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자세히 살펴보면 세 가지 유형의 교회로 나타나는데 칭찬만 받은 교회가 있는 반면에 책망만 받은 교회가 있고 또한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받은 교회가 있습니다.  먼저 전통적인 틀에 매여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가고 있는 에베소 교회와 발람의 거짓 교훈을 받아들여 세속주의로 물들어 버린 버가모 교회 그리고 많은 일들을 했지만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들어와서 교회 전체가 음행에 빠져 버린 두아디라 교회, 이미 죽어서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데 교회는 예수님께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받은 교회들입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은 없고 칭찬만 받은 교회로 핍박을 받아가면서 적은 능력을 가지고 승리한 교회들입니다.  오늘 보게 될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은 없고 책망만 무섭게 받은 여러 가지 중병에 걸린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아무런 형식이 없이 그냥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분명하고 일정한 패턴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계시록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합니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공통점 중에 하나는 항상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님에 대한 모습은 각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와 상황들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셨는데 그것은 주님이 나타나신 모습을 통해 그 교회의 신앙상태를 한눈에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은 교회에서 무슨 일과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를 훤히 알고 계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시는데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본문에 보면 두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계 3:14).

 

하나는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오직 예수님만이 진실하시고 참된 증거자라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거짓된 진리와 거짓된 증인들이 많이 있지만 참된 진리를 증거 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요 14:6).  주님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는 한 번도 참된 진리인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하지 않은 교회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른 하나는 그분을 ‘창조의 근본’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창조의 근본’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창조자 하나님이 되시며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골 1:15-18).  이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님의 진정한 다스림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이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기는 하는데 왜 존재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참된 진리와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가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라오디게아 지역에 분명히 교회가 존재하고 있기는 한데 이 교회는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의 다스림을 받아 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사실 많은 예배를 드리고 여러 행사와 활동들이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 많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교회 안에 함께 하시도록 초청되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성경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기록한 이유는 오늘날도 그러한 교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로 라오디게아 교회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세상 것들이 주님의 눈에는 가증스럽고 추한 것들 밖에 없어 입에서 토하여 내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답답한 사람이 있다면 자기 자신이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인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문제가 무엇이며 어떤 점을 고쳤으면 좋겠다는 것을 다 알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경우인데 본문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그러한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어려운 환난이나 심한 핍박을 받은 적이 없고 그렇다고 거짓 선생을 통해 잘못된 이단적인 가르침이나 이세벨 같은 음란한 여자와 놀아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이십니까?  비위가 상하신다고 심한 거부감을 표현하고 계십니다.  이런 표현이 본문에 적절한 것인지 모르지만 주님이 음식을 잘못 드신 것도 아닌데 이 교회를 바라볼 때 토하고 싶을 정도로 구역질이 났습니다(계 3:16).

 

◈ 본문에 중요한 단어들이 나오는데 ‘차다’는 말과 ‘덥다’라는 말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을 대할 때 아무렇게나 해석하고 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영혼을 천국으로 이끌 수도 있고 아니면 지옥으로 보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벧후 3:16).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을 정도의 당시 최고의 선생들이지만(마 23:2), 교인 하나만 생기면 배나 지옥자식으로 만들어 수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낸 사람들입니다(마 23:13-15).  본문을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믿으려면 확실히 믿고 믿지 않으려면 아예 그만두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믿지 않으려면 그만두라는 말이 없습니다.  주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기 여기시는 분이기에 지금도 기회를 주시고 타락한 영혼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벧후 3:9).

 

여기서 라오디게아 교회가 위치한 지리적인 조건을 이해하면 쉽게 ‘차다’와 ‘덥다’가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있는데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북쪽으로 6마일 떨어진 곳에 ‘히에라볼리스’라는 뜨거운 온천이 있어 많은 피부병 환자들이 그곳에 와서 온천욕을 즐겼습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동쪽으로 15마일 떨어진 곳에 8000피트가 넘는 높은 산이 있는데 그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오염되지 않은 물로서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물을 마심으로 기갈을 해소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히에라볼리스에서 내려오는 뜨거운 물은 온천하기에 좋은 물이었고 또 반대로 동편에서 내려오는 물은 아주 차가워서 골로새 사람들의 더위와 갈증을 시원하게 해주는 그런 물이었는데 라오디게아는 두 극단 중간에 위치하여 미지근한 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문에 ‘차다’라는 말은 높은 산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물처럼 전혀 감각이 없는 냉냉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전적으로 거부하고 공개적으로 배척하는 불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덥다’라는 말은 온천물이 펄펄 끊듯이 뜨겁게 불이 붙은 상태로 복음에 대해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상태는 어떠합니까?  이들은 뜨겁게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복음을 거부하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서 ‘미지근하다’라는 말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로(왕상 18:21),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즉 진리의 말씀을 듣더라도 복음에 대해서 관심을 두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열정도 적대감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 ‘차다’와 ‘덥다’라는 말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보이는 반응을 두고 말씀하신 것인데 사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분명히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눈에는 은혜의 눈물이 흐르고 얼굴에 기쁨이 넘쳐나고 입으로는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반면 복음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예수라는 말만 들어도 벌써 얼굴이 굳어지고 입에 거품을 물고 눈에는 쌍심지를 켜고 온갖 더러운 욕설을 하고 그분에 대해 듣기를 싫어합니다(행 13:45).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둘 중에 하나는 분명하게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러한 반응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말씀에 대해서 전혀 관심과 반응이 없었고 말씀을 듣기 전이나 듣고 난 후에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미지근하게 반응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미지근하게 반응하게 만드는 무엇인가 있었는데 그것은 라오디게아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 주는 맛으로 이 세상에서 잘사는 생활들과 화려한 것과 세상풍속들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에 한번 맛을 들거나 마음을 빼앗겨 놓으면 복음에 대해서 미지근한 반응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실은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서는 너무나 민감한 반응을 보였는데 이들은 유행과 변화에 민감하고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부다 알고 있지만 정작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 생활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입술로는 신자인데 행동으로는 불신자라는 것입니다(딛 1:16).

 

주님은 이렇게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무슨 말을 하십니까?  본문에 보면 점잖게 말씀하시는 것 같지는 않으시고 너무나 비위가 상하고 역겨워서 입에 토하여 내치겠다고 말씀하십니다(계 3:16).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토하여 내치다’라는 말인데 이 말은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번 사용하셨던 말씀으로(레 18:25, 28, 20:22),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의 풍속을 쫓아가고 문란하게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면 강력하게 거부하고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레 20:17-23, 엡 6:9-10, 계 22:15).  그러므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토하여 내치다’라는 말은 무섭게 심판을 하시겠다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할 것을 말해줍니다.  쉽게 말하면 구원에서 제외시켜 버리시겠다는 경고성의 말씀입니다(출 32:33).

 

◈ 본문에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계 3:17).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물질적으로 부자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교회는 부자들이 많아 교회에 헌금을 많이 했는데 그 지역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다 모인 교회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의 직업과 학력, 그리고 경력은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에 걸맞게 은행업과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개인 사업으로 직물업을 하는 사람들과 안과 대학교로 유명한 곳이기 때문에 학력이 높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았습니다.  이 교회는 돈 없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자들만 모인 교회라 주후 60년에 큰 지진이 그 지역에 발생했을 때 그들은 로마 정부에서 도와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돈이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적으로 교만한 것인데 이 교회는 자기만족에 도취되어서 자신들은 영적으로 부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어떠한 사람들보다도 은혜를 가장 많은 것처럼 행동을 하고 성경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성경에서 배울 것은 다 배웠다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은 이미 신앙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로 얼마나 많이 배우고 성경적인 지식이 많은지 성경책을 손에서 놓고 더 이상 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가 멋도 모르고 복음에 대해 아느냐고 물어보면 예전에 이미 그런 과정을 다 마쳐서 자신들은 복음에 대해서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고 입술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을 기억해야 하는데 진리의 말씀을 꾸준히 배우지 않는 사람들 모두는 교만하다는 것입니다(딤후 3:14-17, 딤전 6:3-5).

 

더 중요한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를 직접 들어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본인들은 부자이고 영적으로 부요하다고 스스로 자랑하지만 주님의 생각은 그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계 3:17).  “시장철학”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건물을 자랑하고 예산, 숫자, 실적과 같은 외부적인 업적을 자랑하고 내세우는 것을 말하는데 이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번듯한 자체 교회 건물이 있고 재정도 든든하고 교인들도 많아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서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도 교회인가 할 정도로 골병이 제대로 든 교회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불행한 교회를 하나 뽑으라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로 이처럼 영적으로 빈곤하고 비참한 교회가 있을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 그렇다면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본문에는 그 처방약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가지는 것입니다(계 3:18).  이것은 세상적인 부나 금을 모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불로 연단한 금’이라는 말은 어려운 고난을 통과한 연단된 믿음을 말하는데(벧전 1:7), 고난을 통과하지 않는 믿음은 모두 가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의 믿음이든지 그 사람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 되려면 반드시 고난을 통해서 그 순수성을 증명해야 합니다.  만약에 믿음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이 없다면 마지막 심판 날에 불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고전 3:13).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고난을 통과한 진짜 믿음이 아닌 “짝뚱” 믿음을 가지고 종교생활을 여태까지 해왔기 때문에 주님은 진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흰 옷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처음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으로 의의 세마포 옷을 입혀주시는 것입니다(계 19:8).  다른 하나는 흰 옷을 한 번만 입는 옷이 아니라 계속 입고 사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원래 흰 옷은 하나입니다.  주님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며(벧전 2:15), 양심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매순간 그분의 도우심을 바랍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흰 옷을 사서 입어본 적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 많은 돈 어디다 쓰는지 모르겠지만 흰 옷을 사서 입을 돈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흰 옷을 사서 입고 제발 “알몸”으로 다니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서 보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약국에서 안약을 사서 보이지 않는 눈을 보게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서 눈은 육신의 눈이 아닌 영적인 분별력을 말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주변에는 유명한 안과대학교가 있어 육신의 눈을 고쳤을지 모르지만 영적인 눈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사실 육신의 소경보다 더 불행한 것은 바로 영적인 소경인데(요 9:39-41),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은 눈은 떴지만 앞을 못 보는 소경들만 잔뜩 모인 교회였습니다.  본문에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하라’는 말은 영적인 눈을 뜨려면 진리의 성령에 대해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엡 1:17).  왜냐하면 이 교회는 성령에 대해서 전혀 무지했고 에베소 교회처럼 성령이 있음을 듣지 못한 교인들로 가득 찬 교회였습니다(행 19:2-3).  그래서 돈을 아끼지 말고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고전 2:10).

 

이렇게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으로 보면 중병에 걸려도 단단히 걸린 교회로 겉은 화려하지만 속을 썩을 때로 썩은 교회였습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교회가 저절로 썩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가 중병에 걸렸을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병들게 만든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교회는 사람들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교회로 이들이 교회에 오는 이유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살면서 지친 심신을 쉬기 위해 왔습니다.  사실 일주일 내내 먹고 산다고 심신이 지쳤는데 설교까지 골치 아프고 신경을 쓰게 만든다면 누가 교회에 오겠습니까?  그래서 설교는 가능한 부담이 없어야 했습니다.  마치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아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들어야 할 것이 하나도 없고 죄에 대한 책망이나 지적을 듣는 것은 꿈같은 얘기였습니다.

 

◈ 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이한 것은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거듭난 사람들은 별로 없고 자기 죄에 대해서 애통하며(마 5:4), 회개한 사람들이 거의 전무후무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들끼리 모여서 세운 교회라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은 그 곳에 없었습니다(엡 1:22-23, 골 1:18).  본문에 그것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데 이들은 주님을 한 번도 마음에 모셔 들인 적이 없기 때문에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닌 사람들이었습니다(계 3:20).  아마 목사 아니면 장로나 집사들이 이 교회에서 목에 힘을 주고 목소리 높여 가면서 주인 노릇을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 현대교회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말합니다(계 3:20).  우리는 이 말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많이 사용하는 말이지만 그러나 본문은 불신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계 3:14).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스스로 영적으로 부요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분문에 보면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말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이미 오래 전부터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을 두드리는 동안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인간적인 교제를 재미있게 나누었을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교회 밖으로 쫓아내고 문을 닫아 버린 상태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밖에 서서 계속 문을 두드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바울 성당에 홀만 헌트라는 화가가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에는 오두막 같은 집에 예수님이 등불을 켜고 찾아오셔서 그 집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주님이 서 계신 집의 문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집 주인이 안에서 열어주기 전까지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문을 열어 줄때까지 주님이 문 앞에 서서 계속 두드리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마음의 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고리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데 내가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주님은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철저히 인정하고 회개하여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셔드릴 줄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교회는 누구를 위해 예배를 드리러 모였는지 몰랐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서 한결 같이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기는 자에게만 상급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계 2:7, 11, 17, 26, 3:5, 12, 21).  이 말의 의미는 이기는 자가 있는 반면에 지는 자들도 있다는 것인데 만약에 이기지 못하고 지면 어떻게 됩니까?  영적전쟁의 패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보좌에 앉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영적전투에서 피 흘리기까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히 12:4).  신앙생활에서 은혜로 구원받는 것 외에 나머지 모든 것들은 그냥 되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힘써 싸워야 합니다(엡 6:10-13).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그냥 앉으신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하늘보좌에 앉으셨습니다(요 16:33, 막 16:19).  그분은 우리의 모델이시기에(벧전 2:20-21), 우리들도 주님처럼 믿음으로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본문에 ‘이기는 자’라는 말이 나오는데(계 3:21), 이 말은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굳게 지킨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고난의 불을 통과한 사람들로서 주님을 위해 고난당한 흔적을 몸에 가지고 살았습니다(계 7:14, 14:12).  또한 이들은 다니엘처럼(단 1:8), 자기 양심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세상의 좋은 것들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로(계 14:4-5), 정말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난 속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스데반이 순교 직전에 바라봤던 하늘의 보좌에 앉는 것입니다(행 7:55-56).  여기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은 최고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말하는데 마치 예수님이 악한 세상에서 승리하여 아버지의 보좌에 앉으신 것처럼 누구든지 싸워서 이기는 자들도 주님의 보좌에 앉게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됩니다(계 3:21).

 

◈ 하나님은 참으로 공평하신 하나님이신데 절대로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동시에 다 가지도록 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마 6:24).  두 가지 다 동시에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세상에 있는 좋은 것들을 다 가진다면 하늘에서는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가운데 오직 주님만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면서 끝까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마 16:24). 이러한 사람들은 하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며 다시는 눈에 눈물을 흘리거나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계 21:4).  여러분들은 지금 어떠한 신앙의 온도를 소유하고 계십니까?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 그리고 미지근한 것 중에 어느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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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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