 높은 은사보다 더 귀한 ‘제일 좋은 길’로 바울은 제시한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당신 안에 개발시켜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도록 당신을 준비시킵니다.

당신의 관심이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 목적

그리고 방법들이 초점 맞춰져 있는 것이 핵심입니다.

다른 어떤 관심도 당신을 잘못 인도할 것입니다.

조지 물러와 같이 당신의 뜻이 온전히 없어지는 단계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어떤 일보다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당신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당신을 그분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초청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하나님을 위한 꿈을 꾸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며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당신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중생을 단순한 구원의 시작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실상은 이보다 더 넓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중생은 구원의 시작만 아니라 과정과 완성의 요소와 능력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의 준비와 확신과 성화의 완성까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중생은 새 생명을 받는 것일 뿐 구원의 과정과 완성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농부가 심는 “종자”에는 성장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듯이 중생을 단순히 심는 것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은『기독교 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중생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게 되는 것을 안다. 구원의 회복은 한 순간 또는 하루, 일 년에 되는 것이 아니라 택자의 육적 부패성을 완전히 정복할 때까지 계속하신다. …중생 안에는 장성의 여지가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 말은 중생은 단순한 구원의 시작만이 아니고 완성으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내포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누가 중생을 시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성령이 중생을 시킨다고 대답하겠지만(요 3:3-8), 그러나 이 문제는 성령만이 전적으로 역사하시는가 아니면 인간과 합동을 하시는가 하는 것인데 모든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하셨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치하지만 하나님이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서로간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페라기안주의나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중생을 “신인협동”으로 생각하는데 이들은 인간에게는 아직도 자신 속에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선의 요소가 다분히 있기 때문에 인간이 중생을 소원하며 움직일 때 성령의 협동함으로 중생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에서는 인간에게 만일 중생하기 원하는 의지의 활동이 있다면 그 소원마저도 성령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빌 2:13).  즉 성령은 우리에게 구원만 주신 것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까지 주신다는 것입니다(롬 1:17).

 

그러면 왜 인간은 중생하는 일에 있어 성령과 협동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이 해답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먼저 중생하지 못한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말합니다(롬 8:7).  이런 원수관계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 협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중생하지 못한 인간은 죽은 송장과 같기 때문에 협동할 수가 없는데 에베소서 2장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합니다.  협동은 산 사람끼리 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하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 그와 의논을 하고 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어있는 사람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협동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서 독자적 권능으로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에 있어 인간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겔 11:19, 요 1:13, 행 16:14, 롬 9:16, 빌 2:13).

 

따라서 구원의 적용에 있어서의 요소들 중에는 인간이 능동적인 역할을 차지하는 요소들도 있지만(회심, 성화, 성도의 견인), 중생에 있어서 만큼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고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중생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은 삼위 중에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영으로 거듭 난다”라고(요 3:8), 말씀하실 때 특히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을 가리켰지만 다른 구절에서는 중생에 성부 하나님이 관여하신다고 증거한 적도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신 이는 성부 하나님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엡 2:4-6), 야고보도 말하기를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이는 ‘빛들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약 1:17-18).  베드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벧전 1:3), 이가 곧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중생은 성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성령께서(요 14:16, 26, 15:26), 하신 일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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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천국백성이 되는 것을 “거듭난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사 니고데모를 만났을 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3).  그때 니고데모는 대단히 종교적인 사람이었고 직업 자체도 종교적인 것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 나라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거듭난다”는 것은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생겨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고 그분을 인식하면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백성이란 종교적인 생활을 열심히 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가 그 사람의 삶에 분명한 경계선을 그을 수 있도록 일어난 사람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을 알기전의 그의 성품과 주님을 만나고 난후의 성품에 근본적인 변화가 옵니다(갈 5:22-24).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두 가지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무서운 죄인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힘든 것은 예수님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며 “나는 죄인이다”라는 이 말보다 고백하기 어려운 말은 없습니다.  자기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고백할 때 천국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마 5:3).  다른 하나는 자신의 죄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얼마나 무서운 죄성이 지배하고 있으며, 무서운 파멸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그 죄 때문에 슬피 울며 통곡하는 것입니다(마 5:4).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눅 13:24), 하나님 앞에서 가난해지고 애통하며 회개하는 자세가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첫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마 7:13-14).

 

◈ 우리는 보통 “온유하다”라는 말할 때 어떤 생각을 합니까?(마 5:5).  성격이 부드러워 남에게 싫은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사람 어떤 경우에는 지나칠 정도로 비굴하게 굽실거리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지독한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다른 사람에 대하여 공격적이지 않고 악착같지 않은 것을 온유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온유하다”라고 말하면 우선 순하고 부드러운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온유’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부드러운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은 후에 생긴 변화된 후천적인 성품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승부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과 경쟁하는 것을 싫어하는 천성적인 성품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과 겨루기 보다는 차라리 포기해 버리는 편을 택합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충동을 받으면 남과 경쟁하는 것은 좋아하지는 않지만 야생마처럼 난폭해지기 쉬운 성품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믿는 자들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사람이 나오는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울이라는 청년입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영광스러운 주님을 만나고 나서 직가라는 거리에 사는 유다의 집에서 아나니아를 통해 안수를 받을 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행 9장).  훗날 사도바울은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자신이 박해자였던 것은 알지 못했을 때 행한 일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딤전 1:13-15).  이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서 성령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성령이 오시면 어떠한 성품으로 변화되어 갑니까?  바울처럼 살기가 등등한 성질이 부드러운 성품으로 변화됩니다.  쉽게 말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성품을 통제하시고 균형을 잡아주실 때 나타나는 것이 ‘온유’라는 것입니다(겔 36:26).

 

◈ 이런 온유한 사람의 특징은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것이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누구든지 부자가 될 수 있고 가난해질 수도 있습니다(삼상 2:6-7).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 가장 심각한 것은 사람을 타락시키고 범죄케 하는 것이 욕심이고(약 1:15), 특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질은 가능한 할 수 있는 대로 이 세상에서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지기 위하여 열심히 달음질을 합니다.  예를 들어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제 정신을 가지고 돈을 모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실 돈에 대한 애착이 없으면 돈을 벌수 없는 곳이 세상입니다.  예를 들어 삭개오가 어떤 사람입니까?  돈에 환장해서 남의 것을 속여 착취하여 엄청난 재산을 모았던 사람입니다(눅 19:8).  그러나 천국백성은 이 세상 것을 다 차지하려고 열안이 되어 살지는 않기 때문에 온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 우리를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어떠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이 세상에서 마귀의 지배를 받으면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마음대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엡 2:2-3).  모르긴 몰라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짓들과 그분과 원수되는 일들(롬 8:7), 성경말씀처럼 그것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들만 짓고 살았습니다(롬 1:29-32).  우리들 중에 이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딛 3:3).  그렇다면 이렇게 세상 욕심을 따라 살았던 우리들 마음에 하나님의 성품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섬겼던 아비가 진리에 서있지 않은 욕심쟁이 마귀이기 때문에(요 8:44), 그를 닮아 마귀의 기질로 똘똘 뭉쳐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변화된 온유한 사람은 절제된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처럼 욕심을 부리거나 자기 이익을 먼저 챙기지 않습니다(마 19:16-22).  이렇듯 믿기 전과 믿은 후가 다르게 변하고 불신자와 다른 분명한 경계선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만약 믿는 자 마음속에 욕심이 자꾸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진리의 말씀으로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합니다(갈 5:24).  여기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는 말은 육체의 정욕이 우리 안에서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육체의 욕심은 단지 충동만 일으킬 뿐이지 얼마든지 우리가 거부하고 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권세를 예수님은 이미 믿는 자들에게 주셨습니다(요 14:12).  그렇다면 정과 욕심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좇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을 근심시키지 않고(엡 4:30), 그분이 원하시는 일들만을 행하면 절대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것입니다(갈 5:16).

 

◈ 그리고 온유한 사람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보복의 원리가 나오는데 누군가 자신에게 해를 가하면 똑같은 방법으로 갚아주는 것입니다(출 21:23-25).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계명을 많이 오해하거나 잘못 해석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 계명은 누군가 나에게 신체나 재산상의 손해를 주었을 때 절대로 사적인 보복을 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법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끼친 대로 나도 그 사람에게 똑같이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마음속에 칼을 품고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다 부드러운 것 같지만 속에는 무서운 칼을 갖고 있습니다(막 7:20-23).  그러면 왜 사람들이 이런 죄악의 칼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그것은 자신을 우습게보거나 건드리지 말라는 것으로 만약 건드리면 악을 악으로 갚아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은 구약과 다르게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보복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마 5:38-42).  그렇다면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과 허물을 들추어낸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우리들 중에 살아남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거의 몇 번 아니 죽었어도 수백 번 심판받아 죽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의 잘못에 대한 분노를 느낀다 하더라도 사실 우리는 그 사람의 일부분 밖에 알지 못하고 우리가 모르는 장점도 많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나쁜 짓을 했지만 그를 좋아하는 그의 가족들에게는 그도 여전히 소중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선악 간에 판단하실 하나님께 맡깁니다(롬 12:19).  그러니까 온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주님은 한 번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신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마 11:29).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모습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사 42:3).  이 말씀의 의미는 주님은 꺾을 힘이 얼마든지 있지만 꺾지 않으셨고 훅 불어버릴 수 있는 힘이 있지만 끄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며 진리로 공의를 베푸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온유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온유하셨다면 그분을 믿는 주의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도 그분처럼 온유한 성품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벧전 2:21).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은 해를 당할 때 절제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며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깁니다(눅 23:34).  이것이 바로 천국백성들만이 가지고 있는 성품입니다.

 

◈ 본문에 나오는 이 세 번째 복은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부동산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땅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주로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대개 약삭빠르고 욕심이 많은 부동산 투기꾼들일 것입니다.  땅을 투기하는 곳에 한 번 가보십시오.  어리숙한 사람이나 정신이 맹한 사람은 거기에 발도 붙여 놓지 못할 것입니다.  전부 눈들이 번쩍이고 단 하나의 정보라도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알려고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이 결국 이 세상에서는 좋은 땅을 다 차지할 것입니다.  하기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 같이 온 정신이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한 평도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차지하는 땅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땅은 일정한 기간이 끝나면 불타 없어질 땅이라는 것입니다(벧후 3:7).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이 세상이 영원히 자신의 것이 될 줄 알고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든 사람이 집에 많은 돈을 들여 인테리어를 했는데 주인이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가 투자해서 꾸민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세든 집도 깨끗하게 사용하면 좋지만 언제가 주인이 비워달라고 하면 나가야 하기에 그런 집에 많은 투자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세 들어 사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한 순간이 되면 모두 다 집을 비어주고 떠나야 합니다(고후 5:1).  그래서 성경은 인생을 나그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벧전 2:11).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의 땅은 인간이 아무리 갖고 싶어도 영원히 가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들 임시로 이 세상에서 땅을 소유하는 것뿐이지 사실 땅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시 102:25, 요 1:3).

 

그렇다면 온유한 자가 받을 기업은 어떠한 땅입니까?  그것은 영원히 썩거나 불타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계 21:1).  이 새 땅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던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너무나도 영혼을 귀하게 생각한 나머지 자기의 것을 하나도 챙기지 않았던 사람들이 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고후 6:10), 실제로는 천국의 새 땅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시 37:8-11).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세상 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철거될 판자촌 같은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슬기로운 사람은 앞으로 들어갈 천국의 좋은 것을 갖기 위해 세상의 것들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눈에 보이는 것은 소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롬 8:24).  그래서 우리는 본 건물 아파트 짓기 전에 모델 하우스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자주 패배하는가?

기도를 너무 적게 하기 때문이다.

왜 수많은 교회 일꾼들이 그토록 자주 용기를 잃고 낙심하는가?

기도를 너무 적게 하기 때문이다.

왜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불이 타오르지 않는가?

참된 기도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실패의 원인은

은밀한 기도를 하지 않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정말로 기도가 능력이라는 것을 믿는가?”

“기도가 세상에서 최고의 능력임을 확신하는가?”

“기도가 세상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을 움직인다고 믿는가?”

“정말 하나님의 기도 명령에 관심이 있는가?”

“기도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들은 여전히 효력이 있는가?”

 

사실 영적생활과 그리스도인의 사역에 있어서 실패들은

모두 기도의 결핍과 부족에 기인한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올바르게 기도하지 않으면, 올바르게 생활할 수 없고, 올바르게 봉사할 수 없다.

얼핏 보기에 엄청나게 과장된 표현 같지만,

성경에 비추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말이 사실인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이나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일은 기도하는 일임을 잊지 말자!

그 이유는 기도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우리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주님은 모든 기도 중 가장 놀라운 기도를 하시기 직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강론하면서 약속하셨다.

어떤 사람의 입술에서 이런 약속이 나왔다면 절대로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하신 이는 천지의 주재이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2-14)

 

이보다 더 확실하고 명백한 말씀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약속이 이보다 더 중요하고 더 크겠는가?

그 어느 누가, 언제, 어디서 이런 엄청난 것을 제시한 적이 있었던가?

이 약속은 제자들뿐 아니라 당신과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기도는 전능하다.

기도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능케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일을 하신다.

 

무명의 그리스도인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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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다 보면 때때로 이런 사람도 믿음의 사람인가 하고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그 중 에 대표적인 인물이 야곱이라는 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로부터 무척 욕심쟁이였습니다. 자기의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인 모태에서부터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아이들이 그의 태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창25:21-22).  태어날 때 모습은 더욱 가관인데 동생으로 태어난 자가 형의 발목을 잡았다고 해서 아이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지었습니다.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창25:26).

 

그는 이후의 여러 가지 행동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계산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같은 날 태어났으면서도 단지 잠시 잠간의 차이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일생토록 동생으로 살아야 한다는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오죽하면 사냥하고 돌아오면서 짐승을 잡지 못해 배고파 돌아온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 것을 요구하였겠습니까?  이것은 그냥 무의식적인 장난처럼 이루어진 거래가 아닙니다.  야곱은 항상 형의 권리를 빼앗고 싶어 했고 그 집념이 허기에 지친 에서의 약점을 기회로 잡아 실현된 것뿐입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맏아들로 족보에 이름 오르는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저 들에 나가 뛰어다니며 사냥하고 사나이의 호연지기를 기르는 대범함 앞에 족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장자권을 따라 가는 족보 뒤에는 메시야 탄생이라고 하는 엄청난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배고픈 에서는 단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가 지닐 수 있는 고귀한 권한을 그저 쉽게 넘기고 말았습니다.  영적인 것에 무관심한 에서에게 하나님은 에돔이라고 하는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창25:30).  이 붉은 것 한 그릇을 먹으며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 팔아버린 에서의 경솔함을 꾸짖고 이러한 그를 미워하신다는 것에 대한 표현으로 별명을 붙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장자권을 쉽게 넘겨 버린 에서도 야곱이 자기 대신 아버지에게 들어가 아버지의 축복 기도를 가로챘다고 하는 말에는 하늘까지 닿는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왜냐하면 이 축복 권은 유산 상속과 매우 깊은 관계가 지어지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다른 형제에 비해 곱절의 상속을 받을 수 있었고 부모로부터 물질의 부요함에 대한 축복의 기도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헷 족속의 딸 유딧과 바스맛을 아내로 맞아 부모의 근심을 끼친(창26:35-36), 에서는 육에 속한 자였으며 하나님의 미움을 산 자였습니다.  야곱은 이러한 에서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취했지만 그 방법이 정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생전에 보지 못하는 징계를 당하고 맙니다.  이렇게 욕심 많고 계산에 철저한 야곱은 바로 많은 현대인들의 상징이 되면서 그의 연단과 시련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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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술에 물을 탄 듯 물에 술을 탄 듯 설교하는 설교자는

누구도 도울 수 없고 누구도 성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연히 일어나 외치는 선지자는

많은 사람들을 자극할 것이고 그들을 화나게 할 것이다.

설교자는 대중에게 야합할 수 있지만 선지자는 오히려 대중을 질타한다.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얻고 성령의 불로 활활 타오르는

그를 매국노라고 낙인찍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사람들의 죄악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가혹하다는 비난을 들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혀가 날카로운 칼처럼 찌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극단주의라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

왜냐하면 옳은 것을 끝까지 주장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대제로 환영받지만 선지자는 거의 대부분 박해를 받는다.

만일 세례 요한과 엘리야가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설교한다면

한 달도 되기 전에 감옥이나 정신병동으로 보내지는 신세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죄를 지적하는 그들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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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언자”라는 단어를 대할 때 사교의 지도자들이나 협잡꾼을 연상하는 것 같고 또 어떤 사람들은 현대의 초자연적인 계시는 성경에 새 책들을 추가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강력하게 반대를 하면서 예언자란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오류가 없는 성경을 기록한 사도바울 등을 닮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렇듯 오늘날 구약시대 선지자들이나 신약시대 사도들이 지녔던 권위를 가진 사람은 없기 때문에 예언과 예언자들 및 초자연적인 계시는 신약시대의 마지막 사도가 사라짐과 더불어 종식되었다고 결론을 짓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 신빙성이 있는 유일한 형태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커뮤니케이션은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필요로 하는 모든 지시를 자신의 성경지식 안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것은 바람직한 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이러한 종교적인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영역을 떠나 종교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마치 부지런히 성경을 공부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바리새인들처럼 말입니다(요 5:37).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요 10:27).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채 성경을 공부했기 때문에 경건이 없는 지식의 영역으로 들어갔고(마 23:1-7), 이것은 이들의 편견과 종교적인 교만을 강화해 주는 지식이었기 때문에 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냈으며(마 23:13-15), 이런 지식은 생명의 없는 말씀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들에게 실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이들의 추종자들을 지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종교적 행위에 만족한다면 교만은 증가하고 편견이 강화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Paul Thigpen은『Did the Power of the Sprit Ever Leaver the Church』에서 “신약 시대가 교회가 출발한 이후로 하나님은 각 시대의 신자들에게 항상 복음 전도자들과 목사들과 교사들, 아울러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역자들을 주셨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에베소서 4장11절에 나오는 말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규칙적으로 장래 일을 예언하며 마음의 비밀을 말하고 정확한 느낌을 받고 꿈을 꾸며 정확한 환상을 본다는 것입니다(행 2:17).  만약 우리가 지혜롭게 이들의 사역의 가치를 인식하며 이들로부터 유익을 얻기만 한다면 이런 사람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그리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문제를 삼으며 걸고 넘어지는 것은 예언하는 중에 실수를 범한 예언자를 거짓 예언자로 몰아붙이고 한번 예언이 맞지 않으면 그 사람은 거짓 예언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단지 하나의 예언이 맞지 않았다고 해서 거짓 예언자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거짓 예언자란 참 예언자의 가르침과 예언을 반대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 말씀을 벗어나게 만들려 하는 사람들이지(신 13:1-5),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예언이 틀렸다고 해서 거짓 예언자라고 판단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7장15절에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분하는 방법은 그들의 사역의 결과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하면 거짓 선지자에게는 나쁜 열매가 나오고 참 선지자에게는 좋은 열매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만약 거짓 선지자가 예언을 할 때마다 정확하게 맞춘다고 해서 이 거짓 선지자를 참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예언이 틀렸다고 해서 거짓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예언이 맞았다고 하더라도 참 선지자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들도 강력하게 미래를 예언하고 증표를 보이기도 하며 이적을 행하기 때문입니다(사 44:25, 렘 23:13, 마 7:21-23, 24:24).  그러니까 예언이 틀린 것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봐야 하는데 발람처럼 돈을 사랑한다면 거짓 선지자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벧후 2:15-16).

 

많은 사람들이 신명기 18장15-22절을 잘못 인용하여 실수로 잘못된 예언하는 자는 거짓 예언자이고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거나 해석을 하는데 이것은 이단처럼 성경 앞뒤 문맥을 다 빼버리고 해석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명기 본문을 전체적으로 보면 예언자를 대상으로 쓰여진 말씀이 아닌 것을 잘 알 수 있는데 15절에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나와 같은’은 곧 예언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데 모세는 성경의 모든 예언자들 중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유일한 사람이었고(민 12:6-8), 하나님의 언약을 깊이 묵상하는 자로 사람과 하나님 모두를 대표하는 대변인이었습니다(신 34:10-12).  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주실 것이라고 했을 때 그는 메시야를 뜻하는 것으로 신명기에 거짓 선지자들이 죽음을 당해야 이유는 그들이 저지른 실수 때문이 아니라 감히 모세를 흉내 내어 사람들을 가짜 신들에게 인도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렘 23:9-32, 행 13:6-8).

 

더 나아가서 예언자가 저지른 실수를 추궁하여 사형의 벌을 내렸다는 뒷받침이 될 만한 성경구절을 구약에서 찾을 수 없으며 신명기 18장15-22절을 실수한 예언자를 추궁하기 위해 인용한 예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 Peter C. Craigie는『The Book of Deuteronomy』에서 “이러한 기준들을 예언자가 입을 열 때마다 엄격하게 적용해야 할 규칙으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지어도 좋다는 말을 전하는 실수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단지 나단의 말을 정정하셨을 뿐 그로 인해 나단 선지자를 거짓 선지자라 부르는 자도 없었고 돌을 던지려는 자도 없었습니다(삼하 7:1-17).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예언이 사람들의 어떤 조건들을 충족시켜 그 결과를 바꾸게 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있었는데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에게 죽을 것이라고 말을 했지만 히스기야는 죽지 않고 살았을 때와(왕하 20:17), 니느웨에 대한 요나의 메시지가 성취되지 않은 경우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거짓 선지자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욘 3장).

 

또한 사도행전 21장 10-11절에 보면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예언하지만 아가보의 예언은 맞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결박당했다는 내용도 없고 유대인들이 바울을 로마에 넘겼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아닌 로마인들이 두 번이나 바울을 결박했고(행 21:33, 22:29), 유대인들은 단순히 이방인에게 넘겨주려고 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게 바울을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고(행 23:12-14),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천부장을 통해 여러 차례 무력으로 구출되어야만 했습니다(행 21:27-36, 22:22-24, 23:10, 16-36).  물론 이런 결과는 후에 로마인들에게 넘겨주는 계기가 되었지만(행 28:17), 이렇게 틀린 예언을 한 아가보를 거짓 선지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신명기 18장15-22절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은 구약 선지자와 신약 선지자의 차이를 아직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매우 훌륭한 이사야나 예레미야를 예언자적 사역전체의 표본으로 삼고 오늘날 예언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기 때문에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 기적, 그리고 예언의 정확성을 기준으로 거짓 선지자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그들의 사역이 맺는 열매를 보고 구별해 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6:43-44).  그리고 만약 예언자들의 실수가 절대 용납될 수 없었다면 왜 사도바울이 ‘예언 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라는(고전 14:29), 명령을 교회에 내렸겠습니까?  모든 교사들과 목사들, 그리고 선교사들도 얼마든지 실수를 범하고 베드로 역시 위선된 모습과 실수를 안디옥 교인들에게 저질렀고 이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바울에게 심한 질책을 받았습니다(갈 2:11-12).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며 저주하고(마 26:69-75), 또 신자들 앞에서 실수했기 때문에 거짓 사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벧후 1:1).  그렇다면 우리 역시 예언자들에게 어느 정도 관용을 베풀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왜 예언자적 사역만이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고 관대함 속에서 자라날 수 없는 분야가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거짓 예언과 서투른 예언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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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주일 저녁,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 지방 웨체스커의 어느 강당에서

앤드류 머레이 목사 밑에서 부목사로 있던 J. C. 드브리스 목사의 인도로

60명의 청년들이 중보기도회를 하는 동안 갑자기 성령의 불이 임했다.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일시에 소리 내어 기도하기 시작했다.

1858년경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굉장히 비정상적인 현상이었다.

 

앤드류 머레이는 주일 저녁 설교를 막 마쳤을 때

청년 모임에 특이한 현상이 있다는 것을 보고 받았다.

현장에 가보니 놀랍게도 모든 사람이 동시에 기도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인데

부목사는 통제할 생각이 없는지 책상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앤드류 머레이가 사람들에게 돌아다니며 조용히 하라고 당부했지만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고함을 질렀다.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여러분의 목사입니다. 조용히 하십시오!”

그러나 여전히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고 기도는 계속되었다.

각 사람마다 견딜 수 없는 죄의 무게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데 몰두해 있었고,

드리브스는 하나님이 임하시는데 대한 거룩함과 경외함으로 계속 책상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앤드류 머레이는 힘껏 고조된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다 같이 찬송가를 부르게 하려고 애쓰다 결국 당혹스레 홀을 떠나며 탄식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신데, 여기는 모든 게 엉망이군!”

그러나 드브리스는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에 압도되어 계속해서 고요히 기도했다.

 

또 다시 그 신비스런 천둥소리가 세차게 울리더니

점점 더 가까워져서 마침내 건물을 온통 감쌌다.

청중들의 자발적인 통성기도가 터져 나오자,

이번에도 앤드류 머레이는 통로를 걸어 다니며 조용히 시키려고 애썼다.

 

마침 미국에서 성령이 강하게 임한 부흥의 현장을 보고

얼마 전에 돌아온 방문객이 그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이 교회 목사님이시군요. 하지만 행동을 조심하십시오. 주의 영이 역사하고 계신 것이니까요”

 

후에 앤드류 머레이가 홀로 하나님께 나아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보여 달라고 물었을 때,

성령님은 이것이 당신의 역사임을 확인시켜 주셨다.

이 귀한 주의 종은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했던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그동안 성령의 깊은 역사를 방해했노라고

깨어진 심령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앤드류 머레이의 깊이 있는 가르침과 저술을 통하여

전 세계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더욱 그리스도를 향해 자라갔다.

나 역시 그 중에 한 사람이다.

이 이야기는 에드윈 오어(J. Edwin Orr)의 책 『The Fervent Prayer』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목사라도 하나님께서 영적인 눈을 열어 주지 않는다면(엡 1:17-19),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문외한으로 전혀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기독교 교회사를 보면 항상 참 부흥,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날 때,

이것을 가장 반대했던 세력들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가톨릭이 개혁자들을 이런 이유로 박해했고,

개신교가 성령이 임한 신자들을 이런 이유로 핍박했습니다.

왜 이들이 이렇게 심하게 핍박을 했습니까?

그것은 제도주의와 예의, 그리고 질서와 형식과 의식이 중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처럼 모든 것을 질서대로 통제하려는 의도 때문에,

위엄 있는 종교를 원하여 혼란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도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교회는 죽은 정통과 죽은 형식주의에 빠진,

성령이 소멸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데 교회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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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 비판하는 자세부터 취합니다.  그래서 나와 전혀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에 있기 보다는 최소한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거나 나쁘면 적대적인 관계가 되기도 합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사고의 체계로 그 사람을 이해하면 성격이나 습성 등 모든 면에서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은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은 예수가 되려는 제자훈련생이라면 나와 전혀 다른 사람과도 건강한 관계를 세우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들이 필요할까요?  이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대인관계 기술들이 계발되었지만 오늘은 우리의 마음 자세와 관련하여 놓쳐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1. 그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라

때로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도대체 저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겠어?” 라든지, “저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다 없어져야 해!” 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모든 면에서 나와 다른 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귀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와 내가 다르다는 사실 뿐입니다.  서로의 다름의 문제만 해결하면 그 역시 나만큼이나 이 세상에서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가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은, 나와 다른 그의 그런 모습도 이 세상에 꼭 필요한 그리고 이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 부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 가장 필요한 자세는 그 존재 자체에 대한 인정입니다.  그를 귀히 여길 줄 아는 마음 그리고 그 역시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시고 영광 받으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2. 그도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두 번째 자세는 만일 당신이 누군가와 전혀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면 그 고민의 당사자 역시 당신으로 인해 고민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즉, 둘 사이의 다름으로 인해 일어나는 문제의 원인은 상대방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때문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객관적으로 드러난 문제에 대해서는 잘잘못을 분명히 가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는 나와 다르다고 해서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 두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관계 중심적"인 사람은 "업무 중심적"인 사람의 일처리를 매우 못마땅해 합니다.  그래서 ‘관계 중심적’인 사람의 눈에 보기에 업무 중심적인 사람은 비인간적이고 너무 냉정하게만 보입니다.  그런 나머지 업무 중심적인 그 사람에 대해 “저런 사람과 같이 일하는 건 정말 지옥 같은 일이야!”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에서 업무 중심적인 사람의 눈에는 관계 중심적인 사람이야말로 이 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래도 관계 중심적인 사람은 일 그 자체보다는 사람들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되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일에 영향을 받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업무 중심적인 사람들은 관계 중심적인 사람들의 태도 때문에 업무가 방해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올바른 태도는 내가 문제시하는 그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오히려 내가 문제가 더 큰 사람일 수 있다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즉, 나의 시각으로 상대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시각으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먼저 나를 보고 나와 다른 그를 본다면 나와 다른 그의 모습이 문제가 아니라 그와 다른 나의 모습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문제 해결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3. 그를 인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인정하라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서로 다른 유형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그냥 덮어버리는 것으로 해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별 다른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버리는 것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렇게 덮어버리는 태도를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결코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자세는 그와 나의 다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표를 함께 이루어가기 위해 하나 됨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목과 볼록은 서로 완전히 다른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들어가 있고 하나는 밖으로 튀어 나와 있습니다.  문제를 덮어 버리는 태도는 “너는 들어갔고, 나는 나왔다”라고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 올바른 상호 인정의 모습은 서로 들어가고 나온 부분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외부에서는 그 둘이 서로 다른 각각의 하나가 아니라 잘 연결된 하나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뿐만 아니라 그 사람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그 사람이 하나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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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그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셔서 당신과의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를 추구하십니다.

그 사랑의 관계를 사실적이며 개인적이며 실제적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는 어떤 일보다도,

당신의 전 존재를 받쳐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당신을 창조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올바로 되어 있지 않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행하고 경험하는데 관련된 모든 것이 엉망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 어떤 사명을 받고 있음을 느낄 때 사랑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하나님은 사명을 주시기 전에 당신이 관계로의 초청에 응하기를 기다리실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오늘날 현대교회는 눈물이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들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심각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고 누군가 눈물을 흘리거나 애통해 하면 거부감을 일으키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것이라면 짧게 하든지 아니면 그냥 넘어가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고 가능한 할 수 있는 대로 즐겁고 신나게 웃고 떠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주일날 말씀을 듣더라도 기분 좋게 웃으며 듣는 것을 좋아하지 심각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 진지하게 말씀 듣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제가 어느 신문에 “유머설교 세미나”라는 광고가 실린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웃기면 분위기가 좋아지고 실컷 웃어야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설교를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웃으면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을 닮아가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8장29절과 15장5절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신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모습 중에 하나는 예수님께서 웃으시는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에게는 웃을 일이 많지 않으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분이 화를 내셨다는 것과 배고픔과 갈증으로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말하고는 있지만 웃으셨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기록이 없다고 하여 그분이 평생 동안 전혀 웃지 않았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지만, 성경에 주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 심각히 생각할 필요는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생애를 고난 받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인간의 죄 때문에 고난 받는 그분의 모습 속에는 웃음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사 53장).

 

반면에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세 번 우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번은 친구 나사로 무덤 앞에서(요 11:35), 또 한 번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눅 19:41),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천사의 도움을 받으며(눅 22:43-44), 땀이 피 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할 때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히 5:7).  주님은 웃으시는 것보다는 우리의 죄 때문에 우셨습니다.  그렇다면 주의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을 본받아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가운데(벧전 2:21), 우리도 죄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현재 믿는 자들이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도취에 빠진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면서(계 2:17),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들며 세상에 푹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눅 17:27-28).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애통이 빠진 웃음은 저주요 불행이라고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눅 6:25).

 

◈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인간에게는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격은 하나님 앞에 조금도 부끄러운 것이나 손색이 없었고 흠이나 점을 찾아볼 수 없는 당당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의 몸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가져온 결과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참히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롬 3:9-18).  많은 예를 들 수 있지만 가령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윤락여성들이나 범죄자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물론 그들도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범죄자로 전략되어 사회에서 “막가는 인생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과연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뿐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사는 모든 인간은 파괴된 그분의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은혜와 믿음을 부어 주시면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지금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파멸에 빠져 있으며 자기 안에 무서운 죄성이 지배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한마디로 너무나도 망가져 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스스로 엄청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이 무서운 심판받을 죄인이며 더럽고 추악한 죄악을 밥 먹듯이 짓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에게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요?  그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라고(롬 7:24),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회개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몸을 팔던 여인처럼 향유를 주님께 붓고 지난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하염없이 울게 될 것입니다(눅 7:36-50).  본문에 나오는 ‘애통하는 자’란 성전에 서서 기도하는 세리처럼 자기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을 말합니다.(눅 18:13).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 붙인 95개조의 반박문에서 “우리의 전 생애는 끊임없는 회개와 뉘우침의 연속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아들,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눈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애통함은 죄를 씻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눈물을 먹고 자라나고 우리의 인격은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성숙해져 갑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눈물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죄 때문에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마 고린도 교회처럼 죄를 묵인하기만 하지 그것 때문에 비통해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고전 5:2).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자기 죄 때문에 애통하고 통회하는 사람들이 드리는 상한 제사이고, 그분은 자기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시 51:17).

 

◈ 죄를 짓는 사는 사람에게는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성경은 “악인에게 평강이 없다”라고 말합니다(사 48:22).  이 말의 의미는 자기 죄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회개치 않는 사람에게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롬 2:4-6).  다윗은 간음과 살인죄를 저지른 후에 그 죄를 감추고 거의 일 년간 회개치 않고 살았습니다(삼하 11장). 그런데 죄를 감추고 있는 동안 그의 마음은 몹시도 괴롭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왕위를 빼앗기는 것보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더욱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렇게 죄를 감추고 있는 동안 그의 속은 자꾸 썩어 들어가고 있는데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회개의 자리로 초청해주셨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의 죄를 책망하신 것이었습니다(삼하 12장).  다윗은 책망을 받고 그동안 감추어 두었던 무서운 죄를 다 쏟아 놓고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우리 생각 같으면 죄가 들통 나지 않고 가만히 덮어 두고 넘어가는 자가 복이 있을 것 같은데, 다윗은 온갖 창피를 다 당하고 눈물 콧물 흘리면서 자기 죄를 다 토하고 난 후, 죄 용서함을 받는 자가 참으로 복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인간은 죄 용서함을 받기 전까지 늘 쫓기는 심정으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심판이 언제 자기에게 임할지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반면에 자기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위로가 무엇입니까?(마 5:4).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이 두렵지 않고 심판이 겁나지 않습니다(롬 8:1-2).  이것은 마치 스스로 죄를 인정하여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법정에서 판사가 무죄를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럽겠습니까?  판사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에(롬 5:1),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움을 가지고 쫓겨 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벌벌 떠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심판대 앞에서 그들이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회개치 않았던 모든 죄들이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롬 2:16).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청빈하다고 존경받던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서는 가장 추잡하고 더러운 자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더러운 죄를 많이 지었고 틀림없는 죄인임을 자기도 알고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심판대 앞에 가보니까 그가 지은 죄들이 모두 다 지워져 있고, 단 한 줄의 죄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사람은 심판받기 전에 이미 자신의 죄에 대해 철저하게 애통하며 회개를 했기 때문에 모든 죄와 허물이 가리어져 있는 것입니다(롬 4:6-8).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신의 죄 문제로 고민해 본적도 없이 무의미하게 낄낄대고 웃는 사람들입니다(전 2:1).

 

◈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할 것은 위로받은 자가 다시 애통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안에서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다시는 정죄함이 없고(롬 8:1), 그분의 사랑에서 끊을 수도 없습니다(롬 8:35).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죄 용서함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까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일한 죄에 빠지기도 하고 그 결과 무서운 영적인 침체에 빠지기도 합니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심한 죄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고 알고 범하는 죄에 대해서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마음이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아니지만 말입니다(딤후 1:7).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침체이지 과거처럼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엡 2:12-13).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번 범죄 하면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원수 된 상태에 빠지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성령이 소멸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단절될 수 있습니다(살전 5:19). 다시 말하면 죄를 지으면 성령 하나님이 근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엡 4:30).  그렇지만 이렇게 죄지은 사람이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 앞에 회개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은 곧바로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켜주십니다(요일 1:19).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을 때마다 다시 애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전의 애통과 다른 구원받은 자의 애통입니다.  이 애통을 통하여 더 깊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 천국과 지옥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지옥은 이미 수많은 영혼들을 삼켜 버렸고 아마 지금도 수없이 많은 영혼들이 무서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천국으로 가는 사람들보다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합니다(마 7:13-14).  천국에 어떻게 갑니까?  주일날 교회만 들락거리거나 등록카드나 결신카드에 서명을 하고 물세례만 받으면 갈 수 있습니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주님 앞에 상한 심령으로 자기 죄에 대해 애통하지 않는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때(마 4:17), 세례요한이 처음 증거할 때(마 3:2), 베드로가 오순절날 처음 설교할 때 가장 먼저 회개할 것을 외쳤습니다(행 2:38).  자기 죄 문제를 가지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울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올라온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 많이 울었던 사람들입니다(계 7:17, 21:4).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현재 무엇 때문에 울고 계십니까?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성령은 그의 직무에 있어서 많은 사역을 행하시는데 거기에는 회심, 특별히 중생이 포함되고,

또한 그는 우리를 성화시키는 사역을 하십니다.

덧붙이면 성령은 확신과 보증,

그리고 그와 더불어 증거와 증언 및 봉사와 사역의 문제에 있어서 위대한 활동을 하십니다.

성령의 이러한 사역들을 분명한 구별이 있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는 끝없는 혼란이 있게 됩니다.

그의 사역은 이렇게 분류되어 질 수 있습니다.

일반사역특수사역, 다른 말로 쉽게 표현하면 그의 간접사역직접사역입니다.

 

성령은 오늘날 교회에 임재해 계시며, 또한 그곳에서 일반사역을 하시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역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성령의 일반사역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독교의 부흥에 대해 살펴보는 그 순간,

그것들이 교회사에 현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도 그것들은 성령의 사역이며 성령이 동작주(operator)가 되시지만,

그는 이제 예외적이고 드문 방식으로 작용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신데,

그의 일반사역, 즉 성령은 우리 마음에 그의 뜻을 밝히시며,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열어 보이시며,

우리를 가르치는 자나 전파자로 사용하십니다.

지금 성령의 사역이 다소 간접적이지만,

그러나 성령께서 직접적인 방식으로 작용하신다는 것이 분명하며 명백합니다.

 

실로 이것은 구약에 있는 성령의 사역과 신약의 성령의 사역과의

뚜렷하고도 가장 큰 차이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성령은 특별하고 직접적인 사역을 위하여 구약에서는 어떤 사람,

즉 선택된 사람, 예를 들면 선지자와 같은 사람에게 임하셨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고,

그들이 일종의 무아경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점에 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가 그들 가운데 조용히 역사하고,

또 그들의 능력을 조금 높여 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는데, 계시와 능력에 관한 의식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어떤 사역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은 그 특별한 목적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요엘이 말했듯이 이와 같은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롭게 임하실 때를 우리가 보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큰 차이점은 성령을 받게 될 사람들이

아주 다양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 풍성함과 부요함 그리고 불가항력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교회사에서 특히 부흥기들에 있어서 아주 흔하게 입증되어 온 것입니다.

 

저는 300년 전의 청교도들 가운데 위대한 지성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존 오웬 박사의 진술을 인용하려 합니다.

이것은 그의 글 “성령과 교제에 대한 논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성령은 어떤 사람들이나 그 자신의 사역들,

혹은 어떤 논리나 추론과 결론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부어 주시고 또 즉각적인 사역,

마치 성령께서 엘리사벳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라이의 방문을 받았을 때,

세례요한을 복중에서 기뻐 뛰어놀도록 하셨던 것처럼,

그들을 즐거움으로 가득 채우실 때,

그때에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또한 기쁨과 환희가 넘쳐 나게 됩니다“

 

이제 존 오웬과 같은 사람으로 그와 동시대 사람이며,

이 영적 창공에 밝게 비추고 있는,

또 다른 별인 토마스 굳인 박사의 글을 인용하려 합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에 임하시고 인간을 압도하시며,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되시고,

또 그는 하나님의 것임을 확신시켜 주며,

그리고 하나님이 영원부터 그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빛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빛은 일반적이 신앙의 빛을 넘어선 빛입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고 있는 요점인데 즉 일반적이 아니라 예외입니다.

토마스 굳윈에 따르면 이것은 어떤 다른 것이 할 수 있는 것보다,

여러분을 하늘나라에 더 가까이 인도하는 체험으로,

그것은 실로 하늘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제가 다시 엄중한 경고를 주어야 할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이것은 평상적인 아니라 바로 천국 문에 이르기 위한 비상하여 예외적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것을 넘어선 단 한 가지의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그 자체가 영원한 영광입니다.

 

저는 여러 면에서 여기 두 사람과는 아주 다른,

특별히 그의 신학에 있어서 다른 사람인 요한 웨슬리의 글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그는 18세기의 사람으로 청교도나 개혁주의나 칼빈주의자가 아니라,

알미니안 교리의 선생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확하게도 위의 두 사람과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반성이나 논쟁의 결과가 아니라 즉적적이고 직접적인 어떤 것입니다.

거기에는 기쁨과 평강과 사랑을 미리 맛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기만이 아니라

참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 증거를 가지기 오래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교회 역사상 세 분의 뛰어난 사람들에 의한

성경적 교훈에 대한 가르침과 해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 세 분 모두는 체험의 즉각적이고 직접적이고 또 압도적인 성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교회의 생활에서 이것과 성령의 일반작용과를 혼동하는 것은,

실제로 매우 중대한 면에서 성경을 오해하는 것이며,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짓는 데로 나아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제가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결코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이란 이 구절을 설명해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여러분 가슴 깊이 간직해야 할 시금석입니다.

 

오늘날 제가 느끼는 우리의 가장 큰 위험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억제를 옹호할 때가 아닙니다.

즉 오늘날 교회에서 자제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깨어 일어나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에서 교회가 약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 『성령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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