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갑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며 여든여섯에 순교의 제물이 되었던 사람으로 당시 폴리갑을 잡아서 심문하던 총독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시이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이 말을 들은 폴리갑은 “내가 팔십 육년 동안 예수님을 믿었지만 주님은 단 한 번도 내게 나쁜 일을 행하거나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나를 배신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그분을 배신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고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폴리갑이 원형극장 안에 들어섰을 때 하늘에서 “폴리갑, 남자답게 담대하라”는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마침내 폴리갑은 11시에 경기장에 끌려가 오후 2시에 화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는 폴리갑 같은 순교자의 정신을 잘 이어받은 주님 보시기에 단점이 없는 모범된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은 다 똑 같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지역과 형편에 따라서 교회의 사정들이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 교회는 처음부터 쟁쟁한 주의 종들이 사역한 곳으로 많은 열매가 있었던 곳입니다.  교인들은 분별력이 있고 참고 견딜 줄 알며 엉터리 거짓 선생들이 통하지 않았던 교회였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이러한 교회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싸움이 끝난 교회며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안정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교회에 대해서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첫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의 문화와 생활은 있는데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계 2:4-5).  여기서 “촛대를 옮긴다”라는 말은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전투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서머나 교회는 늘 환난과 궁핍한 생활 속에 온갖 핍박을 다 받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에베소 교인들이 보기에는 가장 불쌍한 교회로 보였을 것입니다.  사실 사도행전에 자세히 보면 ‘서머나’라는 이름은 나와 있지도 않는데 아마 이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인 관점에서 별로 중요한 곳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아무튼 이렇게 교회마다 형편이 달랐고 주님도 각 교회 형편에 따라 나타나시는 모습이 달랐는데 모든 교회에 다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책망을 받을 교회에는 심판자의 모습으로 위로를 받을 교회는 인자한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렇듯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한 결 같이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신 적이 없고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계 2:1, 8, 12, 18, 3:1, 7, 14).

 

본문에 보면 주님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시는데 하나는 ‘처음이요 나중이요’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2:8). 이 말은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영원하신 주권자”라는 뜻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을 의미하며(계 22:13), 창조주와 심판주로서 과거에도 계시고 현재에도 계시고 미래에도 계시는 분으로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사 41:4).  다른 하나는 주님을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묘사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주님은 고난과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요 11:25-26).  왜냐하면 주님은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해보신 분으로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분이기 때문에(계 1:18), 주님이 이렇게 나타나심으로 지금 환난을 당하는 서머나 교회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무서운 심판을 재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괴롭히고 핍박하며 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서머나 교인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실제로는 이 우주에서 가장 강한 자의 성질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며 그를 대항하여 시비를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행 9:1-5).  이들은 지금 자신들이 누구를 상대로 해서 싸우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행 22:7-8).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고 핍박을 한다고 해서 복수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눅 6:27-35), 그는 지금 나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상대로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바울이 멋모르고 날 뛰면서 주님을 대적하여 싸운 것처럼 말입니다(행 26:14-15).  그러기 때문에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은 주님을 핍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요 15:18, 행 8:3).

 

◈ 본문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무서운 환난 속에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계 2:9).  이 교회는 종교적인 핍박과 환난을 많이 당한 교회로서 육체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 속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생활을 하다가 잡히면 정원에 불을 밝히는데 이들을 횃불로 사용하기도 했고 교인들을 양의 가죽이나 짐승의 가죽을 입혀서 산에다 풀어 놓아 마치 동물을 사냥하듯 살기 위해서 도망치는 이들을 잡아다가 잔인하게 죽였습니다(히 11:37).  뿐만 아니라 서머나 신자들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난한 생활을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족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 더 과격하게 악행과 훼방으로 신자들의 재산을 약탈해 갔기 때문에 이들은 절대적인 빈곤 속에서 굶주려가며 힘든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히 10:24).

 

주님은 이렇게 환난을 당하고 가난한 서머나 신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계 2:9).  본문에 ‘실상은 부요한 자’라는 말은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아가면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부자라는 것입니다(고후 6:10).  여기서 주님의 생각과 우리들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사 55:8-9), 우리들 보기에 서머나 교회는 별 볼일 없는 초라하고 가난한 교회로 보일지 모르지만 주님은 신앙적으로 윤택한 교회로 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아가며 고난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진짜 천국백성으로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벧전 4:12-14).  그러기 때문에 정말 주님을 잘 믿으려고 하면 물질적으로 궁핍해 질 수가 있는데 그것은 불법과 타협하지 않는데서 오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약 2:5-6).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풍성함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막힌 것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사 1:15-17).  서머나 교회는 겉은 초라해 보이지만 주님과의 막힌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드리는 기도는 바로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직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당하는 환난은 주님이 함께 느껴지지 않는 고통과 아픔은 없었습니다.  이 교회는 가장 어렵고 힘든 상황에 있었지만 성도들 사이의 사랑은 풍성했으며 또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체험도 가장 많았던 것입니다.  분명히 편안한 신앙생활은 아닌데 매 순간마다 주님은 그들을 지켜 주시고 피할 길로 열어주신 것입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겉으로는 부유했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속이 골병든 교회로서 그것도 여러 가지 합병증을 가진 교회로 평가를 받은 교회였습니다(계 3:17).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부자는 경제적인 부가 아니기 때문에(마 5:1-11), 하나님 앞에서 부요해지려면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령 내가 가진 것을 쓰지 않고 어려운 사람을 주면 그것은 하나님께 꾸어 주는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께 꾸어준 것이 많은 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들입니다(잠 19:17).  이런 면에 있어서 서머나 신자들은 주님께 꾸어준 것이 많았습니다.  예를 든다면 옆집이 어려움에 처하면 도와주었고 또 친구가 잡혀가면 그 집 아이들을 대신 돌보아 주고 또 감옥에 있는 자들을 돌보아 주어야 했었기에 이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쓴 것이 많았고 그만큼 부요한 자들이었습니다(마 25:34-40).

 

만약 어느 잘살고 어려움이 없는 교회가 있는데 모든 것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고 분명히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지만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런 교회는 실제로는 가장 가난하고 병든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꾸어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약 2:15-16).  내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 것은 하나님께 꾸어드릴 절호의 기회입니다(잠 22:9).  그러므로 그런 도움을 요청하는 자들이 많은 것에 대해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면 줄수록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부요한 자가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딤전 6:17-19).  그렇다면 이렇게 서머나 신자들이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핍박을 받아가면서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소망을 땅에 두지 않고 영원한 천국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이 선진들처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 것입니다.

 

◈ 서머나 교회의 또 다른 문제는 유대인들의 훼방이었습니다(계 2:9).  유대인들은 그 당시에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로서 오늘날로 말하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된다”고 말하자 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라고 말합니다(요 8:31-33).  이 말의 의미는 조상 아브라함이 섬겼던 하나님을 자신들도 잘 섬기고 있으니까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잘 섬긴 백성들일까요?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통해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마 4:8-9).  이 말은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하지만 영적으로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요 8:37).  이들은 입으로만 믿었지 행동은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막 7:6, 딛 1:1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이 이들을 어떻게 보시느냐는 것입니다.  분문에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라고 말합니다(계 2:9).  여기서 ‘유대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를 의미하며 ‘사탄의 회’라는 말은 마귀의 도구가 되어서 교회를 향해 온갖 악하고 더러운 짓을 다하는 사탄의 집단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주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식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타락하면 불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앞잡이가 되어서 주님의 자녀들에게 온갖 못된 짓을 다하는 것입니다(벧후 2:20-22).  마치 바울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것처럼 말입니다(딤전 1:13).  그러기 때문에 교회에 간다고 해서 주의 자녀가 아니고 간판을 걸어 놓고 사람만 모인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겉은 교회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사탄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환난과 궁핍한 생활을 하는 서머나 교회에게 주님은 반가운 소식이 아닌 무겁고 힘든 소식을 전하는데 그것은 이 교회에 당분간 환난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계 2:10).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정부와 결탁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는데 앞잡이 노릇을 했습니다.  사탄의 선동을 받아 서머나 교회를 참소하고 핍박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참소는 사도행전에 여러 차례 기록을 하고 있는데(행 13:50, 14:2, 5, 19, 17:5), 본문에 ‘시험’은 단순히 옥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서머나 신자들 중에 순교의 영광을 얻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십일 동안’이라는 말은 확실하고 피할 수 없는 고통의 기간을 말하는 것으로 서머나 신자들에게는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통과해야 할 것을 말해줍니다(행 14:22).  다시 말해서 서머나 교회가 걸어가야 할 고난의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딤후 3:12).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렇게 앞으로 있을 고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서머나 신자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시키고 계신 것으로 기왕 옥에 갇히고 순교의 피를 흘릴 바에는 세상과 죄와 타협하지 말고 담대하게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주님은 서머나 신자들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다시 한 번 당부하십니다(계 2:10).  이것은 무섭고 어려운 시험이 다가오면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살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라는 것입니다(계 13:4-5).  주님의 말씀 속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해 비굴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이긴 주님만을 바라보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요 16:33).  왜냐하면 담대함이 나중에 큰 상급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히 10:35).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마 5-7장).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좁은 길로 걸어가기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마 16:24).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세 사람이 주님을 따르려고 할 때 그들은 대가를 치르지 않고 따르려고 하자 주님은 그들에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해야 하고 죽을 각오를 하고 믿음으로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7:13-14).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난의 길을 갈 때 혼자서 가지 않고 주님이 끝까지 동행을 해주신다는 것을 믿고(마 28:20), 고난을 당할 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시 23:4).  왜냐하면 고난의 키를 주님이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사 45:7).

 

◈ 분문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2:10).  여기서 ‘충성’이라는 말은 “믿음이 꽉 찬”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주님에 대한 신앙의 절개를 말하며 이것은 생명을 걸고 신앙을 지키라는 말로서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서머나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순교할 것이라는 말씀은 아니지만 모든 신자들이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음을 각오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 앞에서도 주님에 대한 일편단심 신의를 지킬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계 14:4).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님을 위해 고난이 다가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때에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을 쓰지 말고 그 가운데서 죽을 것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면 물론 죽는 사람도 생길지 모르지만 그 가운데는 반드시 길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복음을 알바니아라는 나라에서 전하다가 붙잡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살아나온 YWAM의 사역자 ‘레오나 피터슨’과 ‘에비 머글턴’의 간증은 로렌 커닝햄의 저서『벼랑 끝에 서는 용기』와 『네 발에 신을 벗으라』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처럼 죽기 하루 전날에 감옥에서 빠져 나오는 것과 같은 극적인 상황에서 구출된 것을 기록한 실화 간증이야기입니다.  반면에 같은 YWAM의 사역자들인 ‘마이크’와 ‘제니스’ 부부는 두 살배기 딸과 3개월 된 아들과 함께 필리핀 산악지역에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부족민들에 의해 살해를 당하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로렌 커닝햄 목사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하나님께 이렇게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이제 당신의 모든 보호하심이 떠나버렸습니까? 하나님!”

 

이 일이 있는지 며칠 뒤에 태국 내 캄보디아 국경 길에서 의료사역자 9명이 소형 승합차를 타고 사역지로 가다가 게릴라들에 의해 무차별 총격을 받아 모든 유리창은 다 깨어지고 말 그대로 총알이 빗발치듯 그들을 행해 날러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총격이 끝나고 부셔진 차에서 의료 사역자 9명이 간신히 나왔을 때 상처를 입은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고 그것도 총알이 머리 옆을 스치는 가벼운 상처였습니다.  총알을 맞은 차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고 부셔졌지만 이들은 멀쩡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던 로렌 커닝햄 목사는 마치 하나님이 “로렌, 이 제 YWAM의 사역자들이 나의 보호아래 있다는 것을 알겠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그분의 살아계심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히 11:6).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있는데 그것은 두 번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둘째 사망”이란 마귀와 그의 추종자들과 불신자들이 들어가는 영원한 형벌인 불못을 말하는데(마 25:41, 계 20:14), 이 둘째 사망은 영과 육이 분리되는 첫째 사망과 구분되는 사망으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는 무서운 형벌을 말합니다(계 21:8).  즉, 육체적인 사망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으로 인간의 육체가 멸절이 되지 않고 끝없이 의식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형벌입니다(계 20:10).  그래서 주님은 서머나 신자들에게 고난 받는 것과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고난이 두렵다고 해서 주를 부인한다면 정말 자비가 없는 무서운 심판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마 10:28).

 

◈ 오늘날처럼 신앙의 절개가 귀한 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군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딤후 2:4).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마귀와 끝까지 싸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엡 6:10-13).  본문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다르게 책망이 하나도 없는 칭찬만을 받은 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칭찬을 받은 이유는 어려운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잘 견디어 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질문해 봐야 합니다.  만약에 진리의 말씀 위에 서서 싸우기를 포기한다면 둘째 사망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의 말씀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 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영혼을 자유케 하기 때문입니다(요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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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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